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호펜타운 반디멘 재단 도서관Library Of Van Diemen Foundation In Hoffentown이 지난 6월 30일에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시의회는 도서관을 인수하는 대신 메이슨 다리에서 호펜타운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보수하고 주변 경관을 개선하는 데 예산을 쓰기로 결정했다. 침체된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관광 수입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의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시가 인수를 거부함에 따라 반디멘 재단은 도서관 부지와 건물을 매각하기로 했다. 매각이 완료되면 도서관은 식당으로 개조될 것으로 보인다.
호펜타운 반디멘 재단 도서관은 클라우스 반디멘이 세운 156개의 도서관 중 하나다. 작은 버스회사를 전국에서 가장 큰 운송회사로 키운 반디멘은 은퇴에 즈음해 거액을 기부해서 재단을 세웠다. 설립 목적은 지역 문화의 보존과 교육 기회의 균등한 제공을 위해 전국에 도서관을 짓는 것이었다. 재단이 토지를 매입하고 도서관을 지으면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정부가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는 형식이었는데 이는 반디멘이 모델로 삼았던 카네기의 방식을 따른 것이었다.
각 도서관은 지역의 역사와 풍습에 관련된 문서를 보존하고 지역 특색을 살린 장서를 보유하는 걸 운영 원칙으로 삼았다. 즉 모든 도서관은 지역 도서관인 동시에 특수 목적 도서관이기도 했다. 재단의 위원회는 지역 주민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장서의 주제를 결정했다. 호숫가에 세워진 어떤 도서관은 운하의 운영과 운송에 관한 한 국회 도서관에 맞먹는 대규모 장서를 갖게 됐다. 마찬가지로 어떤 도서관은 국립공원에 관한 장서를, 또 어떤 도서관은 사설 사격장에 대한 대규모의 자료를 확보했는데 모두 도서관이 위치한 도시의 개성에 어울리는 장서였다. 특색이랄 것 없는 도시라 해도 어떻게든 장서의 주제는 정해졌는데 그럴 때는 재단의 위원회가 심의를 거쳐 주제를 결정했다. 그래서 모든 반디멘 도서관은 지역 이름 외에 주제에 맞는 또 하나의 이름이 붙었다. 그림책 도서관, 영화 도서관, 아랍 문학작품 도서관, 증기기관 기술 도서관, 아프리카 전통 요리 도서관 등이 그 이름이었다.
호펜타운 반디멘 재단 도서관에도 그런 이름이 있었다. 바로 어디에도 없는 책들을 위한 도서관Library For Nowhere Books이었다. 이 도서관은 도서관 출입문 옆의 동판에 양각돼 있었다. 동판은 낡아서 먼지가 끼었지만 양각된 글자만은 세월에도 불구하고 광택을 잃지 않았다. 그건 도서관의 시설 관리와 청소 일을 38년 동안 해온 윌킨스 부부가 매주 번갈아서 해온 걸레질 덕분이다.
호펜타운 주민들 중에 도서관에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펜타운은 중서부에 위치한 인구 11만8천 명의 작은 도시로, 도시의 명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20세기 말에 폐쇄된 호펜타운 철도역과 게일 대학, 그리고 크랜베리 잼으로 유명한 쉴랜더Schilander사의 생산 공장 정도다. 누가 생각해봐도 ‘어디에도 없는 책들을 위한 도서관’은 호펜타운에 결코 어울리는 주제는 아니었다. 도서관 설립 당시의 문서 어디를 봐도 이에 대한 설명은 나와 있지 않다.
호펜타운 도서관이 전국의 반디멘 재단 도서관 156개 중 153번째로 지어졌다는 사실과 도서관 설립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 문제에 관해 어느 정도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철도역에 비록 소규모지만 철도 박물관이 있어 철도에 관한 장서를 짜임새 있게 구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게일 대학은 이미 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재단 위원회는 이들과의 중복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남은 것은 크랜베리 잼뿐이었지만 그에 대한 장서를 구비하는 것은 기업과 유착하는 것으로 여겨져 기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디에도 없는 책들을 위한 도서관’이라는 일견 괴상해 보이는 이름이 붙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상상력을 발휘해보자면 도서관 개관을 준비하던 재단 위원회는 주제를 선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도서관학, 서지학, 정보분류학, 경영학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는 듀이 십진 분류표를 펼쳐놓고 머리를 맞대고 끙끙댔을 것이다. 너무 포괄적이지도 너무 지엽적이지도 않으면서 다른 분류와 중첩되지 않는, 그것도 가능하면 지역 특색과 연관되는 주제를 찾는 일은 재단 설립 초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일을 153번째로 한다면, 게다가 그 대상이 호펜타운처럼 별 특징 없는 곳이라면. 어떻게든 호펜타운의 특징을 찾아보려는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고 지식과 정보를 모두 사용하고서도 아무 결론을 내리지 못한 그들은 마침내 상상력과 창의력을 동원했을 것이다. 이렇게 특색 없는 마을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어. 그러면 세상에 있을 리가 없는 책들을 이곳에 보내면 되겠군.
이런 가정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믿기는 어렵다. 아마 실제로는 더 현실적인 동기가 개입됐을 것이다. 재단은 매년 꾸준히 새로운 책들을 수서했는데 그것들 중 다른 어떤 도서관의 어떤 서가에도 들어갈 수 없는 책들을 모아둘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책들은 갈 곳이 없는 책들이었고 분류표에 들어가기 어려운 책들이었다. 즉 호펜타운 반디멘 도서관은 전체 반디멘 재단 도서관에서 달리 분류할 곳 없는 책들을 수장하기 위한 도서관으로 선정된 것이다. 호펜타운 도서관 설립 초기에 재단 본부와 도서관은 꽤 많은 책을 주고받았는데, 이를 통해 이 가설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위원회가 붙인 이름이 정확히 어떤 뜻을 가리켰건 간에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는 책들Nowhere Books’이란 이름은 오해를 일으키기에 딱 알맞았다. 그것은 ‘어디에도 없는 책들’이거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책들’을 가리키기도 했다. 즉 호펜타운 반디멘 재단 도서관은 그 이름에서 달리 분류하기 어려운 거추장스러운 책들뿐만 아니라 세계에 단 하나뿐인 유일본이나 희귀본, 심지어는 이미 유실된 책이나 아예 존재한 적도 없는 책들을 수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풍겼다.
호펜타운 반디멘 재단 도서관이 개관 이후 38년 동안 기형적으로 운영된 데는 이 괴상한 이름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재단의 무관심과 방치였다. 도서관은 개관 이후 늘 재정적인 곤란을 겪어야 했다. 당시는 사업의 막바지여서 재정이 거의 고갈된 데다 클라우스 반디멘의 사후에 유산을 상속받은 가족이 재단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었다. 추가적인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도서관은 지역사회에 안착할 방법을 스스로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한때 여덟 명에 이르렀던 사서는 개관 5년 후에는 한 명으로 줄었고 다시는 늘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수서의 어려움에 있었다. 도서 구매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고 재단 본부의 공급 역시 충분하지 않았다. 전국의 반디멘 도서관이 같은 문제를 겪은 건 아니었다. 호펜타운 도서관의 신간 증가량은 전국 평균에 훨씬 못 미쳤는데 재단은 호펜타운의 인구와 도서관 이용자 수 등의 근거를 들어 호펜타운 도서관에 대한 예산 증액을 거부했다. 도서관이 장서량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기증뿐이었다. 당시 도서관의 유일한 사서였던 내 전임자 베니스터 폴센Bennister Poulsen, 이하 BP은 전국의 도서관, 출판사, 독서 클럽에 도서 기증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재단은 편지 발송을 금지했는데 진흙탕 싸움으로 변하고 있는 소송에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도서관 입구에 포스터를 붙여놓는 것으로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 도서 기증 환영.
BP의 회고에 따르면 첫 번째 기증자는 40대 초반의 남자였다.
“한 손에 가방을 꼭 쥐고 있었어. 얼굴을 잔뜩 긴장하고 있었고. 저 문을 열고 똑바로 나를 향해 걸어왔지. 내가 물었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남자는 여기가 정말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는 책들을 위한 도서관이 맞느냐고 물었어. 그리고 바깥에 보니 도서 기증을 환영한다고 하던데 혹시 누군가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는 책을 가져온다면 그 책을 기증받느냐고 묻더군. 그래서 우리 도서관은 언제나 도서 기증을 환영한다고 대답했지. 그리고 기증하고 싶으신 책이 있는지 물었어. 남자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가방에서 한 권을 꺼내 내 책상 위에 올려놓더군. 그건 타이프라이터로 친 뒤 직접 표지를 만들고 제본해서 묶은 원고였어. 흔히 사가본이라 부르는 것 말이야.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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