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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 2011년 5월
아주 어릴 적에 나는 《그린 맨The Green Man》이라는 그림책에 푹 빠졌었다. 부유한 청년이 숲속 연못에 수영하러 갔다가 옷을 도둑맞고 하는 수 없이 야생에서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이제는 별로 기억나는 건 없지만 당시 나를 사로잡았던 책의 매력과, 삽화 속 나뭇잎을 꿰매 만든 남자의 초록색 옷이 참나무와 거의 흡사했던 것은 기억한다. 나도 이따금 자연 속으로 사라지고픈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스무 살에는 거의 성공할 뻔했다.
내가 지구를 걱정하게 된 건 근심 어린 얼굴로 책상맡에 앉아 온실가스에 관한 지리 수업을 들으며 연필로 너덜너덜해진 오존층 도표를 그리던 학창 시절부터다. 10대 때는 뉴에이지 여행자*와 환경보호 운동에 특히 매료되었다. 이러한 저항 문화는 1994년에 제정된 사법 및 공공 질서법Criminal Justice and Public Order Act이 이들의 다양한 집회와 시위 행태를 불법화하기 전까지 꽤나 인상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그 현장을 담은 〈아이디〉나 〈페이스〉 같은 잡지를 뒤적이며 마차나 야외 파티에서 레게 머리를 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의 사진을 찾아보다가 나중에는 나도 직접 동참했다.
*1980년대 영국에서 현대사회의 가치를 거부한 채 밴이나 트럭을 타고 축제 등을 좇아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들을 일컫는 말.
나는 서식스 대학의 급진적인 커리큘럼에 반해 케임브리지 대학을 포기하고 도심 시위의 진원지인 브라이턴으로 이주했다. 때는 임시 자율 구역**으로 대변되던 시대다. 고속도로나 트래펄가 광장에서 벌어진 ‘거리를 수호하라’ 파티 시위, 교통 흐름을 막는 풍선 캐슬, 탱크나 자전거 발전기에 설치된 불법 음향 기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추는 수천 명의 사람들. 무기 거래와 맥도날드에 반대하는 데모. 빈집을 점유한 사람들이 우편물 넣는 곳에 대고 경찰을 향해 형사법 제6조를 외친다. “우리 허락 없이 무단으로 이 사유지를 침범하거나 여하한 시도를 하는 것은 불법이니 명심하라.”
**사회 운동가 하킴 베이Hakim Bey가 제안한 정신적 유토피아 개념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공동의 이념적 목표를 위해 모인 시위대 캠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모든 행위가 도로 건설 반대의 일환이었다. 1990년대 초, 영국 정부가 대대적인 도로 건설 프로젝트를 전개하자 이에 반대하는 영국인들이 비폭력 직접행동을 감행한다. 특별 과학 관심 지역이 다수 포함된 야생 생태계의 파괴와, 자동차로 인한 환경오염 및 기후 악화를 막기 위해서였다. 1992년 트와이퍼드 초원을 시작으로, 시위대는 건설 작업을 막거나 지연시키기 위한 직접행동 기술 ― 불도저 앞에 드러눕거나 설비에 자기 몸을 묶거나 터널 굴착 현장을 점령하는 등 ― 을 동원해 도로 건설 예정 부지를 점거했다. 시간이 흘러, 시위대가 위기에 처한 수목에서 버티면서 이들의 나무 생활이 시작된다. 퇴거 총력전이 펼쳐졌지만, 높은 비용과 부상 위험 탓에 다수의 도로 건설 프로젝트가 무산되었다.
10대 후반이었던 나는 영문학 학위는 내팽개치고 도로 반대 시위 현장을 떠돌며 뉴버리와 페어마일에 몇 주씩 머물렀다. 어둠이 내린 야영지에 도착해 나뭇가지 사이로 째질 듯이 울려 퍼지는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트리 하우스의 울퉁불퉁한 실루엣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곳의 입장 티켓은 오직 등반용 안전벨트뿐이었다. 내 것은 분홍색과 초록색 줄무늬 로프가 달린 파란색 장구였다. 나는 로프를 타고 오르내리는 법을 배워 힘겹게 나무 꼭대기까지 내 몸을 끌어 올렸다. 나무 위에 올라가면 지상 9미터 높이에서 나무와 나무를 잇는 두 개의 파란색 줄을 따라 움직였다. 위쪽 줄에 개인 로프를 연결한 다음 발 아래 놓인 줄 위를 걷다 보면 목구멍에서 심장이 뛰고 털 없는 유인원의 위태로운 지위로 돌아간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여름에는 아끼는 산림의 일부가 우회 도로 건설에 깎여 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지역민들이 모인 도싯의 소규모 시위대 캠프에 합류했다. 테디베어 우드는 너른 목초지까지 가파르게 이어진 너도밤나무 숲이다. 우거진 수풀 사이에는 집행관의 방문에 대비해 방어용 그물이 쳐져 있었다. 그곳에 누우면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푸른 리본이 보인다. 남쪽으로 1.5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바다다. 거기서 하루 종일 뭘 했느냐고? 우리는 나무와 물을 구하고 나무를 베고 쪼개고 음식을 준비하거나 몸을 씻으려고 수없이 숲을 오갔다. 전기 없이는 가장 기본적인 일도 몇 시간이 걸렸다.
그 여름의 끝 무렵 나는 대학을 그만두었다. 별을 지붕 삼아 야생에서 살면서 마주한 세상은 한없이 사랑스럽고 한없이 위태로워 보였다. 테디베어 우드는 무사했지만 뉴버리와 페어마일은 사라졌고, 참나무 고목은 전기톱에 쓰러지고 관목은 굴삭기에 파헤쳐졌다. 페어마일을 빼앗겼을 때 나는 이동 시간을 겨우 몇 분 아껴준다는 양방향 도로 때문에 그토록 아름다운 공간이 파괴된다는 사실과 우리의 노력이 형편없어 지구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수치심에 흐느껴 울었다. 더는 그곳의 일원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지구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사는 법을 찾고 싶었던 나는 그렇게 시골로 들어가 스무 살의 나이에 혼자서 전기도 수도도 없이, 돌이켜보면 사람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모습으로 살게 되었다.
당시 친구 몇이 브라이턴 북부 윌든에 버려진 돼지 농장을 꾸며 유기농 농원을 시작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해 겨울 우리는 검은색 도지 트럭을 타고 그곳을 보러 갔다. 프리스트필드는 야생 자두나무와 앙상한 딱총나무가 줄지어 선 너른 길목 끄트머리에 자리했다. 녹슨 철문이 있었고 그 너머에는 공터와 텅 빈 이동식 주택, 브라이턴의 히피들이 세대에 걸쳐 남기고 간 쓰레기가 잔뜩 쌓인 눅눅한 헛간 두어 채가 있었다. 우리는 트럭을 세우고 걸어서 돼지 축사 잔해를 지나 물푸레나무와 참나무에 둘러싸인 가파른 들판으로 내려갔다. 저 멀리, 다운 구릉들이 고래 등처럼 솟아 있었다. 공기에서는 젖은 풀과 곰팡이 냄새가 났다. “나 여기서 살래.” 나의 선언에 아무도 반기를 들지 않자 나는 살림살이를 챙기고 집짓기를 시작했다. 농원은 이후로도 한동안 실현되지 않았기에 나는 종종 손님이 찾아오긴 했지만 프리스트필드에서 철저히 혼자 살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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