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라는 마감
작업실 뒤엔 주차장을 둘러싼 좁고 기다란 화단이 있다. 이곳에는 서양측백나무와 당단풍나무, 스트로브잣나무와 서양자두나무 등 평범한 도심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들이 심겨 있다. 나는 이 화단을 좋아한다. 나무에 핀 꽃이 아름답거나 열매가 맛있어서가 아니라, 이 작은 화단에 피어나는 다채로운 풀꽃들 때문이다.
봄이 되면 로제트뿌리나 땅속줄기에서 돋아난 잎이 바큇살 형태로 땅 위에 퍼져 무더기로 나는 모양으로, 민들레가 대표적이다. 잎을 가진 풀들이 하나둘 꽃을 피워낸다. 누가 심지도 않았는데 부지런히 피어난 이른 봄꽃들이 어찌나 기특한지, 나는 땅만 들여다보고 다닌다. 매해 봄이면 늘 그래왔다. 잔잔하게 피어난 봄꽃들을 구경하다 보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작업실에 들어서기까지 30분이 넘게 걸릴 때가 많다. 꽃마리와 봄맞이, 쇠별꽃, 냉이, 큰개불알풀, 서양민들레, 꽃다지……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난 땅에서는 꼭 삐약삐약 병아리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이 식물들 이름을 나열하면 주변 식물학자들은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정도로 흔하디흔한 풀이지만, 지금과 같은 시기에 꽃을 보기 위해 어딘가로 나서기 않아도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스스로 자라고 피어난 꽃을 일상적으로 만난다는 건 숲에서 희귀식물을 보는 것 못지않게 소중한 일이다.
꽃마리나 쇠별꽃, 냉이와 꽃다지의 꽃은 모두 꽃잎이 지름 1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풀이라 땅에 얼굴을 가까이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주차장에 쪼그려 앉아 꽃을 보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슨 귀한 게 있냐며 함께 땅을 들여다보고는, 기대했던 게 아닌지 실망하고 발길을 돌리기도 한다.
하루는 이곳에서 우연히 별꽃 종류인 개별꽃과 쇠별꽃, 별꽃을 발견했다. 워낙 꽃이 작은 데다 당장 관찰할 시간이 없어 몇 시간 후 다시 와 기록해두려고 지푸라기로 나만 알 수 있는 위치 표시까지 해두었다. 그런데 서너 시간 후 다시 와보니 개별꽃과 별꽃은 줄기가 꺾여 있고 어딘가에 짓밟힌 듯 꽃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차장을 오가는 사람들에 의해 훼손된 듯 보였다.
꽃은 피고 진다. 그리고 꽃이 피고 지는 때는 자연의 질서와 규칙 안에 있다. 이 ‘피고 지는’ 과정을 포착하여 기록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하지만 이런 예상 밖의 일, 이를테면 인간에 의해 꽃이 훼손되어 관찰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진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밟아 훼손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나도 사람이다. 내가 이 수많은 풀꽃 개체를 개별꽃과 쇠별꽃, 별꽃처럼 종으로 식별하듯 이 식물 개체 하나하나의 입장에서는 나도, 그들을 밟은 누군가도 결국 다 같은 인간 ― 호모사피엔스라는 하나의 종일 뿐인 것이다.
풀꽃은 가끔 나를 두고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하다. 꽃잎이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만큼 만개하면 나는 그 옆에 쪼그려 앉아 그 모습을 열심히 스케치해두고 생각한다. ‘드디어 올해는 만개의 순간을 포착했군.’ 그러나 이튿날, 또 그 이튿날이면 꽃은 더 활짝 피어 내 스케치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시간이 지나 더 활짝 피겠지 하는 생각으로 스케치를 해두지 않았을 때는 곧바로 꽃이 져버려, 기록을 안 해둔 과거를 후회하게 만든다.
상대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고 했던가. 식물은 내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나를 예상하지 마. 자만하지 마.” 작은 풀꽃에 비하면 거대한 나는 늘 위에서 이들을 내려다보며 꿰뚫고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언제부턴가 관찰을 하면 할수록 깊이가 바닥나고 나를 꿰뚫고 있는 건 오히려 이 풀꽃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식물을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더 부지런히 풀꽃을 쫓아다닐 수밖에 없다. 지금 피어난 이 꽃들은 봄이 지나면 져버릴 것이고 초여름이 오면 또 다른 풀꽃이 이 자리에 피어날 것이다. 그사이 미지의 동물에게 짓밟히거나 자연재해에 의해 훼손될 수도 있다. 끊임없이 피고지는 이 땅의 풀꽃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지치지 않고 이들을 찾아다닐 체력과 꾸준함만 있으면 된다.
화단에 남아 있는 쇠별꽃이 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 스케치를 할 것이다. 스케치가 끝나면 꽃 한 줄기를 작업실로 가지고 가서 현미경으로 꽃잎과 꽃 안의 수술, 암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 작업은 밤늦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림은 초여름 상사화가 피기 전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계절’이라는 마감을 늘 눈앞에 두고 식물을 그린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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