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블루
1992년 12월 7일, 퓨젓사운드만의 위드비섬. 세계대전은 끝났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도 끝났다. 냉전 역시 마침내 종식되었다. 위드비섬 해군항공기지는 남아 있다. 그리고 산호해 해전에서 시신을 남기지 않고 전사한 전투기 조종사 윌리엄 올트의 이름을 딴 비행장 너머로 한없이 넓고 깊게 펼쳐진 태평양 역시 그대로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바다는 사람의 몸을 통째 삼켜 불멸의 존재로 만든다. 윌리엄 올트는 다른 이들을 하늘로 실어 보내는 활주로가 되었다.
해군항공기지에서는 해저에 설치된 수중음파탐지망이 수집한 무한한 데이터의 형태로 무한한 태평양을 읽어낸다. 애초 냉전시대에 소비에트 잠수함을 감시하는 데 썼던 이 수중음파탐지기는 냉전이 끝난 이후로는 바다 자체에 귀를 기울이며 형체 없는 소음을 측정 가능한 형태로 변환해왔다. 스펙트로그램파형과 스펙트럼을 조합해 소리나 파동을 시각화한 그래프. 출력기에서 밀려 나오는 그래프의 형태로.
1992년 12월 어느 날, 해군 병장 벨마 론킬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 소리를 자세히 살피려 다른 스펙트로그램으로도 출력해보았다. 믿기지 않게도 이 소리의 주파수는 52헤르츠였다. 벨마는 손짓으로 음향기술자에게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했다. 다시 와봐요, 다시 한번 보세요. 음향기술자의 이름은 조 조지였다. 벨마가 말했다. “고래 소리 같은데요.”
조는 생각했다.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리의 패턴은 대왕고래 울음소리와 비슷했지만, 대왕고래의 주파수는 일반적으로 15~20헤르츠, 즉 인간의 주변청각 범위에 존재하는 식별하기 어려운 웅웅 소리다. 52헤르츠는 고래의 주파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런데 홀로 높은 소리로 노래하며 태평양을 누비는 어떤 생물의 음성기호가 이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고래가 우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길을 찾는 울음, 먹이를 찾는 울음, 소통하려는 울음. 혹등고래나 흰수염고래 같은 특정 종은 짝짓기 상대를 찾으려 노래한다. 수컷 흰수염고래 같은 특정 종은 짝짓기 상대를 찾으려 노래한다. 수컷 흰수염고래의 울음소리는 암컷보다 큰데, 180데시벨이 넘는 소리를 내는 이 수컷 흰수염고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는 동물이다. 수컷 흰수염고래는 쩍쩍 소리, 킁킁 소리, 굴리는 소리, 윙윙 소리, 끙끙 소리를 낸다. 뱃고동 같은 이 울음소리는 바닷속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나간다.
52헤르츠 주파수의 울음소리는 전례 없었기에, 위드비섬 연구원들은 수년간 이동철마다 알래스카에서 멕시코를 향해 남쪽을 향하는 이 고래를 추적했다. 교미기에 노래를 부르는 것은 수컷뿐이므로 고래는 수컷일 것이었다. 고래의 이동경로에는 특색이 없었고, 특이한 것이라고는 울음소리, 그리고 주변에서는 다른 고래의 존재가 단 한 번도 탐지된 적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 고래는 늘 혼자인 듯했다. 그의 높은 울음소리를 듣는 이, 적어도 그의 울음에 대답하는 이는 없는 듯했다. 음향전문가들은 그를 52 블루라고 불렀다. 이후 한 연구 논문을 통해 기존에 그와 유사한 울음소리 특성을 가진 고래가 발견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 논문의 결론은 이렇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일지 모르나, 그와 같은 종의 고래는 단 한 마리뿐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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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에서 위드비섬까지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눈앞에 워싱턴 산업지대의 꾸밈없지만 다채로운 장관이 펼쳐졌다. 거대한 재목 더미, 어장에 갇힌 물고기처럼 강줄기를 메우고 있는 나무줄기들, 스캐짓 항구 근처에 탑처럼 쌓여 있는 사탕 빛깔의 운송용 컨테이너들. 그리고 퓨젓사운드만 위로 웅장하게 버티고 있는 디셉션패스브리지 인근의 지저분한 흰색 저장탑들이 보였다. 61미터 높이 다리 아래를 흐르는 물이 부서지는 햇살을 받아 선명하게 반짝였다. 다리 건너편에 자리한 섬은 목가적인 동시에 세상과는 동떨어진 듯 방어적으로 보였다. “쓰레기 투기 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써진 표지판이 보였다. 또 다른 표지판에는 “난방 장치 주변에는 아무것도 두지 마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위드비섬은 자칭 미국에서 가장 긴 섬이지만 엄연히는 사실이 아니다. “위드비섬은 길다. 그렇다고 그 길이를 과장하지는 말자.” 《시애틀 타임스》의 2000년 논평이다. 위드비섬은 연날리기 축제, 홍합 축제, 연례 자전거 경주 투르 드 위드비가 열리고, 내륙호가 네 개 있으며, 매년 1035명이 사는 랭글리 전체를 범죄현장으로 꾸미는 살인 미스터리 게임이 열릴 만큼은 길다.
52 블루의 존재를 최초로 식별해낸 음향기술자 조 조지는 아직도 항공기지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위드비섬 북쪽 끝 나지막한 언덕에 살고 있다. 조지는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았다. 그는 머리가 하얗게 센 건장한 남성으로, 친절하고 담백했다. 항공기지 근무를 그만둔 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해군 신분증으로 보안을 통과해 우리를 기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지금도 재활용 쓰레기를 버릴 때면 이 신분증을 사용해 기지로 들어간다. 장교회관 앞 목제데크에서 비행복을 입은 남자들이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들쑥날쑥한 해안선 너머로 펼쳐진 바다가 아름다웠다. 짙은 모래에 파도가 부서지고 소금기 섞인 바람이 상록수를 훑고 지나갔다.
항공기지에서 일하던 시절, 수중음파탐지기로 수집한 음성 데이터를 처리하는 조의 팀은 기지 내에서 격리되어 있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보안 때문이었다. 그가 일하던 건물에 도착하자 그 말뜻을 알 수 있었다. 꼭대기에 날카로운 철선이 쳐진 철책이 두겹으로 건물을 둘러싸고 있었다. 몇몇 군인은 이곳을 감옥이라 여겼고, 대다수는 이 건물의 용도를 까맣게 몰랐다. 1992년 당시, 귀에 들어온 소리가 고래 울음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무엇이라고 생각했느냐고 묻자 조는 대답했다. “답변할 수 없습니다. 기밀이어서요.”
다시 조의 집에 돌아오자, 그는 52 블루를 쫓던 시절의 서류 다발을 꺼냈다. 10년에 달하는 기간의 이동패턴을 기록한 이 컴퓨터 지도에는 1990년대 중반 컴퓨터 그래픽기술로 이루어진 조악한 선으로 매해 고래의 여정이 노랑, 오렌지, 보라 같은 다양한 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조가 52 블루의 노래가 담긴 차트를 보여주면서 선과 측정 기준을 설명한 덕에 나는 52 블루의 특징적인 울음을 보통의 흰수염고래가 내는 낮은 주파수, 혹등고래의 훨씬 높은 주파수 등 전형적인 고래의 것과 비교할 수 있었다. 흰수염고래의 노래는 목구멍을 길게 울리는 소리, 끙끙 소리,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소리, 억양이 있는 소리 등 다양한 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52 블루가 내는 소리는 특징적인 패턴은 같았으나 튜바의 가장 낮은 음보다 높은 것으로, 다른 고래들과는 완전히 다른 주파수였다. 조는 52 블루의 노래를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있도록 속도를 빠르게 조정한 짧은 녹음본을 들려주었다. 유령 소리처럼 으스스했다. 달이 뜬 밤 짙은 안개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빛줄기를 뒤로 듣는다면 이럴 것 같은, 격렬하게 고동치는 새된 소리였다.
조는 차트와 지도를 즐겁게 설명했다. 정돈과 질서를 사랑하는 성격인 듯싶었다. 그가 자랑스레 보여준 다양하면서도 뜻밖인 취미의 산물들(그가 수집한 인상적인 벌레잡이식물들, 그리고 먹이로 주려고 직접 키우는 벌들, 그리고 18세기 모피 사냥꾼 모임 재연을 위해 키트로 만든 새것 같은 머스킷 소총)에서 다정하고 정성스러운 성격이 묻어났다. 조는 무슨 일을 하건 정확하고 정교하게 임하는 사람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식물이라는 코브라 릴리를 보여주며 이 식물의 반투명한 포충낭이 파리의 눈을 속여 빛을 향해 날아들게 만든다고 설명하고는(코브라 릴리의 형태가 가진 경제성과 독창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음이 역력한 말투였다.) 휘어진 줄기 뒤쪽에 한파를 대비한 서리방지포를 조심스레 고정했다.
조는 오래된 고래 차트를 꺼낼 기회가 생겨서 기분 좋아 보였다. 차트는 52 블루의 이야기가 아직 세상에 펼쳐지기 전, 조가 그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시절로 그를 돌려보냈다. 위드비섬에 가기 전 조는 몇 년간 아이슬란드의 어느 항공기지에서 서류상으로 “고된 임무”라는 분류되는 일을 했는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딱히 고되지는 않았다. 그의 아이들은 블루 라군 옆에 눈사람을 만들었단다. 조는 위드비섬 임무에 적임자였다. 숙련된 음향기술자로, 날카로운 철책에 둘러싸인 작달막한 벙커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음향감시체계Sound Surveillance System 또는 SOSU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수중음향장치 추적 시스템은 일종의 “사생아”였다. 냉전이 끝나고 도청할 소비에트 잠수함이 없어지자 해군은 이 값비싼 수중음향장치를 유지할 설득력 있는 이유가 필요했다. 그런 처지에 있던 장치가 애초 이 작업을 시작한 이들조차도 깜짝 놀랄 만한 성과를 이뤄낸 것이었다. 위드비섬에서 조와 함께 음향기술자로 일했던 대럴 마틴은 그 성과를 이렇게 묘사했다. “쇳덩이로 된 상어 전문가였던 우리가 살아 숨 쉬는 동물을 추적하게 된 겁니다. 바다가 들려주는 소리는 무궁무진합니다.” 그렇게, 자기 집 부엌에 앉아 낡아빠진 폴더 속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그래프에 기록된 특별한 노래를 짚어준 한 남자 덕분에 한 고래의 수수께끼는 살아남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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