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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촌의 어제와 오늘
동자동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2017년 가을 예비연구 과정에서 동자동을 처음 방문하고 난 뒤 약 1년 반 만이었다. 서울역과 지근거리에 위치하는 덕에 한 번만 가보면 누구나 쉽게 다시 찾을 수 있다. 동자동과 쪽방촌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있지만, 서울역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5월 말의 후텁지근한 날씨와 서울역을 오가는 사람들의 분주함으로부터 내 현장은 시작되었다.
서울역 11번 출구로 나와 벽산빌딩현 게이트에이타워을 지나면 일명 ‘동자동 쪽방촌’의 초입이 등장한다. 우뚝 치솟은 빌딩들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 데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 1층에는 온갖 음식점이 있어서, 1,000개가 넘는 쪽방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조차 쉽지 않다. 쪽방촌 앞을 지나가는 시민들은 빌딩 숲 한가운데에 이렇게 허름한 건물들이 있다는 사실에 잠시 의문을 품을 뿐이다. 저녁이면 술에 취한 회사원들이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내뱉는 고함소리와 바로 옆 새꿈어린이공원에서 술판을 벌이는 쪽방 주민들의 목소리가 섞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자동 지역사에서 서울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동자동과 서울역이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뿐 아니라, 빈민 밀집 거주 지역이라는 동자동의 역사적 정체성이 서울역 때문에 만들어졌다. 내가 서울역을 통해 다시 동자동을 찾아왔듯, 맞은편에서 항상 같은 자리에 존재해온 서울역은 동자동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이자 동자동의 역사를 설명하는 주요 표지다.
서울역과 함께 동자동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또 하나의 표지가 있다. 동자동을 다시 찾았을 때 나는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시설을 발견했다. 돌다릿골빨래터는 폭염에 시달리는 쪽방촌 주민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서울시가 2018년 설치한 무료 세탁 시설이다. ‘돌다릿골’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과거의 희미한 흔적이다.
동자동의 과거
조선말까지 동자동은 육전조례六典條例에서도 이름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동네였다. 동자동의 경계 안에는 여러 작은 마을이 있거나 걸쳐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그중 하나가 돌다릿골이다. 돌다릿골은 동자동과 서계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마을에 돌다리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자 이름인 석교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서계동과 동자동 사이에 걸쳐 있는 또 다른 마을로 배다릿골과 새말이 있었다. 배다릿골은 말 그대로 배다리라는 다리가 있다고 해서, 새말은 새로 생겨난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졌다. 그뒤 배다릿골과 새말은 각각 주교동舟橋洞과 신촌동新村洞으로 불렸다.
일제 강점기까지도 동자동이라는 명칭은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의 동자동 지역은 1914년부터 경성부京城府에 속해 일본식 지역인 고시정古市町 으로 불렸다. 광복 뒤인 1946년 10월 일제식 행정구역 명칭을 전면적으로 개정하면서 정町이 동洞으로, 정목丁目이 가街로, 통通이 로路로 개칭되었다. 고시정도 비로소 현재의 명칭인 동자동으로 바뀐다.
당시 용산구에 속한 35개 동을 살펴보면, 현재 동자동을 둘러싸고 있는 후암동, 갈월동, 남영동은 모두 용산구에 속해 있으나 동자동은 없다. 동자동이 용산구에 편입된 것은 1975년 10월 대통령령 제7816호에 따라 구 관할구역이 대폭 변하면서부터다. 이전까지 중구에 속해 있던 동자동東子洞, 도동 1가, 도동 2가의 일부가 다른 6개 동과 함께 용산구로 편입되었다. 1985년 9월에는 도로 건설이나 아파트 건립 등으로 주민의 생활권이 불합리하거나 경계가 분명치 못한 동을 대상으로 관할구역이 조정되면서 다시 도동 2가가 후암동에, 도동 1가가 동자동에 편입되었다.조례 제2016호 1988년 1월에는 동자동 일부가 후암동에 편입되면서조례 제2251호 도동이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후암동과 동자동 사이에 현재와 같은 경계가 만들어졌다.
동자동에 일부가 편입된 도동桃洞은 복숭아나무가 많아 ‘복숭아골’이라 부르던 데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동자동과 북동쪽 경계를 마주하고 있던 양동陽洞은 볕이 잘 드는 동네라 해서 ‘양짓말’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본래 중구에 속해 있던 동자동은 서계동西界洞과 대칭을 이루어 동쪽에 있다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돌다릿골이라는 명칭이 근대화 이전 동자동의 흔적을 보여준다면, 서울역과 관련한 동자동의 역사는 한국전쟁 이후 늘 이곳에 달라붙어 있던 빈곤의 역사를 보여준다. 다소 복잡한 행정구역의 확장과 변화로 동자동의 법적·행정적 경계는 계속 바뀌었지만, 동자동은 언제나 빈민이 밀집해 거주하는 장소였다.
광무 4년인 1900년 서울역당시 남대문역이 최초로 개통된 뒤 주택가와 상가가 밀집한 이 지역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극심한 전재戰災를 겪었다. 서울역은 인적·물적 자원 수송의 핵심지이자 서울로 진입하는 철도 교통의 관문이었다. 따라서 미군의 폭격이 서울역을 비롯해 철도, 도로, 교량이 밀집한 용산구에 집중되었다. 궁궐이 밀집한 종로구나, 주거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동대문구와 성북구에 비해 피해 역시 심각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폐허가 된 동자동 지역에 피난민과 빈민이 몰려들어 판잣집을 짓기 시작했다. 일부 건물은 서울역의 유동 인구를 상대로 숙박업을 벌였다. 남대문 상권 안에 위치한 데다가 서울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유동 인구가 많았다. 도동현재 동자동 및 후암동과 양동현재 남대문로5가에는 판자촌과 함께 대규모 윤락 시설도 들어섰다. 동자동의 지리적 위치와 서울역의 존재가 빈민 밀집 거주 지역이라는 정체성의 출발선이었다.
빈민 밀집 거주지이자 대규모 사창가라는 이 지역의 악명은 “정화”되어야 할 오염의 상징이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정부가 성매매 밀집 지역을 집중적으로 단속하며 판자촌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1970년 당시 동자동의 행정 관할구인 중구는 6억 5,7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남대문 일대와 도동, 동자동에 있던 약 512동의 무허가 건물과 여전히 성행하던 윤락가 철거 계획을 세웠다. 거주하던 2,700여 명의 주민은 광주대단지현재 경기도 성남시로 이주시킬 예정이었다. 빈곤과 빈민 운동의 역사에서 굵직한 사건으로 기록된 광주대단지 사건에도 동자동에서 흘러나온 역사의 얼룩이 묻어 있었다. “새봄의 새사업”이라는 희망찬 이름으로 불린 이 사업은 1970년 10월, 양동과 도동 일대의 윤락가와 판자촌을 1년여 만에 “정화”한다. 정부의 집중적인 단속과 철거로 많은 건물주가 성매매 업소로 이용되던 건물을 도시 노동자를 상대로 한 여관과 여인숙으로 용도를 변경했다. 현재의 쪽방과 비슷한 형태의 주거지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도 여전히 동자동에 붙어 있던 “범죄의 온상”, “서울에서 손꼽히는 윤락가”, “악의 소굴”이라는 별칭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수룩한 밤 골목을 지나가다가 얼굴과 뒤통수를 얻어맞고 손목시계와 현금을 빼앗겼다던가, 난데없이 나타난 불량배에게 폭행을 당해 전치 5주의 부상을 입었다던가, 윤락업소의 성매매 여성이 지나가는 고등학생의 소매를 붙잡고 호객행위를 하는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졌다. 동자동은 “많이 정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수도 서울의 얼굴에 먹칠하는 곳”이었다. 1970년대 말 소설가 김홍신이 『인간시장』의 집필을 위해 취재를 나갔다가 불량배와 인신매매범을 만나 고초를 겪은 현장, “법과 상식과 윤리와 도덕과 바른 소리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지는 우범지대, 현대판 홍길동인 『인간시장』 속 주인공 장총찬이 활약하는 무대가 바로 양동, 도동, 동자동 일대였다. 1981년 양동 일대의 주민들이 지금의 남대문로5가로 동명을 바꿔달라고 서울시에 진정을 넣은 까닭도 윤락가의 대명사이자 범죄가 횡행하는 우범지대의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싶어서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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