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둘 때만 가능하다.”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제1조
부의 분배는 오늘날 가장 널리 논의되고 또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문제 중 하나다. 하지만 우리는 장기적으로 부의 분배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에 관해 무엇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가? 19세기에 카를 마르크스가 믿었던 것처럼 민간자본 축적의 동학dynamics으로 인해 부와 권력이 필연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소수의 손에 집중될 것인가? 아니면 20세기에 사이먼 쿠즈네츠Simon Kuznets가 생각했던 것처럼 더 발전된 단계에서는 성장, 경쟁, 기술적 진보에 따라 균형을 잡아가는 힘 덕분에 불평등이 줄어들고 계층 간의 조화로운 안정성이 확보될 것인가? 우리는 18세기 이후 부와 소득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에 관해 실제로 무엇을 알고 있으며, 그로부터 21세기를 위해 어떤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나는 이 책에서 바로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제시할 해답들은 완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는 점을 미리 밝혀두고 싶다. 그러나 이 해답들은 이전의 연구자들이 이용한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역사적 비교 자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자료들은 3세기에 걸쳐 20개국 이상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해답들은 또한 부와 소득 분배의 밑바탕에 있는 메커니즘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줄 새로운 이론적 틀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는 현대의 경제성장과 지식의 확산 덕분에 마르크스적인 종말은 피해갈 수 있었지만, 자본과 불평등의 심층적인 구조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낙관적이었던 수십 년 동안 상상할 수 있었던 만큼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자본의 수익률이 생산과 소득의 성장률을 넘어설 때 자본주의는 자의적이고 견딜 수 없는 불평등을 자동적으로 양산하게 된다. 19세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으며, 21세기에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불평등은 민주주의 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능력주의의 가치들을 근본적으로 침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의 개방성을 유지하고 보호주의적이며 국수주의적인 반발을 피하면서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고 공동의 이익이 사적인 이익에 앞서도록 보장할 수 있는 방법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역사적 경험에서 이끌어낸 교훈들에 바탕을 두고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정책들을 제안할 것이며, 바로 그런 이야기가 이 책의 줄거리를 이룰 것이다.
데이터 없는 토론?
부의 분배에 관한 지적·정치적 토론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부족한 사실과 넘치는 편견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왔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이론적 틀이나 통계적 분석 없이도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부와 소득에 관해 직관적인 지식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지식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확실히 오류를 범하는 일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나 문학작품, 특히 19세기 소설들은 다양한 사회집단의 상대적 부와 생활수준, 불평등의 심층적인 구조와 그에 대한 정당화, 그리고 불평등이 각자의 삶에 대해 지니는 함의에 관한 상세한 정보로 가득하다. 실제로 제인 오스틴과 오노레 드 발자크는 1790년에서 1830년 사이 영국과 프랑스의 부의 분배에 관한 놀라운 모습들을 그려냈다. 두 소설가는 각자의 사회에 나타난 부의 계층 구조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부의 비밀스러운 형세를 파악했으며, 그것이 필연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삶에, 그들의 결혼 전략 및 개인적인 희망과 낙담에 미칠 영향을 인식했다. 그들은 어떤 통계적 분석이나 이론적 분석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실하게, 그리고 현실을 환기시키는 힘을 가지고 불평등의 함의를 드러내 보여준다.
사실 부의 분배는 매우 중요한 문제여서 경제학자, 사회학자, 철학자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 이는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며 그래서 다행스럽다. 불평등의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실체는 그것을 체험하는 모든 이의 눈에 드러나는 것이며, 자연히 날카롭고 논쟁적인 정치적 판단을 부추긴다. 농부와 귀족, 노동자와 공장주, 웨이터와 은행가는 각자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의 삶의 조건들, 그리고 사회집단 사이의 힘과 지배관계를 살펴보면서 무엇이 정당하고 무엇이 정당하지 않은지에 대한 자기만의 관념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부의 분배라는 문제는 언제나 주관적이고 심리적이며,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이고 갈등적인 면을 갖게 된다. 이는 과학적이라고 하는 어떤 분석을 통해서도 쉽사리 완화할 수 없는 것이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민주주의는 결코 전문가들의 공화국으로 대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배 문제는 또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정확하게 정의된 자료와 연구 방법, 개념이 없을 경우에는 어떤 것도 주장할 수 있고 동시에 그 반대의 주장도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불평등이 언제나 커지고 있으며 따라서 세상이 언제나 더 정의롭지 않게 되어간다고 믿는다. 다른 이들은 불평등이 자연히 줄어들고 있다거나 자동적으로 조화가 이루어진다고 믿으며, 어쨌든 이 행복한 균형을 무너뜨릴 위험이 있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각 진영이 상대편의 지적 나태함을 꼬집으면서 자신의 게으름의 구실로 삼는 이 귀머거리들 간의 대화를 생각하면, 완전히 과학적이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연구가 담당할 역할이 있다고 본다. 전문가의 분석은 불평등이 필연적으로 부추길 격렬한 정치적 충돌에 결코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과학에서의 연구는 언제나 잠정적이고 불완전한 것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사회과학적 연구는 경제학, 사회학, 역사학을 정밀과학으로 변형시키려는 오만한 주장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그 연구는 대신 끈기 있게 사실과 패턴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인 작동 원리들을 차분하게 분석함으로써 민주적인 토론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며 그 토론의 관심이 좋은 질문들에 집중되도록 할 수 있다. 이런 연구는 토론의 용어들을 끊임없이 다시 정의하고, 선입견이나 사기를 폭로하고, 모든 것이 비판적인 검증을 받도록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바로 사회과학 연구자를 비롯한 지식인들, 그리고 누구보다도 연구에 바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진 (그리고 그 연구에 대한 보수까지 받는 귀중한 특권을 가진) 운 좋은 시민들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역할이다.
그러나 부의 분배에 관한 사회과학 연구가 오랫동안, 그리 많지 않은 확인된 사실과 온갖 종류의 순전히 이론적인 사변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내 작업의 토대를 이루는 자료들을 좀더 명확하게 제시하기에 앞서, 내가 이 책을 쓰려고 준비하면서 수집했던 이 문제에 관한 이전의 성찰들을 짧게 개관하려 한다.
맬서스, 영 그리고 프랑스혁명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에서 고전파 정치경제학이 태어났을 때 분배 문제는 이미 모든 분석의 핵심에 있었다. 누구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목도했다. 그 변화는 그전에는 알려진 바 없는 지속적인 인구 증가, 농촌 인구의 대탈출, 산업혁명의 도래로 촉진된 것이었다. 이런 격변들이 부의 분배, 사회 구조, 유럽 사회의 정치적 균형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을까?
1798년에 『인구론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을 출간한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가 보기에는 모든 것이 명확했는데, 가장 큰 위협은 다름 아닌 인구 과잉이었다. 그의 자료는 빈약했지만 그는 그것들을 최대한 잘 활용하려 했다. 그에게 특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영국 농학자 아서 영Arthur Young이 펴낸 여행기였다. 영은 프랑스혁명 직전인 1787~1788년에 칼레부터 피레네와 브르타뉴, 프랑슈콩테까지 프랑스를 널리 여행하고 당시 프랑스 지방의 비참한 실상에 관해 썼다.
영의 흥미로운 에세이는 결코 전적으로 부정확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 단연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였으므로 탐구 대상으로 삼기에 이상적인 곳이었다. 프랑스는 영국 인구가 800만 명(잉글랜드만 따지면 500만 명)밖에 되지 않았던 1700년에 이미 200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인구는 루이 14세 통치 말기부터 루이16세가 죽음을 맞을 때까지 18세기 내내 꾸준히 늘어났으며, 1780년에는 3000만 명에 육박했다. 이 전례 없이 빠른 인구 증가가 1789년 혁명이 터지기 전 수십 년 동안 농업 분야의 임금이 정체되고 토지 임대료가 상승하는 데 기여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된다. 이러한 인구 변동이 프랑스혁명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귀족사회와 기존 정치체제의 인기를 떨어뜨린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89년 출간된 영의 책은 민족주의적 편견과 어림짐작으로 수행한 비교의 흔적들을 지니고 있다. 이 뛰어난 농학자는 그가 머물던 여관들에 전혀 만족하지 못했으며 시중을 들었던 여성들의 태도를 역겨워했다. 그가 관찰한 것 중 많은 것이 진부한 일화들이었지만 그는 그로부터 보편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그는 주로 자신이 목격한 광범위한 빈곤이 정치적 격변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특히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 이끄는 조화롭고 평화적인 발전은 귀족과 평민의 의회를 분리하고 귀족에게 거부권을 주는 영국식 정치체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프랑스가 1789~1790년 귀족과 평민 모두 동일한 입법기구에서 자리를 차지하도록 허용함으로써 파멸을 향해 가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의 이야기 전체가 프랑스혁명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부의 분배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누구도 정치와 멀찌감치 떨어져 있을 수 없으며, 당대의 계급적 편견과 이해관계를 벗어나기는 힘들다.
맬서스 목사는 1798년 자신의 유명한 『인구론』을 펴냈을 때 영보다 훨씬 더 과격한 결론에 이르렀다. 같은 나라의 영처럼 그는 프랑스에서 발산되는 새로운 정치사상을 몹시 두려워했고, 영국에서는 프랑스혁명과 비슷한 격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모든 복지 지원을 즉각 중단해야 하며 세계가 인구 과잉에 따른 혼란과 불행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려면 빈곤층의 출산을 엄격히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1790년대 유럽의 엘리트들이 얼마나 이런 공포에 사로잡혔는지를 고려하지 않고는 맬서스의 그 어두운 예측들을 이해할 수 없다.
리카도: 희소성의 원리
지금에 와서 회고적으로, 이런 불행의 예언자들을 비웃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경제적, 사회적 변화는 그것을 목도한 이들에게 엄청나게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분명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실 맬서스와 영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관찰자 대부분은 부의 분배와 사회의 계층 구조가 장기적으로 어떻게 바뀔지에 대해 비교적 암울하거나 종말론적인 견해를 공유했다. 특히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와 카를 마르크스가 그랬다. 이들은 확실히 19세기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경제학자들로, 둘 다 소수의 사회집단―리카도가 보기에는 지주들, 마르크스가 보기에는 산업자본가들―이 필연적으로 생산과 소득의 점점 더 많은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1817년 『정치경제학과 조세의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and Taxation』를 펴낸 리카도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토지 가격과 지대의 장기적인 변화였다. 맬서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통계라고 할 만한 자료를 거의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시대 자본주의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포르투갈 출신의 유대계 금융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맬서스, 영 또는 스미스보다 정치적 편견이 조금 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맬서스의 모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논리를 더 밀고 나갔다. 그의 관심을 끈 것은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논리적 역설이었다. 일단 인구와 생산이 모두 꾸준히 늘어나기 시작하면 토지는 다른 상품들에 비해 점점 더 희소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토지 가격이 지속적으로 오르고 지주에게 내는 지대도 상승할 것이다. 이에 따라 지주들이 국민소득 가운데 갈수록 더 많은 몫을 차지하면서 나머지 인구에게 돌아갈 몫은 줄어들 것이고, 결국 사회적 균형에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리카도가 볼 때 논리적으로, 정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토지 임대소득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세금을 물리는 것이었다.
이 암울한 예언은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지대는 장기간에 걸쳐 분명 높은 수준에 머물렀지만, 국민소득 중 농업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농경지의 가치는 결국 필연적으로 다른 형태의 재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하락했다. 1810년대에 책을 쓴 리카도가 훗날의 기술 진보나 산업 성장의 중요성을 예견할 길은 없었다. 맬서스와 영처럼 그도 인류가 절박한 식량 수요에서 완전히 해방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토지 가격에 대한 그의 통찰은 흥미롭다. 그의 주장의 기초였던 ‘희소성의 원리’는 어떤 가격들이 수십 년에 걸쳐 매우 높은 수준으로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사회 전체를 흔들어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가격 체계는 수백만 명―오늘날 새로운 글로벌 경제에서는 수십억 명―의 개인 활동을 조정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한다. 문제는 가격 체계가 그 한계도 도덕성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21세기에 세계적인 부의 분배를 이해하는 데 희소성의 원리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 될 것이다. 누구든 스스로 이 점을 확신하려면 리카도 모형에서 농지 가격이 차지하던 자리에 세계적으로 중요한 수도의 도심 부동산 가격이나 석유 가격을 대입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두 경우에 1970~2010년의 가격 추세를 2010~2050년 또는 2010~2100년까지 연장해보면 그 결과는 각국 간에는 물론 각국 내에서도 상당히 큰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불균형으로 나타날 것이다. 리카도가 예언한 대재앙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불균형이다.
확실히 원론적으로는 이 과정에서 균형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는 아주 간단한 경제 원리가 있다. 수요와 공급의 원리가 그것이다. 어떤 상품이든 공급이 불충분하면, 그리고 가격이 지나치게 높으면, 그 상품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어야 하며 이에 따라 가격은 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부동산과 석유 가격이 오르면 사람들은 시골로 이주하거나 자전거로 여행하고 다니는 것에 (혹은 둘 모두에) 익숙해져야 한다. 하지만 그런 적응과정이 기분 나쁘고 번거롭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 과정은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고 그러는 사이 부동산과 유전 소유자들은 나머지 인구에 대해 무언가를 청구할 수 있는 자산을 축적할 것이다. 그런 자산은 무척 광범위해서 그들은 시골의 부동산과 자전거를 포함해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최종적으로 손에 넣게 될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최악의 상황이 찾아올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독자들에게 2050년이 되면 카타르 국왕에게 임대료를 내고 있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에는, 아직은 너무 이르다. 나는 적당한 때에 이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내 해답은 적당히 위안을 주는 것이 되겠지만, 틀림없이 훨씬 더 미묘한 내용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수요와 공급의 상호 작용이 어떤 상대적인 가격들의 극단적인 변화에 따라 부의 분배의 심각한 양극화가 지속될 가능성을 결코 배제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리카도의 희소성의 원리가 주는 중요한 시사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사위를 던지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르크스: 무한 축적의 원리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조세의 원리』가 출간된 지 꼭 반세기가 지난 1867년 『자본Capital』 제1권이 출간되었을 때 경제적, 사회적 현실은 심층적으로 변모한 상태였다. 이제 더 이상 농부들이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지 또는 토지 가격이 하늘 높이 치솟을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활짝 피어난 산업자본주의의 동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부상했다.
그 시대의 가장 놀라운 실상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들(무산 노동자 계급―옮긴이)의 비참한 생활이었다.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또는 부분적으로 그 성장 때문에) 그리고 인구 증가와 농업 생산성 향상에 따른 농촌 인구의 대탈출로 인해 노동자들은 도시 빈민가로 쇄도해 왔다. 노동시간은 길었고 임금은 매우 낮았다. 도시의 새로운 빈곤이 더 뚜렷하게, 더 충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는 어떤 면에서는 구체제의 농촌 지역에서 보았던 빈곤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었다. (1841년 프랑스에서) 8세 이상 어린이들만 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거나 (1842년 영국에서) 10세 이상만 광산에서 일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법이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제르미날』 『올리버 트위스트』 『레미제라블』이 소설가들의 상상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프랑스 의사 루이 비예르메Louis-Rene Villerme가 1840년에 발표한 (1841년 미온적인 새 아동근로법 통과를 이끌어낸) 『공장 노동자의 신체와 심리상태 보고서Tableau de l’etat physique et moral des ouvriers employes dans les manufactures』도 1845년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출간한 『영국 노동계급의 현실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과 마찬가지로 추악한 현실을 묘사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역사적 자료는 19세기 후반―또는 심지어 1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에 해당되는 시기―에 가서야 구매력 면에서 임금의 의미 있는 상승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1800년대부터 1850년대까지 노동자들의 임금은 매우 낮은―18세기와 그 이전 수준에 가깝거나 심지어 그보다 낮은―수준에 정체되어 있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관찰되는 이 오랜 임금 정체 국면은 바로 이 기간에 경제성장은 도리어 가속화되었다는 사실과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오늘날 이용할 수 있는 불완전한 자료로 추정하는 한 이 두 국가의 국민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기업의 이윤, 토지와 건물의 임대소득―은 19세기 전반에 크게 늘어났다.5 19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간 임금이 어느 정도 성장률을 따라잡으면서 자본가의 몫은 조금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구조적 불평등이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1870~1914년 기간에는 기껏해야 불평등이 극히 높은 수준에서 굳어져버린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부가 갈수록 더 소수에게 집중되면서 불평등이 끊임없이 확대되는 악순환을 볼 수 있다. 이런 궤적이 1914~1918년의 폭발에서 비롯된 중대한 경제적, 정치적 충격이 없었더라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섣불리 말할 수는 없다. 역사적 분석의 도움을 받고 오늘날 우리가 가진 약간의 관점을 동원해 살펴보면, 그러한 충격들은 산업혁명 이후 능히 불평등을 감소시키는 쪽으로 작용한 유일한 힘처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간에, 1840년대에는 노동소득이 정체되는 가운데 자본은 융성했고 산업 이윤은 늘어났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했기 때문에 당시 어느 누구도 국가 전체를 보는 통계자료를 활용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 사실을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최초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들의 핵심적인 질문은 단순한 것이었다. 반세기 동안의 산업적 성장을 이룬 다음에도 대중의 상황이 여전히 그전처럼 비참하다면, 그리고 8세 미만 어린이들의 공장노동을 금지하는 것이 입법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면, 산업 발전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이 모든 기술 혁신과 이 모든 노역과 인구 이동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기존 경제와 정치체제의 파산은 명백해 보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장기적인 체제 변화에 관해 알고 싶어했다.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스스로 설정한 과제였다. 그는 1848년 ‘민중의 봄spring of nations’(그해 봄 전 유럽에 걸쳐 터져나온 혁명들) 직전에 「공산당선언」을 발표했는데, 이 짧고 강력한 텍스트는 그 유명한 “한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 선언은 혁명을 예언하는 서두만큼 유명한 말로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현대의 산업 발전은 부르주아지(유산계급-옮긴이)가 생산을 하고 그 생산물을 전유하는 바로 그 기반을 발밑에서부터 무너뜨린다. 따라서 부르주아지가 생산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꾼들이다. 그들의 파멸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똑같이 필연적인 것이다.”
이후 20년 동안 마르크스는 이 결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자본주의와 그 붕괴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인 분석을 내놓기 위해 방대한 저작을 집필하는 데 힘을 쏟게 된다. 이 작업은 미완으로 남았다. 『자본』의 첫째 권은 1867년에 출간되었지만 마르크스는 그다음 두 권을 완성하지 못한 채 1883년에 죽었다. 그의 친구 엥겔스는 마르크스 사후 그것들을 출간했는데, 때로는 마르크스가 남긴 원고의 불명료한 조각들을 짜맞추어야 했다.
리카도와 같이 마르크스의 연구도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논리적 모순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프루동 추종자들 모두와 구별짓고자 했다.(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시장을 자기조절적 시스템으로 보았다. 즉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이미지 그리고 생산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장바티스트 세Jean-Baptiste Say의 법칙에 맞게 균형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스스로 균형을 찾아갈 수 있는 시스템으로 보았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와 프루동 추종자들은 노동계급의 비참한 실상을 고발하는 데 만족하고 그 원인이 되는 경제적 과정에 대한 진정한 과학적인 분석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요컨대 마르크스는 자본의 가격과 희소성의 원리에 관한 리카도 모형을 자본주의 동학에 대한 더 철저한 분석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 시대에 자본은 토지 관련 부동산이 아니라 주로 (기계와 공장을 비롯한) 산업자본이었으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축적할 수 있는 자본의 양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사실 그의 주요 결론은 ‘무한 축적의 원리principle of infinite accumulation’라고 일컬을 만한 것이다. 즉 자본은 계속 축적되면서 갈수록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움직일 수 없는 경향이 있으며, 그 과정에 아무런 자연적 제약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파멸을 예언한 근거다. 자본의 수익률이 끊임없이 감소하거나(그래서 자본축적의 엔진을 꺼뜨리고 자본가들 사이에 격렬한 투쟁을 부르거나) 국민소득 가운데 자본가의 몫이 무한히 증가해(그래서 조만간 노동자들이 단결해 폭동을 일으켜) 결국 자본주의는 최후를 맞는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안정된 사회경제적, 정치적 균형은 불가능하다.
마르크스의 암울한 예언은 리카도의 예언보다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결코 더 높지 않았다. 1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에 해당되는 기간에 임금은 마침내 올라가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구매력 향상은 모든 곳으로 확산되었다. 비록 극심한 불평등이 지속되고 어떤 면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불평등이 계속 커졌다 해도 노동자의 구매력 증가는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공산주의 혁명은 실제로 일어났지만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국가인 러시아에서 발생했다. 유럽의 가장 발전한 국가들이 (그 국가의 국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사회민주주의라는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을 때 러시아에서는 산업혁명이 거의 시작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보다 앞선 연구자들처럼 마르크스도 지속적인 기술 진보와 꾸준한 생산성 향상이 이뤄질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했다. 기술 진보와 생산성 향상은 민간자본의 축적과 집중화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균형을 잡아주는 힘이다. 마르크스에게는 그의 예언들을 가다듬는 데 필요한 통계자료가 부족했던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결론들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연구에 착수하기 전인 1848년에 이미 그 결론들을 내렸다는 점 때문에도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대단한 정치적 열광의 풍토 속에서 글을 썼는데 이 때문에 때로 성급하게 지름길을 택해야 했으며, 이것이 훗날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 경제 이론이 가능한 한 충실한 역사적 자료에 뿌리를 둘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며, 이런 면에서 마르크스는 그가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이용했다고 말할 수 없다. 더욱이 그는 어떤 사회의 민간자본이 완전히 폐지된 경우 어떻게 그 사회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별로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민간자본이 폐지된 나라들이 수행했던 비극적인 전체주의 실험이 보여주듯이 실제로 그런 상황이 될 경우 이는 매우 복잡한 문제를 야기한다.
이런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분석은 몇 가지 면에서 여전히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그는 (산업혁명 기간의 믿기 어려울 정도의 부의 집중에 관한) 중요한 물음을 품고 자신에게 가용한 방법들을 동원해 그에 답하려고 노력했다. 오늘날 경제학자들은 그의 본보기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제시한 무한축적의 원리에는 핵심적인 통찰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 통찰은 19세기에 대한 분석에서와 마찬가지로 21세기에 대한 분석에서도 타당하며, 어떤 면에서는 리카도의 희소성의 원리보다 우리를 더 불안하게 한다. 인구와 생산성 증가율이 비교적 낮으면 자연히 과거에 축적된 부가 상당한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게 되는데, 이 중요성은 잠재적으로 과도해질 수 있으며 사회의 조화를 해칠 수도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낮은 성장은 마르크스의 무한 축적 원리에 대해 적절한 균형을 잡아줄 수 없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균형은 마르크스가 예언한 것처럼 종말론적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불안한 것이다. 축적은 어떤 한계에 이르면 끝나게 되지만, 그 한계가 불안을 초래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높을 수도 있다.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 이후 유럽의 부유한 국가들과 일본에서 민간부문은 연간 국민소득의 배수로 가늠되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부를 축적했는데, 이는 마르크스의 논리를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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