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중략)
이데올로기를 진지하게 다루기
불평등은 경제적인 것도 기술공학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다. 이것이 분명 이 책에 제시된 역사 연구의 뚜렷한 결론이다. 달리 말해 시장과 경쟁, 이윤과 임금, 자본과 부채,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 내국인과 외국인, 조세피난처와 경쟁력, 이런 것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배치하고자 선택한 법·조세재정·교육·정치 관련 체계와 사람들이 스스로 속하고자 하는 범주들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회역사적 구성물이다. 이 선택과 무엇보다도 관련되는 표상들은, 어느 사회든 사회정의와 정의로운 경제에 대해, 서로 대치하는 상이한 집단과 담론 사이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세력균형에 대해, 저마다 갖게 되는 그런 표상들이다. 중요한 점은 이 세력균형이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세력균형 역시 특히 지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다. 다시 말해, 역사에서는 사상들과 이데올로기들이 중요하다. 새로운 세계와 다른 사회를 상상하고 구조화하는 것을 언제나 가능케 해주는 것이 바로 사상과 이데올로기다. 얼마든지 다양한 도정道程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불평등에 ‘자연적’ 토대들이 있다고 설명하려는 숱한 보수적 담론과는 다르다. 별로 놀랄 만한 것도 아닌데, 모든 시대 모든 풍토에서 다양한 사회의 엘리트들은 불평등을 ‘자연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불평등에 자연적이고 객관적인 토대를 부여하려 하고, 기존의 사회적 격차가 (응당) 가난한 자들과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된다고 설명하려 한다. 여하간 현재 이 격차의 구조가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유일한 구조이며 이걸 실질적으로 변경하려 들면 막대한 불행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려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은 그 반대를 보여준다. 시간과 공간상으로도, 구조만큼 규모 면에서도, 조건상으로도, 현대인들이 수십 년 전이라면 예측도 못했을 속도로, 불평등은 대단히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다. 때로는 불행을 초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혁명적이고 정치적인 단절들과 과정들이 불평등의 축소와 변동을 가능케 했으며, 이는 우리의 가장 고귀한 제도들, 인류 진보라는 관념이 하나의 현실이 되도록 해주었던 그런 제도들보통선거·무상의무교육·보편적 의료보험·누진세의 기원이다. 미래 역시 그러하리라는 것은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 현재의 불평등과 현행 제도는 보수주의자들이 뭐라 생각하든 유일한 가능태가 아니며, 그 자체로 지속적으로 변형되고 재창안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들과 제도들 그리고 가능한 궤도들의 다양성에 중점을 두는 이런 접근은 왕왕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수식되는 특정한 교리와도 차이가 있다. 이 교리에 따르면 경제력과 생산관계의 상태가,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거의 기계적으로 규정할 것이다. 반면 내가 강조하는 것은, 관념의 영역 즉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영역에 진정 자율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경제와 생산력의 발전이 동일한 상태라고 해도 (확실치는 않지만 여하튼 이런 말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 한에서) 언제나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각기 다른 불평등주의체제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기계적으로 이행한다는 이론은, 세계의 상이한 나라들과 지역들, 특히 식민본국과 식민지 사이를 비롯해 각각의 지역들 자체에서도 역시 관찰되는 역사적이며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인 궤도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규명해주지 못하며, 특히 이후 단계들을 위한 유용한 교훈들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반추해보면, 대안들은 언제나 있었고 언제나 있을 거라는 점이 확인된다. 발전의 매 단계에서 경제·사회·정치 체계를 구조화하고, 소유관계를 정의하며, 조세재정제도 또는 교육제도를 조직하고, 국가채무와 사적채무 문제를 처리하는, 또한 여러 인류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는 다수의 방식이 있다. 한 사회와 이 사회 내부의 권력관계 및 소유관계를 조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능성의 길은 언제나 여러 갈래로 나 있으며, 이러한 차이들이 세부적인 것에만 관련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강조하자면, 21세기에 소유관계를 조직하는 방식이 여럿 있지만 그중 일부를 통해, 뒤이어 벌어질 사태에 아랑곳 않고 자본주의 파괴를 예고하는 길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해낼 수 있다.
과거의 다양한 역사적 궤도와 여러 미완의 분기들에 대한 연구는 엘리트주의적 보수주의와 바로 그날을 기다리는 혁명적 관망주의attentisme révolutionnaire 둘 다에 잘 듣는 최상의 해독제다. 이와 같은 관망주의는 바로 그날 다음에 적용할 현실적인 제도적 정치적 해방체제에 대한 숙고를 회피하게 하며, 비대해진 무한 국가권력에 대체로 그 일을 일임하는 쪽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이는 그토록 반대하고자 하는 소유주의 신성화만큼이나 위험한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20세기에 엄청난 인명 손실과 정치적 피해를 야기했으며, 우리는 아직 그 대가를 다 치르지 않았다. 포스트공산주의(노선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버전과 중국 버전 그리고 어느 정도는 동유럽 버전 모두)가 21세기 초에 하이퍼자본주의의 최상의 동맹이 되었다는 사실은,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와 마오주의적 공산주의의 파국과 더불어 이 파국 탓에 평등주의적이고 국제주의적인 모든 야망을 포기한 데 따른 직접적 결과다. 공산주의의 파국은 노예제와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들이 야기한 피해를 부차화했고, 또한 이 이데올로기들과 소유주의적이고 하이퍼자본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결부시키는 핵심적 연관을 부차화하고 말았으니 이는 사소한 공적이 아닌 것이다.
가능한 한 나는 이 책에서 이데올로기들을 진지하게 다루고자 한다. 특히 과거의 이데올로기 각각에, 무엇보다도 소유주의 이데올로기ideologie propriétariste, 사민주의 이데올로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삼기능 이데올로기, 노예제 이데올로기,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에도 기회를 줌으로써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을 저마다의 고유한 일관성 안에서 복원해내려 한다. 원칙상 나는 어느 이데올로기든 특정 유형의 불평등 또는 평등을 옹호하느라 극단적이고 과도해 보일 수 있더라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의로운 사회와 사회정의에 대한 특정한 비전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겠다. 이러한 비전에는 언제나 그럴듯함과 진솔함과 일관됨이 담겨 있으며, 다음과 같은 조건하에 이 비전에서 후일을 위한 유용한 교훈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발전들을 추상적이고 비역사적이며 비제도적인 방식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소유·조세재정제도·교육제도의 특수한 형태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개별 사회, 역사적 시기, 특정 제도 안에서 체현되었던 모습 그대로 연구하는 것이다. 이 형태들은 엄격히 사유思惟되어야 하고, 이 형태들의 규칙과 작동 조건법체계·과세표·교육자원 등이 정밀하게 연구되어야 한다. 이것들 없이는 이데올로기나 제도는 빈껍데기일 뿐이며, 사회를 현실적으로 전환하고 이에 대한 끊임없는 지지를 불러모으는 데는 부적격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데올로기 개념에 경멸적 용법 또한 있다는 것을, 게다가 이 용법이 때로는 정당화된다는 것을 간과하는 건 아니다. 사실에 대한 관심 결여와 교조주의 특색을 드러내는 노선은 왕왕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불린다. 문제는, 순수한 실용주의를 앞세우는 이들이 흔히 (경멸적 의미에서) 가장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데 있다. 탈이데올로기적이라 자처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사실에 대한 그들의 관심 결여, 크나큰 역사적 무지, 그들이 갖고 있는 계급적 전제와 계급이기주의의 과도함을 감추기란 어렵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대단히 ‘사실적’이다. 나는 불평등구조와 관련된 다수의 역사적 진화와 여러 사회에서 변형되어 나타나는 불평등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이것이 본래 연구자로서의 내 전공이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문제와 관련한 가용 자료를 침착하게 검토함으로써 우리의 집단적 성찰을 진전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구는 분명 서로 매우 다른 사회들을 비교해보게끔 하는데, 이 사회들이 이런 상호비교를 거부해온 건 자신들의 ‘예외성’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 궤도의 비교 불가한 단일한 특성에 대해 (일반적으로 부당하게)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나는 가용 자료들이 모든 분쟁을 일소하기에는 결코 충분치 않으리라는 점을 숙지하고 있다. ‘사실’에 대한 검토가 이상적 정치체제나 이상적 소유체제 또는 이상적 교육·조세재정제도에 대한 문제를 결정적으로 해소해줄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우선은 그 ‘사실’이란 것이 제도적인 장치들국세조사·여론조사·조세 등에, 그리고 여러 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진술하고 스스로를 측정하고 변화시키고자 정련해놓은 사회적 조세 재정적 사법적 범주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사실’ 자체는 구성물이고, ‘사실’이라는 것은 연구대상인 사회와 관찰도구 사이의 ― 복잡하고 교차적이며 파당적인 ― 상호작용의 맥락 안에서만 비로소 정확하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이러한 인지적 구성물로부터 유용한 것을 전혀 끄집어낼 수 없으리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알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이러한 복잡성과 반영성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다음 이유는, 연구 주제들 ― 이상적인 사회·경제·정치 조직화의 본성 ― 이 너무나 복잡해서, ‘사실’에 대한 단순한 ‘객관적’ 검토로부터 갑자기 하나의 유일한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과거에서 비롯한 한정된 경험들, 우리가 장차 참여할 수도 있을 미완의 의결을 반영한 것과 다름없다. 마지막 이유는 (이 단어에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가 어떤 것이든 간에) ‘이상적’ 체제란 유일하지 않고, 연구되는 사회의 여러 특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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