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선씨를 인터뷰한 날
은행 경비원으로 일하는 강지선씨는 부산 사투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2011년 7월 11일에 지금 일하는 용역업체에 입사했어요.”
은행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느냐는 첫 질문에 그는 정확한 입사 날짜로 대답했다. 딱 서른 살에 들어와 삼십대를 모두 보낸 곳. 그만큼 소중한 일터였기 때문일까? 그는 “지점을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다.
입사 초기 그의 아침 첫 업무는 지점장님 차 세차였다. 매일 한 시간 일찍 출근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여름에는 아침부터 온몸이 땀으로 젖어 여벌 옷을 싸들고 다녀야 했고, 겨울에는 물걸레질을 하면 살얼음이 얼어 입김을 후후 불어가며 ‘입김 세차’를 했다. 세차를 마친 후에는 은행원들의 책상을 정리하고, 연로한 청소 ‘이모’를 도와 쓰레기도 같이 버렸다.
은행원들이 지점에 필요한 물건을 사오라고 하면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물건을 실어 나를 차가 없어 마트에 양해를 구한 뒤 카트를 빌려 옮기기도 했다. 아침부터 온갖 허드렛일에 시달리다가 오후 늦게 지점 문이 닫히면 그때부터는 이제 은행원이 됐다. 은행원들과 함께 정산 업무를 하고,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 돈을 채웠다. 고장 난 ATM을 수리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이 가운데 은행 경비원의 업무에 해당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7월 11일에 입사한’ 용역업체는 업무 범위에 대해 설명해준 적이 없었고, 용역업체와 계약 맺은 은행 지점에서 전임자에게 인수인계 받은 대로 일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열심히 하면 조금씩 나아질 거라 믿었다.
그걸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입사한 지 1년이 안 됐을 때다. 가깝게 지내던 은행 서무 담당자가 그에게 물었다. “지선아, 돈 벌어서 어디다 쓰길래 맨날 돈이 없다 그래?” 월급이 얼마 안 돼서 그렇다고, 100만 원 조금 넘게 받는다고 답했더니 서무 담당자가 깜짝 놀랐다. 지점 살림을 도맡아 하는 그는 “매달 경비원 인건비로 240만원씩 용역업체에 주는데 무슨 소리야?”라며 지선씨에게 되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야 할 사람은 오히려 지선씨였다. 그달 용역업체가 준 월급은 세후 132만 원. 은행에서 용역업체에 지급한 240만 원이 업체를 거치면서 132만 원으로 줄었다. 은행원들은 은행이 업체에 지급한 돈이 고스란히 지선씨 월급으로 들어가는 줄 알고 있었다. 지선씨는 업체가 세금 등을 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큰돈일 줄은 몰랐다. 월급에 맞먹는, 100만 원쯤 되는 돈을 매달 떼어간다는 사실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더구나 용역업체가 해주는 일은 없었다. 지선씨가 했던 모든 가욋일은 불법이었다. 은행은 보안·경비 업무를 지선씨가 속한 용역업체에 전적으로 맡기는 ‘도급’계약을 맺었다. 이것은 원청인 은행이 지선씨에게 업무 지시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업무를 지시하는 순간 도급이 아닌 ‘불법 파견’이 된다. 하지만 은행은 단순한 업무지시를 넘어 부당 행위까지 하고 있었다. 이것을 바로잡는 일은 경비지도사의 몫인데, 그가 한 달에 한 번 지선씨가 일하는 지점에 와서 하는 말이라곤 “은행원들 말 잘 들어라”가 전부였다. 경비지도사 역시 용역업체 소속이다.
은행 객장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 가운데 유일하게 은행 소속이 아닌 지선씨. 용역업체는 그가 홀로 겪는 부당 행위를 늘 방조했고, 자주 부추겼다. 은행원들과 업무 관련 갈등이 생겨도 은행 쪽 얘기만 듣고 지선씨를 나무랐다. 경위를 묻는 과정은 없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은행과의 계약 유지뿐이다. 지선씨가 노동한 대가로 매달 받는 돈 중 일부를 떼어 이윤을 발생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사업 수단인, 이른바 ‘사람 장사’를 하는 것이다.
내내 차분하던 지선씨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중간에서 돈을 떼어가면 최소한의 보호막 역할은 해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런 건 하나도 없고 그냥 사람 꽂아놓고 돈만 받아가는 거예요. 완전히 방치돼 있어요. 낙동강 오리 알 신세인 거죠.”
하지만 지선씨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연히 알게 된 중간 착취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용역업체에 “은행에서 받는 돈 중 얼마를 어떤 명목으로 가져가는 거냐”고 물었다. 몇 번을 물어도 “알려줄 수 없다”는 입장만 고수하는 업체 담당자가 싸우기도 했다. 이번에는 은행 서무 담당자에게 물었다. “용역업체에 모두 얼마를 주는 거예요?” 그 역시 “은행 본사에서 알려주면 안 된다고 했다”며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10년 동안 일했다. 지선씨는 정확히 얼마를 착취당하는지도 모르는 채 노동의 대가를 빼앗겼고, 부당 행위들을 혼자 감당했다. 용역업체가 빼앗은 것은 그의 급여만이 아니었다.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존엄까지 앗아갔다.
국내 코로나19 확진자가 하루 1000명 넘게 나오던 2020년 12월, 대면 취재를 되도록 피하라는 회사의 방침으로 그의 이야기를 전화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통화를 끝낸 후 마음이 복잡해졌다. 지선씨는 기자들이 흔히 말하는 ‘얘기가 되는 취재원’이었다. 지선씨 전에도 노동자 10명 정도를 인터뷰했지만 용역, 파견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삶이 이처럼 응축돼 있는 취재원은 지선씨가 처음이었다. 노조도 없이 홀로 업체 담당자와 싸워가며 중간착취에 맞선 사람 역시 그뿐이었다. 기사의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해줄 좋은 취재원을 만났다는 기쁨과 ‘해도 너무하는’ 용역업체에 대한 적의가 뒤섞인 채 메일함을 열었다.
지선씨가 통화 후 보내주기로 한 월급명세서가 도착해 있었다. 꼼꼼하고 야무진 지선씨는 10년간의 월급 변화를 쉽게 비교해볼 수 있도록 10년 전과 5년 전, 그리고 현재의 월급명세서를 모두 9월 기준으로 캡처해서 보내줬다.
‘실지급액’ 칸에 담긴 숫자들을 보다가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내 ‘기삿거리’로만 여겼던 게 사실은 누군가의 현실이라는 뒤늦은 자각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0원’으로 바뀌는 월급 항목이 점점 늘어가고, 10년간 고작 59만 원 오른 월급.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미간이 찌푸려졌다.
곧이어 몰려온 것은 엄청난 무력감이었다. 너무 거대한 부조리여서 막막했다. 피해자는 선명한데 가해자는 가물거리는 풍경. 억울해 죽겠는데 다들 내 책임이 아니라고 손사래 치는 지옥.
대체 어디서부터 화를 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노동자에 기생해 다달이 수십만 원씩 떼는 용역업체에 화를 내야 할지, 10년 차 직장인의 월급이 100만 원이라는 것에 분노해야 할지, 은행의 저열한 갑질에 분개해야 할지, 억대 연봉에다 성과금 잔치를 벌이면서도 경비 업무는 외주화시킨 금융업계에 분노해야 할지……. 이 모든 게 한 몸처럼 엉켜 있어 지선씨든 누구든 풀기가 난망해 보였다.
지선씨의 단단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월급명세서가 말해주는 반박할 수 없는 현실과 그가 중간착취에 맞서 싸워온 시간들을 생각했다. 이 기사를이 책을 잘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기사를 ‘써야 한다’는 직장인으로서의 의무감과 ‘잘 써야겠다’는 기자의 사명감이 꼭 들어맞는 일은 예상외로 흔치 않다. 여기에 ‘정말 잘 쓰고 싶다’는 욕심, ‘꼭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바람까지 담기는 경우는 더 흔치 않고, 그런데 지선씨를 인터뷰한 날, 나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