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 풀 한 포기, 좁쌀 한 알 :
무위당 선생님 말씀
무위당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녹색평론사, 1997.
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 2004.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음,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녹색평론사, 2004.
지난 5월 15일, 스승의 날이라고 학생 둘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겠지만 쑥스러워할 것 같기도 하고, 나 역시 마땅한 말머리를 찾지 못해서 읽고 있던 책의 한 대목을 좀 길게 들려주었다. 한 번도 만나 뵌 적이 없지만 여기 이 분이 내 선생님이라고 말해 주었다. 무위당 선생이 붓으로 그린 사람 얼굴 모양의 풀 그림을 보여 주니 여학생 하나가 아주 재미난 듯 저절로 밝은 미소를 짓는다.
장일순이 최병하에게 말했다.
“너나 나나 거지다.”
최병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장일순도 물론 거지가 아니었고, 자신도 제재소를 경영하는 사장이었지 거지가 아니었다. 장일순이 뜨악해 하는 최병하에게 물었다.
“거지가 뭔가?”
“거리에 깡통을 놓고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여 먹고사는 사람들이지요.”
장일순이 받았다.
“그렇지. 그런데 자네는 제재소라는 깡통을 놓고 앉아 있는 거지라네. 거지는 행인이 있어 먹고살고, 자네는 물건을 사가는 손님이 있어 먹고사네. 서로 겉모양만 다를 뿐 속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장일순이 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하느님인가?”
최병하는 얼른 답을 못했다.
“거지에게는 행인이, 자네에게는 손님이, 고객이 하느님이라네. 그런 줄 알고 손님을 하느님처럼 잘 모시라고. 누가 자네에게 밥을 주고 입을 옷을 주는지 잘 보라고.”
밥집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 집에 밥 잡수시러 오시는 분들이 자네의 하느님이여. 그런 줄 알고 진짜 하느님이 오신 것처럼 요리를 해서 대접을 해야 혀. 장사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은 일절 할 필요 없어. 하느님처럼 섬기면 하느님들이 알아서 다 먹여주신다 이 말이야.”
학교 선생님에게는 누가 하느님인가? 그렇다. 학생이다. 공무원에게는 누가 하느님인가? 지역 주민이다. 대통령에게는 국민이 하느님이고, 신부나 목사에게는 신도가 하느님이다.
여기까지 읽어주고 나서 나는 그 두 학생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내 하느님이다.” 작지만 분명한 탄성을 들을 수 있었다. 무위당 선생의 말씀의 울림이 이 젊은 학생들에게도 조금이나마 전해진 것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서슬 퍼런 오랜 독재 정권 시절 동안, 자신이 쓴 글이 남들에게 피해 줄 것을 우려하여 갖게 된 습성이 몸에 배어, 평생 동안 글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의 읽기 자료들 모두가 이 분이 쓴 글이 아니라, 이 분의 말씀을 녹취한 것이나 이 분에 관한 기억과 생각을 다른 사람들이 쓴 글들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들을 다시 읽다 보니 무위당 선생이 글쓰기에 관해 하신 말씀이 특별히 눈에 들어왔다.
─ 가치관의 혼돈으로 많은 사람들이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우선 자신이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해 반성하는 고백의 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삶이 뭐냐, 생명이 뭐냐 하는 것을 헤아려야 할 시기입니다. 뭘 더 갖고, 꾸며야 되느냐에 몰두하는 시대는 이미 절정을 넘어섰어요. 글 쓰는 사람들이 가급적이면 고백의 글을 많이 써줬으면 좋겠어요. 갖겠다고 영원히 가져집니까. 원칙적으로 나의 것이란 없는 거지요. 이 자리에서 내가 말하는 것도 다 훌륭한 분의 영향에 의해 얘기하는 거지 나 스스로 알아 얘기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강조는 인용자가 함)
“잘 쓰려는 생각을 싹 버린 마음으로 쓰라는 것이었지요. 거기 생각은 하나도 없고 다만 정성만이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요.”
아래쪽 말은 무위당 선생의 제자가 자기 스승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그것도 글이 아니라 붓글씨에 관한 말씀이지만, 글을 쓸 때도 똑같이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말씀일 터이다. 두 말씀을 한데 모아 보면 어떤가. “잘난 척하고자 하는 마음을 싹 버리고 생명을 화두로 자기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라.” 무위당의 말씀을 통해 이런 식으로 올바른 글쓰기의 ‘지침’을 정리해 보았지만, 사실 오늘날 우리가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무위당 사상의 핵심이 이 간결한 말씀에 들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위당 선생은 “지금은 삶이 뭐냐, 생명이 뭐냐 하는 것을 헤아려야 할 시기”이지 “뭘 더 갖고, 꾸며야 되느냐에 몰두하는 시대는 이미 절정을 넘어”섰다고 말한다. 이 인터뷰는 1991년에 한 것이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뒤인 지금이라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아마도 똑같은 말씀을 훨씬 더 간곡하게 하거나 아예 침묵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한마디는 특별히 강조해서 꼭 하실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반드시 탈핵脫核으로 가야 하고, 30년 넘은 핵발전소들은 지금 당장 폐쇄해야 한다.” 이런 상상이 자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위당 선생이 돌아가시기 2년 전인 1992년에, 내가 알기로는 생애 가운데 단 한 번 출연한 어느 TV 프로그램의 말미에서 이런 말씀을 했다.
기본적으로 운동을 하다 보니까, 이 산업문명 자체가 계속 자연을 파괴해가고, 우리가 살아가는 땅마저도 망가뜨려가고 또 그 속에서 생산되는 우리들의 농산물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질병을 가져오고 이렇게 되니까, 이래 가지고는 아무 의미가 없지 않느냐. 땅이 죽고 사람이 병들고 그러면 끝나는 게 아닙니까? 자연이, 생태계가 전부 파괴되고. 그것은 정치 이전의 문제요 근원적인 사람의 문제다, 이 말씀이야. 그러니까 오늘날의 정치라든가 경제라든가 이런 것은 경륜이 없는 거라, 살아가는 길이 없는 거예요. 막힌 짓들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살아가는 길을 틔워주는 방향에서 우리가 서로 이야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저는 생각을 학고 있는 겁니다.
어차피 어떤 한 시대가 가고 변화하는 시대가 아니라, 문명 자체가 지금 종말을 고하는 세상이고, 지구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그런 시대니까, 삶의 방향이 어디로 가야 되는가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결단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하는 위기에 왔다고 하는 것을 한마디 드리고 싶어요. 이것은 기복신앙이라든가 미신신앙에 있어서 어떤 극락에 가야 하겠다든가, 언제 지구가 망한다든가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인간이 저지른 과오 때문에 자연이 파괴되고 인간과 인간끼리의 영성이 다 파괴됐는데 이것을 회복해야 하는 중요한 국면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만은 명심해야 되겠다 하는 얘깁니다. (강조는 인용자가 함)
이미 20여 년 전에, 무위당 선생은 “문명 자체가 지금 종말을 고하는 세상이고, 지구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그런 시대”라고 말했다. 최근의 그 뚜렷한 징후가 바로 후쿠시마 사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의 극우 정권과 핵 마피아 세력은 이 사태의 진상을 덮어 버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지만, 이미 일본의 국운은 끝났다는 판단마저 있다. 후쿠시마 사태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 암울한 일본의 상황을 놓고 인터넷에 달리는 댓글을 보면 마치 ‘그거 참 쌤통!’이라는 듯이 말하는 사람들을 흔히 보게 되는데, 이런 태도야말로 지극히 어리석은 것이다. 후쿠시마 사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일본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공기와 음식 등을 통해 후쿠시마 사태의 영향을 직접 받아 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심각한 문제는 우리나라에도 이미 설계 수명 30년을 넘기고 연장 가동되고 있는 핵발전소가 3기나 있고,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고장과 비리에 관한 기사가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밀양과 청도 등지의 선량하고 힘없는 노인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을 대가로 건설을 강행하고 있는 초고압 송전탑들도, 새로 짓는 핵발전소가 없다면 애초부터 필요 없는 것들이다. 만약 2011년 3월 11일에 무위당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후쿠시마 사태는 인류 문명의 잘못된 방향에 대한 자연의 마지막 경고라는 말씀을 반드시 하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확신은 무위당 선생의 생명사상과 그것을 낳은 선생의 생애에 근거한 것이다.
무위당 선생은 1928년에 원주에서 태어나 1994년에 향년 67세로 돌아가셨다. 선생의 집안은 임진왜란 때 원주에서 전사한 13대조 할아버지 이래로 이곳에서 토박이로 살아 왔다고 하니, 원주라는 한 고장에 뿌리를 내리고 산 지 400년이 넘는 매우 희귀한 가문이다.
선생 역시 서울로 유학 간 몇 년을 빼고는 돌아가실 때까지 고향 원주를 떠나 본 적이 없었다.
(……) 자기 고향을 무시하고 자기 겨레를 무시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마뜩치 않데요. 원주는 치악산이 막혀서 사람이 나지 않는다는 옛이야기가 도무지 내 마음에 맞지 않았죠. 착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사는 게 가장 보배로운 삶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그냥 고향에 남게 되데요.
이렇게 한 고장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산 삶은 무위당의 생명 사상을 낳는 데 가장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조건이 되었다. 도시의 콘크리트 문명 속에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산 사람에게서 제대로 된 생명사상이 나올 리 없다. 게다가 무위당은 자신의 첫째 스승으로 할아버지를 꼽는데, 할아버지가 몸으로 보여주신 일상생활 자체가 어린 시절로부터 자연스럽게 무위당 생명사상의 큰 바탕이 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 그래서 그렇게(장사를 하시면서-인용자) 모은 돈으로 땅도 좀 마련하고 불쌍한 사람도 도와주고. 교육이 필요하다 학교를 지어야 한다고 하면 돈도 기부하고, 땅도 기부하고 학교도 지어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양반은 팥알 하나 쌀알 하나가 마당에 떨어져 있어도 그걸 전부 이남박에다 주워서 담으셨습니다. 하늘과 땅과 농부가 애써서 만든 것인데 그냥 버리면 되느냐구요. 그리고 종이 하나도 함부로 버리시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놓고는 귀하게 쓰세요.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주무실 때까지 하시는 행동이 일관돼요.
거지가 와서 한술 주세요 하면, 그것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고생은 좀 하셨지만, 사랑에 계시면서 안채에다 대고 크게 호령을 하세요. “야 어멈아 손님 오셨다” 그러면 상 받쳐다 마루에다 대령해야 되죠. 또 겨울에는 방에 들어가 자시라고 국밥을 말아줬어요. 그리고 농사철에 타작이 끝나고 소작인들이 오셔서 보라고 하거든요. 공평히 나눌 테니까 와서 보시라구요. 그러면 조부님은 가볼 게 뭐 있느냐고 안 가세요.
누구 돈을 꿔줘도 가 달라 소리를 안 하세요. 내가 아홉 살 땐데, “돈 3백 원을 아무개가 꿔 가서 안 가져 오시니 제가 가서 얘기를 할까요” 하고 우리 아버지가 할아버지한테 여쭈었어요. 그러니까 내 조부님 말씀이 “너도 자식을 키우잖니, 돈은 줬으면 그만이지 달라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하시는 거예요. “갚을 마음이 있어야 되는 거지, 갚을 마음이 없는 사람한테 가서 돈을 달래면 돈은 받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잃고, 또 갚을 마음은 있는데 돈이 없어 못 가리는 사람한테 가서 달래면 그 사람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워. 그러니 그런 슬기롭지 못한 짓은 하지 마라” 하고 당신 자식을 그렇게 가르치시더라구요. 나는 못 들은 척하고 마당에서 들었어요. 그러던 분이세요.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