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구나, 조태일!
조태일趙泰一, 1941~99 시인과 작별한 지도 어느덧 20여 년이 지났다. 그와 함께했던 세월이 어제 일처럼 여전히 생생하기도 하고 반대로 한낱 꿈이었나 싶게 희미하기도 하다.
그와 나는 문단 동기생으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그는 시가, 나는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한날한시에 문단에 나온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시상식 장면은 조금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 무렵 나는 김현·김승옥·김치수 등과 자주 어울리며 한창 ‘산문시대’란 동인 활동에 골몰해 있을 때였다. 그래서였나. 시상식에 틀림없이 조태일도 참석했을 텐데, 아무런 기억이 없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알고 보면 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는 그해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출판사에 취직하여 사회인으로 진출했고, 반면에 조태일은 아직 학생 신분으로서 ROTC 훈련을 받고 있었다. 졸업 후에는 장교로 군에 복무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만날 수 없었다. 후일 언젠가 조태일은 자기가 소대장일 때 연대장이 정병주鄭柄宙, 1926~89 장군으로서 그가 자기를 몹시 아끼며 군에 말뚝을 박으라고 권했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1979년 12월 전두환 일당이 군사반란을 일으킬 때 반란에 반대한 군인들 중 한 명이 바로 정병주였다. 아무튼 그런 까닭으로 문단에 나온 뒤에도 나는 꽤 오랫동안 조태일을 만나지 못했다.
그사이 내가 친하게 지낸 것은 이성부 시인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신구문화사는 청진동에 있고 성부가 근무하는 삼성출판사는 관철동에 있어, 일이 끝나면 만나기 십상인 거리였다. 우리는 이틀이 멀다 하고 만나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며 문학을 논했고 울분을 토하며 낙후한 문단풍토에 질타를 퍼붓곤 했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어느날 나는 이성부를 통해 갓 제대한 조태일을 새삼스럽게 소개받았다.
이 무렵의 조태일은 아직 군인티를 다 씻어내지 못한 상태였다. 걸음걸이도 제식훈련 하듯이 각진 걸음으로 저벅저벅 걸었고 술집에서 어쩌다 노래를 불러도 군가처럼 주먹을 휘두르며 했다. 언젠가 독립문 근처에서 한잔하다가 통금을 넘겼는데, 그는 조금도 주뼛거리는 기색이 없이 대로를 마치 행군이라도 하듯이 힘차게 걸어 무악재를 넘는 것이었다. 아마 불광동 이호철 선생 댁까지 가지 않았나 싶다. 조금 떨어져 조마조마 뒤따라가던 내가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엄혹한 시절에 심야의 대로를 활보했음에도 통금 위반으로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너무도 보무당당히 걸었으므로 일선 순경으로서는 잘못 건드렸다가 큰코다칠지 모른다 생각하고 모른 체했기 때문이 아닐까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아는 사람은 아는 바이지만, 조태일은 의리와 고집의 사나이였다. 무엇보다 그의 정의감은 타협이 없었다. 그는 말과 행동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인물이었다. ‘표리부동’이란 조태일의 사전에는 없는 낱말이었다. 그는 간사스러움과 간교함을 도둑질보다 미워했다. 고백하자면 그의 도저한 고집 때문에 나는 약간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술자리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놓아주지 않은 탓에 실속 없이 외박한 것도 몇 차례 있었지만, 그보다 1969년 12월호 『시인』지에 원고를 쓰라고 완강하게 고집하는 것을 거절하지 못하고 급히 써낸 글 때문에 나로서는 만만치 않은 필화를 겪기도 했던 것이다. 결혼을 앞두고 한창 준비에 바쁠 때였는데, 그는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성부와 조태일은 광주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의 선후배 사이다. 성부가 3학년일 때 태일이는 1학년이었다. 이성부는 고교시절에 이미 문명을 날린 조숙한 천재였다. 학생시절에는 태일이가 성부를 깍듯이 선배로 모시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나이는 조태일이 한 살 위였다. 따라서 선후배 따지기 좋아하는 한국사회의 풍토에서 둘 사이는 점점 불편해지게 마련이었다. 내가 느끼기에 둘은 한자리에 합석하는 것을 은연중 피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성부는 한국일보사로 직장을 옮기고 나는 대학에서 조교와 강사를 하면서 『창작과비평』 편집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런 연고로 성부를 만나는 일은 아주 뜸해지게 된 반면에, 태일이는 『시인』지를 만들다가 그 일을 접은 뒤에는 창비와 자매관계라 할 수 있는 창제인쇄소를 맡아 운영하게 되어 자주 만나게 되었다.
조태일은 1970년대 내내 내가 가장 친하게 어울린 문인들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 무렵 창비 사무실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노상 붙어 지낸 선배로서는 이호철·신경림·한남철이 있었고 동년배로서는 이문구·방영웅·황석영·최민 등이 있었다. 물론 창비에는 언제나 창간 편집인 백낙청이 있게 마련이었다. 부산의 김정한 선생을 비롯하여 광주의 송기숙·문병란·문순태 등도 서울 오면 꼭 연락하는 분들이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자주 만나 어울린 것은 신경림·한남철 선생과 조태일 시인 셋이었다. 무수한 술자리를 함께했고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주말이면 등산도 같이 가고 더러 시골여행도 함께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사실 이분들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문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시국에 대한 견해까지 말을 꺼내기 전에 뜻이 통한다는 것이 서로에게 직감되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정서적 동지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1970년대의 정치적 암흑시대를 굳건하게 잘 견디며 자유 굳건하게 잘 견디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문학운동을 지속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독재자 박정희가 죽고 난 다음인 1980년 봄 나는 영남대 교수가 되어 대구로 이사를 했다. 자연히 서울 문단과는 거리가 생겼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 상경하면 창비에 들러 옛 동료들을 만나곤 했다. 조태일도 당연히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그도 광주대학교 교수로서 서울-광주를 오르내리게 되자 만남은 많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득 그의 중환 소식이 들려왔다. 여름 시인학교에 강사로 갔다가 도중에 병세가 위중해져서 서울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소식이 대구까지 전해졌다. 아니, 태일이가 무슨 병으로? 평소 내 기억 속의 조태일은 우람한 체격에 두주불사의 건강한 몸이었다. 그런데 중병이라니! 믿어지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서울아산병원 병실에 누워 있는 그의 야윈 모습은 차마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평소처럼 태연하게 농담을 하고 방문객과 잡담을 즐기는 듯했다. 이것이 생전의 조태일이 내게 보여준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그동안 ‘조태일론’을 두 번 썼다. 첫 번째는 그의 타계 직후 『자유정신으로 이슬로 벼려진 칼빛 언어』라는 추모논문을 『창작과비평』 1999년 겨울호에 발표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그의 10주기를 맞아 곡성 태안사에서 기념행사 겸 『조태일 전집』2009 증정식을 거행하고 나서 『원초적 유년체험과 자유의 꿈』이란 논문을 『시와 시학』 2010년 봄호에 발표한 것이었다. 그 글들을 다시 훑어보며, 그리고 거기 인용된 조태일의 시들을 다시 읽으며 자기 시대의 불의에 온몸으로 맞섰을 뿐만 아니라 조국강산과 고향산천의 아름다움을 지극히 사랑했던 한 뛰어난 시인의 삶과 문학을 그리워하며 거듭 찬미한다. 아, 그립구나 조태일!
― 『조태일20주기 헌정문집』(2019.9)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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