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바라본 시카고 플랭
햇살이 좋던 어느 날 오후, 창원시 양덕동의 전봇대에 걸린 시커먼 현수막을 문득 쳐다봤습니다.
뮤지컬 〈시카고〉. 남경주, 안재욱, 아이비, 김지우, 최정원, 박칼린…. ○○월 5~7일 창원3·15아트센터 대극장. 쟁쟁하더군요.
예매 문의 ○○○○-○○○○. 입장료도 꽤 되겠지요. 드문 기회죠. 지역에서 이런 대형 뮤지컬을 볼 수 있다는 게.
인근 창원 용지호수. 그날, 이곳도 문화가 넘쳤습니다. ‘2018 창원조각비엔날레’ 멀리서 작품들을 바라봅니다. 밈모 팔라디노의 〈말〉, 김영원의 〈그림자의 그림자〉, 이경호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어디로 가는가?〉. 이 작품은 느낌이 더 생생합니다. 첸웬링의 〈무릉도원 No3〉라고 돼 있네요.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문화의 바다에 풍덩 빠진 느낌입니다. 하지만 흔하지 않은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비엔날레는 2년에 한 번 열립니다.
지역민들이 가장 흔하게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 문화·예술 분야입니다. 지역과 서울의 문화·예술 격차는 통계에서 바로 확인됩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2015 문예연감〉에서 문학·시각예술·국악·양악·무용·연극 6개 분야의 지역별 실행 건수를 비교한 ‘예술활동지수’를 처음 제시했습니다.
서울의 활동 건수를 100으로 해서 해당 지역에서의 활동 건수가 차지하는 비율퍼센트을 산출하고, 6개의 개별적인 분야의 값을 합산해 지역의 예술활동지수를 산출했습니다.
서울은 각 분야마다 100점을 부여받아서 합계 600점이 되고 서울과의 종합적인 문화 격차는 600점과 지역별 점수를 비교하면 손쉽게 인식할 수 있었죠.
서울 600을 기준으로 경기가 149.2로 2위를 차지했습니다. 이어 부산(106.4), 대구(63.7), 경남(60.4)이 뒤를 따랐는데요. 최하위 세 지역은 제주(16.0), 충북(15.3), 세종(1.5)이었습니다.
서울에 특히 몰린 분야는 문학 출판이었습니다. 전체 문학 출판 가운데 72.5%가 서울에 집중됐고, 경기·인천을 더하면 90% 이상에 이르렀습니다.
지방에 산다는 것
지방에서 산다는 게 점점 더 위축되는 세상입니다. 전국 땅덩어리의 11%를 갓 넘는 수도권에는 인구 절반이 몰려 삽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밀려듭니다. 입시를 앞둔 학교에서는 줄곧 ‘in서울’을 주입하고, 학생들은 그 대열에서 빠지면 낙오된 것처럼 느낍니다. 서울 명문대 못지않았던 지방 국립대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순위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싼 등록금 때문에 자녀 머리가 굵어지기 전까지는 줄곧 ‘국립대’를 주입하던 부모들은 요즘은 그런 말도 못 합니다. 지방에 살다가 취직도 못하면 어떻게 하냐고, 취직을 하더라도 쥐꼬리 같은 월급 받고 살아도 되냐고 따지고 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엄연한 사실이니까…. 그렇게 어렵게 서울 보내면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경비 때문에 뼈가 빠집니다.
게다가 사회적·문화적 소외는 또 어떻습니까? 그러다보니 이제는 지방 사람들조차도 불편을 겪을 때는 ‘지방 탓’을 합니다. 가능하면 아이들이나마 지방을 벗어나게 하려 합니다.
지방에 사는 삶의 정체성을 따지고, 대책을 마련하거나 개선하는 일은 뒷전입니다. 지방자치? 지방분권? 웃기는 이야기지요. 마냥 한가한 소리처럼 들립니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지방식민지 독립선언〉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지방은 이제 서울 탓보다는 내 탓을 더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방의 문제를 지방이 먼저 지적하고 해결하자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지방의 무능과 부패를 말하는 사람에게 권한은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점을 이해시켜야 한다.”
이것도 그냥 웃기는 이야기인가요?
지역으로 온 대통령
그는 왜 지역으로 돌아왔을까요?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입구 본산공단에 차를 세우고 그의 생각을 상상하며 1.2㎞를 걸었습니다. 노란 바람개비, 멀리 사자바위, 그리고 그 왼쪽 부엉이바위…. 2008년 2월, 고향에 돌아오던 길에 그도 여기쯤 입구에서 마을을 바라봤을 테죠. 누구는 그렇게 말했지요.
“바람이 불면 그분이 오신 줄 알겠다.”
아쉽게도 바람은 불지 않았습니다. 노란 바람개비가 미동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온 것 같았습니다. 묘소 앞 ‘수반’에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그의 귀향 역시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요? 묘소 옆 기록관 입구에서 그가 지역으로 온 뜻을 조금 엿볼 수 있습니다.
“억압받던 사람이 자유를 누리게 되는 사회. 점차 그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확산돼 나가는 사회의 변화를 저는 진보라고 생각하거든요.”
2008년 8월 9일 당시 봉하마을을 찾았던 방문객들에게 그가 한 인사말입니다. 그의 자서전 〈운명이다〉에는 더 직설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농사짓고, 화포천 정리하고, 숲 가꾸고, 손녀 매달아 자전거 타면서 지내는데 왜 이리들 좋아할까? 나를 보면서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덩달아 행복했다. 전염되는 것이 어디 감기뿐이랴. 행복도 전염된다.”
그의 뜻은 거창한 게 아니었습니다. 농사짓고, 주변 환경 정리하고, 손녀와 놀고…. 그의 생각은 2006년, 대통령 재임 때부터 드러났습니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줄 수 있는, 우리 세대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어릴 때 개구리 잡고, 가재 잡던 마을을 다시 복원시켜서 아이들한테 물려주는 것이 제일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저도 그런 일을 대통령 마치고 하고 싶습니다. 마을의 숲과 생태계를 복원시키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함께 사는 촌락공동체 같은 것을 새로운 형태로 복원시키고, 자연 속에서 정서를 갖고 아이들이 성장하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역’이란 말을 직접 쓰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을, 농촌, 공동체, 생태계 같은 말에서 그의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가 마무리하지 못한 자서전 〈운명이다〉의 ‘귀향’ 편에서 더 구체적인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대통령을 하는 동안 국가균형발전을 이루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가는 것이다. 서울과 수도권은 너무 집중되어 비좁으니까 지방으로 가자는 것인데, 앞장서서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서울이 좋다고 눌러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지방을 살기 좋게 만들기 위해 ‘나도 갑니다!’ 떳떳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뜻은 현실에서 펼쳐지지 못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역으로 돌아온 이유는 복잡한 게 아니었습니다. 같은 책의 ‘신행정수도 건설’ 부분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썼습니다.
“묵은 과제 중에서도 제일 어려웠던 것이 신행정수도 건설이었다. 나는 원외 정치인 시절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하면서 이 문제를 공부했다. 서울과 수도권이 돈과 자원과 인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상황이 계속되면 헌법이 명한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서울은 서울대로 인구 과밀화, 환경 악화, 혼잡비용 증가, 부동산 가격 폭등 때문에 경쟁력을 가지기 어렵게 되고, 지방은 지방대로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고 말라죽을 것이라는 우려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에 벌써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충청권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에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은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경국대전 이래 관습을 이유로 들어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서울이 아닌 곳에 행정수도를 만드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청와대와 국방부를 비롯해 행정 기능의 일부를 서울에 남기고 나머지를 연기군 일대로 옮겨 행정중심복합도시를 만드는 법률을 만들어서야 국회를 통과했고, 헌법재판소도 위헌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건설된 곳이 지금의 세종시입니다.
10년이 흐른 지금, 노 전 대통령의 바람과 달리 돈과 자원, 인구의 서울 집중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악화됐습니다.
지역소외
이 책에서 주로 다룰 문제가 ‘지역소외’입니다. 그런데, 소외를 말하면 지역 사는 사람들은 어두워집니다. 생각하기 싫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이야기를 해봐야 딱히 답이 나올 내용이 아니니까, 별 의미도 없습니다. 재미없는 이야기가 의미도 없으니 누가 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면, 이분들에게 지방분권을 말하면 어떨까요? 개중에 호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옳은 이야기고 그렇게 돼야 하는데, ‘팍팍’ 돌아가는 느낌이 없으니 막연합니다. 지역은 지금, 전반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강준만 교수는 “지방은 이제 서울 탓보다는 내 탓을 더해야 한다. 지방의 무능과 부패를 말하는 사람에게 권한은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점을 이해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은 “억압받던 사람이 자유를 누리게 되는 사회, 점차 그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확산돼 나가는 사회의 변화를 저는 진보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지역민들이 조금 더 힘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그 정도의 기운으로 지난 20년간 우리는 “지방분권” “지방분권” 떠들어댔지만, 사실 지금의 분권은 형식에 불과합니다. 도지사와 시장 군수를 직접 뽑고, 시의원 도의원을 내가 뽑는 정도입니다. 그들의 권한이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나라 전체 권한의 20%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는 ‘2할 자치’입니다. 우리가 좀 더 기운을 내면 지방분권 운동이 됩니다. 그러면 3할 자치, 4할 자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면 지금부터 함께 여행할 준비를 하시죠. ‘지역 여행’을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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