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조선인들이 강제연행된 일본 탄광의 실상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원이하 이우연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2000년을 기점으로 일본 우파가 주장하기 시작한 논리와 핵심 부분이 거의 흡사하다. 그 논리란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갔다’, ‘임금차별은 없었다’, ‘일부러 조선인을 어려운 노동에 배치하는 등의 민족차별은 없었다’, ‘식사 등의 차별은 없었다’ 등이다.
일본 우파의 논리적 목적은 1939년 9월부터 시작된 전시 조선인 동원 체제에서 주로 일본 내 탄광으로 연행된 조선인들이 일본인 노동자와 똑같은 대우나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 있다. 이우연 등 소위 ‘강제연행설 허구론자’들은 이런 일본 우파의 논리를 수용하여 그 바탕 위에 자신들의 새로운 논리를 추가해 나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하나인데도 그들이 거의 취급하지 않는 사안이 있다. 그것은 본래 일본의 탄광 노동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을 대신하기 위해 일제는 왜 조선인과 중국인을 비롯한 기타 전쟁 포로 등을 탄광 노동자로 연행했는가 하는 점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본 내 탄광에서는 원래 어떤 사람들이 광부로 일해왔는가 하는 점이 문제를 풀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조선인, 중국인, 전쟁 포로 등이 왜 일본 내의 일본인 노동자 대신 연행되어 탄광에 투입되었는가 하는 점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조선인 강제연행의 실태를 전체적인 틀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시 동원 체제하에서 조선인들의 주된 송출처였던 일본의 탄광 사정을 우선 알아보아야 한다. 특히 탄광에서 노무관리가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그와 같은 사실들을 살펴보기 위해 일본의 최대 탄광으로 알려진 규슈 미이케三池탄광의 노무 정책을 중심으로 조선인 강제연행의 본질을 알아보기로 한다.
죄수를 광부로 사용한 일본 탄광
미이케 탄광은 일본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탄광이다. 일본에서 탄광이라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곧바로 미이케탄광을 떠올릴 정도다. 그 이유는 미이케탄광을 주제로 한 ‘탄광 부시節’라는 민요가 매우 유명한 데다, 매년 8월에는 일본에서 전국적으로 ‘탄광 부시’에 맞춰 춤을 추는 행사가 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이케탄광은 폐광이 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일본인들에게는 친숙한 탄광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그토록 친숙하게 느끼는 미이케탄광의 역사 속에는 그곳에서 일한 수많은 노동자가 겪어야 했던 엄청난 고통과 고난이 숨겨져 있다.
미이케탄광의 역사는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1873년에는 일본 정부의 관영 탄광이 되었다. 그때부터 미이케탄광은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노동력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실상 광부라는 직업을 좋아서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하로 내려가 힘든 중노동을 해야 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갖가지 사고에 늘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무직보다 임금이 훨씬 많지만 탄광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확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탄광 측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주변 형무소와 의논해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을 작업장에 투입하기로 합의했다. 원래 탄광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극빈층이 대부분이었는데, 힘들고 위험한 일이지만 임금이 높은 편이어서 그들이 목숨 걸고 일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죄수를 투입하면 비싼 임금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해서 미이케탄광은 사업 확장에 필요한 광부들을 확보했다. 값싼 데다가 마음껏 부릴 수 있는 죄수 노동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 19세기 후반에는 일본의 여러 대형 탄광까지 위험하고 힘든 노동에 죄수들을 투입했다. 당시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는 일본에서 천시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일반인 노동력 확보가 더욱 어려웠고, 이에 탄광들은 일본 정부의 허가를 얻어 죄수 노동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결국 조선인, 중국인, 전쟁 포로 등을 전시 동원 체제로 연행해 탄광에 투입한 것은 이와 같은 ‘죄수 노동’을 계승한 정책이었다. 일본의 『브리태니커국제백과사전 소항목사전』 인터넷판은 ‘죄수 노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죄수 노동: 단순한 형벌로서의 징역과는 달리 자본주의 초기의 이른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가 권력을 이용해서 실시된 특수한 임노동 형태. 선진국에서는 식민지 노동, 개발도상국에서는 기간산업의 급속한 육성을 위한 노동으로써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일본에서도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에 걸쳐 관영 공장, 광산 등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또한 민간 부문에서의 헛간제도, 감옥방 또는 제2차 세계대전 하의 중국인과 조선인 강제노동, 전후 외국인 포로를 노동력으로 사용한 일 등도 똑같은 성격으로 죄수 노동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위 인용문을 보면 죄수 노동은 국가 권력을 이용해서 실시한 특수한 임노동 형태라고 정의하면서, 선진국에서는 식민지 노동,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하의 중국인과 조선인 강제 노동과 전후 외국인 포로를 노동력으로 사용한 일 등이 죄수 노동의 한 형태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조선인 강제연행은 죄수 노동의 한 형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탄광에서의 노동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만큼 처음부터 매우 강제적이었다. 일제는 자신들이 일으킨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석탄을 채굴하려고 죄 없는 조선인과 중국인, 나아가 포로까지 동원해서 탄광 노동이라는 죄수 노예 노동을 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우연 등은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다.
일본 탄광에서의 노무관리 실태
1883년 일본 정부는 약 2,000명의 죄수를 수용할 수 있는 ‘미이케 집치감集治監’을 건설한 뒤, 일본 서쪽 일대에서 무기징역형과 이에 필적하는 형량을 선고받은 죄수들을 탄광에 투입했다. 집치감이란 내무성 직할의 죄수 수용시설로, 도쿄·미야기(宮城)·후쿠오카·홋카이도에 설치되었다. 이처럼 정책적으로 죄수 노동을 도입한 결과, 1888년에는 미이케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약 70%를 죄수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죄수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석탄 채굴에 종사해야 했고, 식사도 제대로 배급받지 못했다.
1913년 고베유신일보(神戸又新日報)가 미이케탄광의 죄수 노동에 대해 보도했다. 이 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갱내에서의 노동을 매우 괴롭게 느낀 죄수들이 자해하면서까지 작업을 쉬었고, 극한 노동을 견딜 수 없었던 죄수들의 자살이 증가해 미이케 집치감에서는 죄수들에게 허리끈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탄광에서는 탄광 노동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나야 제도’로 불리는 노무관리 제도를 도입했다. ‘나야’란 창고를 뜻하는 일본어인데, 창고 같은 곳에 광부들을 거주시키면서 관리인에게 관리를 맡기는 제도를 말한다. 나야 제도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쳐서 일본에서 볼 수 있었던 노무관리 제도로, 탄광 자본가는 노동자를 직접 관리하지 않고 노동자의 고용이나 관리를 나야 관리자에게 모두 맡겼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탄광 사업주는 나야 관리자를 고용하고, 나야 관리자는 광부의 ‘모집’과 ‘고용’, ‘탄광 노동’, ‘임금 배분’ 등을 담당한다. 결국 나야 관리자가 광부들의 탄광 생활을 전반적으로 책임지고, 광부는 회사가 아닌 나야 관리자에 소속된 일종의 간접 고용 형태가 나야 제도였다.
일본군 ‘위안부’ 역시 이 제도를 도입해 일본 정부나 일본군은 포주를 선정해 포주들에게 여성들을 모집하게 했다. 또한 위안부의 해외 이송과 현지 위안소 경영 등을 책임지게 했다. 결과적으로 탄광 나야 제도의 관리자 역할과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포주 역할은 그 뿌리가 같다고 할 수 있다.
나야 관리자는 광부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 광부들을 갱 안으로 밀어 넣었다. 광부의 임금은 나야 관리자가 광부들의 실적에 따라 탄광 측으로부터 일괄적으로 받았다. 나야 관리자는 일괄적으로 받은 임금을 광부들에게 분배했는데, 그때 나야 관리자는 일정 비율을 공제한 뒤 광부들에게 임금을 나누어 주었다. 광부를 많이 거느리고 광부들이 많이 일할수록 나야 관리자의 수입도 늘어나기 때문에 나야 관리자는 광부들을 쉴 틈조차 주지 않고 탄광 노동에 투입했다.
19세기 중반에 시작된 나야 제도는 광부가 나야 관리자 소속이므로, 회사가 광부를 직접 통제하기 못해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래서 20세기 초반 몇몇 탄광들은 나야 제도 대신 회사가 광부를 직접 고용하는 ‘직접고용 제도’로 바꾸기도 했다.
여하튼 나야 제도는 1945년 일본이 패전을 선언할 때까지 광범위하게 잔존하며 광부들을 괴롭혔다. 나야 제도하에서 일했던 광부들의 사망률이 상당히 높았는데, 탈출을 시도한 광부들에게는 무조건적인 폭행이 가해졌다. 나야 제도는 광부들에게 말할 수 없이 잔인한 노예제도였다.
결국, 메이지시대 일본 정부와 대규모 탄광들의 죄수 노동 정책이 나야 제도하에서 광부들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조선인, 중국인, 전쟁 포로들의 강제연행과 강제 노동으로 이어졌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이 일본인들도 기피하는 노예 노동에 조선인 등 타민족을 강제적으로 동원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에게 노예 노역이었던 탄광에서의 지옥 같은 착취 중노동을 타민족에게 시켰다는 사실을 ‘강제연행설 허구론자’들은 왜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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