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에
일찍 부모를 여의고 단둘이 살아가는 남매가 있었다. 누나인 윤옥과 남동생 윤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생김새며 나이에 비해 헌칠하고 늘씬한 체격이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았다.
윤옥은 윤호를 극진히 사랑하고 돌보았다. 삯바느질부터 부잣집 허드렛일까지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면서 동생을 먹이고 입히는 데 정성을 다했다. 부모 없는 아이 티가 나지 않도록 애썼다. 윤호 역시 누나를 어머니처럼 믿고 의지했다. 불과 세 살 위였지만 윤옥은 생각이 깊고 행동거지가 어른스러웠다. 윤옥은 일하러 나가면서 가끔 윤호에게 ‘오늘은 강가에 나가 놀지 말라’거나 ‘산에 올라가지 말라’고 이르는 일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날에는 동네 아이들 중 누군가 강물에 빠지거나 산에서 뱀에 물려 죽는 일이 일어났다.
“사람이 글을 배워 도리를 알지 못하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윤호가 열세 살이 되자 윤옥은 그를 마을 서당에 보내었다.
윤호는 글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서당에 다니는 학생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으나 하루종일 조는 일도, 한눈파는 일도 없이 열심히 공부했기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고 한번 배운 것은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서당에 글 배우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나이든 떠꺼머리총각들도 많았다. 그들은 대체로 글 읽기보다 술 마시고 노는 일을 더 좋아하였다. ‘그저 까막눈이나 면하면 되지’ 하는 마음에 도통 공부에 마음 쓰지 않았다. 훈장님은 언제나 윤호와 견주어 게으른 제자들을 나무랐다.
“늙어 죽을 때까지 그저 ‘하늘 천 따 지’만 읊어댈 거냐? 윤호를 좀 본받아라. 어린 동생 같은 윤호에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에그, 못난 것들. 쯧쯧.”
형들은 윤호가 못마땅하고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윤호가 착실하기 때문에 그들의 모자람이나 나태함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윤호는 형들을 무시하거나 잘난 체하는 일이 없었지만 형들의 눈에는 그러한 태도도 건방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저놈을 혼내주자.”
형들은 좁은 논두렁에서 그를 밀어뜨려 두엄더미에 빠뜨리거나 애지중지하는 책을 감추고 없애기도 하는 등 골탕을 먹였지만 윤호는 대들어 따지거나 훈장님에게 고자질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형들은 그가 더욱 미웠다.
“어린놈이 우릴 무시하고 잘난 척하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무슨 수를 내야지. 안 되겠다.”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어느 날, 서당의 학생 한 명이 천자문을 떼게 되어 책씻이를 하기로 했다.
“날씨도 슬슬 더워지니 시원한 물가로 나가자. 자연을 벗삼아 목청껏 글도 외우고 물놀이도 하면서 하루를 신나게 놀아보자.”
놀기 좋아하는 그들로서는 맘놓고 술 마시고 놀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다. 늙은 훈장님은 심한 고뿔로 전날부터 이불을 쓰고 누워 있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홰홰 내저었다.
“나는 몸이 아파 갈 수 없으니 너희들끼리 야외수업을 해라. 내가 없더라도 그동안 배운 것을 열 번씩 큰 소리로 외워야 한다.”
그들은 이번 기회에 그 눈엣가시 같은 윤호를 죽이기로 모의했다. 독약을 탄 작은 술단지를 따로 준비했다.
“그놈에게는 이 술을 먹이자. 아직 어린놈이라 필시 술을 이기지 못해 죽은 줄 알 것이다.”
다음날 아침, 더운 날씨인데도 윤옥은 동생에게 겨울 저고리를 입혔다. 특별히 소매에 솜을 두둑이 두어 지은 것이었다. 윤옥은 단단히 일렀다.
“얘야. 오늘 서당 형들이 술을 많이 권할 거다. 술잔을 받으면, 아직 어린 네가 형들과 마주보고 술을 먹을 수 없다고 하면서 돌아앉아라. 먹는 시늉만 하고는 그 술을 소매 속에 부어버려라. 술이 솜 속으로 배어들어 남들은 그것을 모를 것이다. 절대로 술을 먹으면 안 된다.”
누나의 말대로 형들은 전에 없이 친절한 태도를 보이며 저마다 윤호에게 술을 권했다. 윤호는 누나가 일러준 대로 돌아앉아 먹는 시늉만 하고는 소매 속에 부어버렸다.
어느새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아, 오늘 하루 잘 놀았다. 아까운 술이 아직 남았으니 마저 먹고 가자. 윤호, 이 녀석. 공부만 하는 샌님인 줄 알았더니 쬐그만 게 여간 아니네. 우리가 준 술을 다 받아먹고도 이렇게 멀쩡하잖아? 아무래도 술이 모자랐는가 보다. 모름지기 사내라면 한 말 술은 먹어야지.”
형들이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고 추켜세우는 바람에 마음이 풀어진 윤호는 그만 누나가 한 말을 깜박 잊고 한 잔 받아 마셨다. 손이 이상하게 울렁거리고 몹시 어지러웠다. 비틀대며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길로 쓰러져 숨이 끊어졌다.
윤옥은 죽어버린 동생을 끌어안고 슬피 울었다.
“내가 죽어서 네가 살아난다면, 내가 죽어서 너를 살릴 수만 있다면 천만 번이라도 대신 죽으련만…….”
한편, 윤호에게 술을 먹인 형들은 뒷일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 윤호의 집을 찾아갔다. 집안은 조용한데 호롱불 빛이 바알갛게 창호지 문으로 비치고 있었다. 살금살금 방문 앞으로 다가가 찢어진 문구멍으로 안을 엿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틀림없이 죽었어야 할 윤호가 방문을 등지고 단정히 앉아 나지막한 소리로 글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놈이 하루종일 독이 든 술을 먹고도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글까지 읽고 있는 걸 보니 그게 독술이 아니라 약술이었나보다. 에이, 남은 것이 아까우니 우리가 마저 먹어버리자.”
그러고는 몰려가 작은 단지 바닥에 조금 남아 있는 술을 박박 긁어 한 모금씩 나눠마시고 모두 죽어버렸다. 동네에 줄초상이 났다. 새벽부터 집집마다 울리는 곡성에 온동네가 떠나갈 듯했다.
“내가 너를 삼 년 동안 이대로 놓아두겠다. 삼 년 후 돌아와 다시 살려내겠다.”
윤옥은 죽은 동생을 깨끗이 씻겨 잠재우듯 이불 속에 곱게 눕혔다. 그런 후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 댕기머리를 올려 무명수건으로 질끈 동여매었다. 영락없이 총각의 모습이었다. 방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간단한 봇짐을 꾸려 집을 떠났다.
윤옥은 남자 차림새로 남자 행세를 하며 이곳저곳 떠돌았다. 농사철이면 남의 집 농사를 거들고, 가축을 많이 기르는 집에서는 목부 노릇을 하기도 하고. 서당의 머슴을 살며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기도 했다. 일을 시켜본 사람들은 그 훤칠한 인물이며 성실함이며 문물의 이치에 두루 밝은 점을 들어 윤옥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일 잘하고 신실한 떠돌이 일꾼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어느 대감 집에서 윤옥을 불러들여 청지기 노릇을 맡겼다. 집 안팎의 잡일을 하고 주인집 식구들의 시중을 드는 일이었다.
대감은 아들이 없이 달랑 외동딸 하나만을 두고 있었다. 그 딸은, 비록 남의집살이를 하지만 점잖은 기품이 있어 보이는 데다 남모를 슬픈 사연을 지닌 듯 때로 우수 어린 표정으로 혼자 생각에 깊이 빠져들기도 하는 젊은 청지기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인물도 잘나고 맘씨도 좋고 부지런한 저 총각에게 시집가고 싶습니다.”
“안 된다. 어디 신랑 자리가 없어서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놈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하느냐? 집안 망신을 시키려느냐?”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였으나 사랑에 빠진 딸은 막무가내였다. 아무리 으르고 달래도 소용없었다. 종내는 새파랗게 날을 세운 비수로 제 가슴을 찌르려 하였다.
“그 사람하고 혼인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겠어요.”
예로부터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 딸이 죽는 꼴을 보느니 아무 놈에게나 주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한 대감은 하는 수 없이 혼인을 시키기로 했다. 하긴 근본을 모른달 뿐 뚝 떼어놓고 보면 어느 재상집 자제라 해도 속을 만큼 됨됨이며 인물이 출중한 청지기 총각이었다. 지체가 낮은 것이 못내 아쉽지만 그런대로 착실한 데릴사위 노릇을 잘할 것 같았다.
결혼을 하였으나 여자들끼리인지라 부부가 될 수 없었다. 혼인 첫날, 신방에 드는 시늉만 하고 옷고름도 풀지 않은 채 청지기 방으로 돌아간 신랑은 여러 날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곳에서 기거하였다. 참다못해 신부가 따지고 들었다.
“예로부터 부부는 일심동체요. 하늘이 맺어주는 인연이라 했거늘 어찌 저를 멀리하십니까?”
“아직 부모님의 탈상을 못한 죄인의 몸이니 상을 벗은 후 당신과 부부로 살겠소. 이해해주구려.”
딴은 그렇겠다 싶어 색시는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탈상할 때만 기다렸다.
윤옥은 결혼 후 대감 집을 위하여 더욱 열심히 일했다. 워낙 부잣집 큰살림이라 챙겨야 할 안팎 대소사도, 거느려야 할 사람들도 많았으나 이 모든 일들을 두루 원만하고 세심하게 이끌어나갔고 날알 한 톨, 짚신 한짝 사사로이 제 몫으로 하지 않았다. 대감의 사랑과 신임이 나날이 깊어질 것은 정한 이치였다. 어느 날 대감은 윤옥에게 묵직한 열쇠꾸러미를 건네주었다.
“여보게. 이걸 자네가 맡게나. 난 이제 늙었으니 이 집을 모두 자네에게 맡기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산천 유람이나 하려 하네.”
그러고는 정말 금강산 유람을 떠나버렸다.
“아버지가 열쇠꾸러미를 주신 것은 이제 당신을 사위로 인정하신다는 뜻이에요. 장차 당신이 이 집의 주인이 되어 가문을 이어가야 하는 거예요.”
아내는 기뻐하며 윤옥의 손을 잡고 집안 곳곳을 보여주었다. 열쇠꾸러미를 들고, 조상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비롯하여 쌀가마가 가득 쟁여진 곳간,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귀중한 보물을 보관한 창고, 땅문서들과 금붙이 은붙이, 비취와 호박과 진주 등 값진 패물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는 금고들을 열어 보였다. 그런데 안방 벽장의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는 작은 궤의 열쇠만은 열쇠꾸러미에 달려 있지 않았다. 아니 그 오동나무게에는 문짝도 손잡이도 자물쇠도 달려 있지 않았다.
“이 궤에는 무엇이 들어 있소? 어떻게 여는 것이오?”
“우리집에서 제일 중요한 보물이에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요. 이걸 본 것을 아버님께서 아시면 우릴 쫓아내실 거예요.”
“우리는 부부고 이젠 나도 이 집 식구 아니오? 그렇게 귀중한 보물이라니 더욱 보고 싶구려. 한 번만 살짝 보여주시오.”
윤옥이 졸라대자 아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그 궤에 손을 얹고 중얼거렸다.
“라오아돌고입몸고입혼라나아살여자은죽죽은 자여 살아나라. 혼 입고 몸 입고 돌아오라.”
그러자 궤가 스르르 열렸다. 궤 안에는 빨간꽃 하얀꽃 노란꽃 세 송이를 달고 있는 나뭇가지가 있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꽃이랍니다. 빨간꽃은 살살이꽃, 흰꽃은 뼈살이꽃, 노란꽃은 숨살이꽃입니다.”
아내는 윤옥이 그것을 자세히 보기도 전에 재빨리 궤에 손을 얹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궤는 언제 열렸었느냐는 듯 감쪽같이 닫혔다.
‘라오아돌고입몸고입혼라나아살여자은죽’이라?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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