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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화의 배경, 특성, 변화
내가 막 의료 사회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1970년대에는, 건강과 질병에 대한 관점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관점과 상당히 달랐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식욕부진anorexia, 만성피로증후군chronic fatigue syndrome, CFS,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 공황장애panic disorder, 태아알코올증후군fetal alcohol syndrome, 월경전증후군, 영아돌연사증후군sudden infant death syndrome, SIDS처럼 지금은 잘 알려져 있는 병명들이 당시 내 수업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비만이나 알코올의존증을 병으로 보는 사람은 의학계에서도 많지 않았다. 에이즈에 대한 언급도 없었고,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걸프전증후군이나 다중화학물질과민증도 없었다. [지금은 ADHD에 널리 쓰이는] 리탈린Ritalin은 비교적 소수의 아동에게만 사용되었고, 특정 문제들에는 신경안정제가 흔히 처방되었지만, 인간성장호르몬human growth hormone, HGH, 비아그라, 선택적세로토닌재흡수억제제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s, SSRIs 같은 항우울제는 아직 생산되기 전이었다.
지난 30여 년간, 의학계는 훗날 흔한 질환이나 장애로 널리 알려지게 될 여러 문제들을 발견해 냈다. 이 책에서는 오늘날 의학적 진단과 치료의 대상이 되는 행동, 정신 상태 혹은 신체 조건과 관련이 있는 질환이나 “증후군”들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분명히 의학적으로 정의된 삶의 문제들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렇다면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의학적 문제가 유행하게 되었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의학이 이미 있던 문제들을 더 잘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게 된 것일까? 혹은 의학적 성격이 모호했던 삶의 온갖 문제들이 이제 의학적 진단과 치료의 대상이 된 것일까?
나는 여기서 언급되는 특정 문제가 정말로 의학적 문제인지 판결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이는 내 전문 지식과 이 책에서 다룰 주제의 범위를 한참 뛰어넘는 일이다. 내가 관심 있는 부분은 의학이 관할하는 영역이 이처럼 늘어나게 된 사회적 기반과 그 과정이 가지는 사회적 함의이다. 우리는 인간이 겪는 어떤 문제가 “정말로” 의학적 문제인지 논의하지 않고도, 의료화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갈 수 있다. 실제로 의학적 문제가 무엇인지는 제 눈에 안경 식일 수도 있고, 의학적인 정의를 내리는 권한을 가지는 사람들의 영역에 속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학적 분석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은 진단의 타당성이 아니라 그와 같은 명명의 타당성이다.
의학과 의학적 개념의 영향력은 지난 50여 년간 놀라울 정도로 확대되었다. 미국의 지표 두 개만 간단히 살펴보면, 국민총생산GNP 가운데 의료 관련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950년 4.5퍼센트에서 2006년 16퍼센트로 올랐고, 인구당 의사 수는 1970년 10만 명당 148명에서 2003년 10만 명당 281명이 되었다.Kaiser Family Foundation 2005, Exhibit 5-7 이 기간에 인구당 의사 수는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었고, 그에 따라 의료 역량도 크게 확장됐다. 의학이 관할하는 영역은 과거에는 의학의 영역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들까지 포함할 정도로 늘어났다.
“의료화”medicalization는 비의학적 문제가 질병이나 질환과 같은 의학적 문제로 정의되고 치료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어떤 연구자들은 의학이 관할하는 영역이 성장한 것이 ‘지난 반세기 동안 서반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회변동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Clarke et al. 2003, 161 최근 40년간 사회학자, 인류학자, 역사학자, 생명윤리학자, 의사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의료화에 관해 글을 써왔다.Ballard and Elston 2005 이들은 의료화의 특정 사례에 집중해 기원과 범위, 의료화가 사회, 의료, 환자,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었다.Conrad 1992: Bartholomew 2000; Lock 2001. 의료화의 전개 과정을 단순히 분석하는 데 그친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 같은 사회변동에 대해 다소 비판적이거나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 장에서는 의료화와 사회통제에 관한 주제들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기존의 연구 문헌들을 요약하기보다는, 의료화를 둘러싼 개념적·내용적 쟁점들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렇기에 포괄적인 검토와 논평을 제시하려 하지는 않았다. 의료화와 관련된 몇몇 저술들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곳에서 좀 더 자세히 논평했다.Conrad 1992; 2000
의료화의 특성
사회학자들이 의료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이었다. 초기 연구들은 일탈의 의료화medicalization of deviance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지만Pitts 1968; Conrad 1975, 곧 의학이 관할하게 된 다양한 영역의 인간 문제들에도 의료화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Freidson 1970; Zola 1972; Illich 1976 의료화에 대해 얼마나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나는 몇 가지 데이터베이스에 “의료화”를 검색해 보았다. 검색 결과〈표1-1〉 참조는 개략적인 지표일 뿐이지만, 이에 쏟아진 관심과 이를 주제로 한 저작물의 양을 짐작하게 해준다. 사회학 분야에서만 수십 개의 의료화 사례들을 볼 수 있었는데, 관련 논문은 “의료화 논문”Ballard and Elston 2005 혹은 “의료화론”Williams and Calnan 1996 정도로 느슨히 분류되어 있었다.
의료화에 주목한 것은 사회과학계만이 아니었다. 의학 논문 검색엔진인 메드라인Medline에서도 수많은 논문이 검색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영국 의학 저널』British Medical Journal의 2002년 의료화 특집호와 2006년 『PLoS 메디신』PLoS Medicine에서 “질병의 상업화”disease mongering라는 주제를 다룬 것이 특히 눈에 띄었다. 2003년 생명윤리에 관한 대통령자문위원회President’s Council on Bioethics는 의료화 문제만을 다룬 회의를 열기도 했다.Kass et al. 2003 언론에서의 관심은 이보다 덜했지만 지난 2년간 의료화를 언급한 기사 수는 확실히 늘어나는 추세다. 예를 들어, 2005년 『시애틀 타임스』Seattle Times는 “어쩌다 환자”Suddenly Sick라는 제목으로 질병 범주가 확대되고 의료화가 촉진되는 현상을 집중적으로 다룬 탐사 보도를 5회에 걸쳐 실었다.Kelleher and Wilson 2005 의료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의료화 증가에 따라 같이 늘어나는 추세임은 이제 분명해 보인다.
의료화의 핵심은 정의定義다. 즉, 의료화는 어떤 문제가 의학적 용어로 정의되고, 의학적 언어를 사용해 서술되며, 의학적 틀을 적용해 이해되거나, 의학의 개입을 통해 “치료”되는 것이다. 내 글을 포함해 많은 글들이 의료화에 비판적이지만, 의료화가 설명하는 것이 ‘과정’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알코올의존증, ADHD, 갱년기, 발기부전의 의료화를 분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말로” 의학적 문제라 인정하는 간질의 의료화도 분석할 수 있다. “의료화”는 문자 그대로 “의학과 관련된 것으로 만든다”라는 뜻으로, 대부분의 분석이 과잉 의료화와 그 결과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과잉 의료화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의료화에 대한 검토에서 핵심은 질환이나 질병으로 간주되는 어떤 대상이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의학적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외려, 그것이 의학적 문제로 정의될 필요가 있다. 신체와 관련될 수 있는, 그리고 어느 정도는 정신과 관련될 수 있는 대부분의 병들에 가장 먼저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의료 전문가들이지만Zola 1972, 대개 어떤 문제의 의료화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행위자들이 꼭 필요하다.Conrad 1992; Conrad and Schneider 1992
초기 연구의 대부분은 의료화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를 의사들이 쥐고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이반 일리치Illich 1976는 기억하기는 좋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의료 제국주의”medical imperialism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의료화가 단순히 의사와 의료인들이 새로운 문제들을 추가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예를 들어 알코올의존증의 경우, 일차적인 의료화는 알코올중독자 자조 모임인 ‘익명의알코올중독자들’Alcoholics Anonymous이라는 단체의 사회운동을 통해 주로 이루어졌고, 의사들은 뒤늦게야 알코올중독을 질병으로 보게 되었다.Conrad and Schneider 1992 그러나 지금까지도, 알코올의존증에 대한 관리에서 의료 전문가나 의사들의 관여는 주변적으로만 이루어질 뿐이며, 이는 의학적 치료가 의료화의 필수 요건이 아님을 보여 준다.Conrad and Schneider 1992
의료화는 일탈이나 “일상적인 사건들”에서 일차적으로 일어나지만, 사회 전반을 관통하며 삶의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의료화의] 다양한 범주 가운데서도 일탈의 의료화에 해당하는 경우를 살펴보면 알코올의존증, 정신장애, 아편중독, 섭식장애, 성/젠더 차이, 성기능장애, 학습장애, 아동 학대와 성 학대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일탈의 범주에서 ADHD, PMS, 만성피로증후군,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등과 같은 수많은 범주들이 새로 파생되어 나왔다. 한때는 부도덕, 죄악 혹은 범죄로 정의되던 행동들에 의학적 의미가 부여되면서 ‘나쁜’ 것에서 ‘아픈’ 것이 되기도 했다. 또한 불안, 감정 기복, 월경, 피임, 불임, 출산, 갱년기, 노화, 죽음처럼 삶의 일상적인 과정으로 여겨지던 일들도 의료화되고 있다.
의학적 치료의 대상이 되는 범주들의 증가는 의료화의 발흥을 보여 주지만6장 참조, 이를 단순히 다양한 영역들이 의학의 식민지가 된 결과 또는 도덕 집단moral entrepreneurs이 적극적으로 활동한 결과로만 보기는 어렵다. 바스키와 버로스가 지적하듯, 사람들이 가벼운 증상들에 대해 무심히 지나치는 일이 줄면서 “불편한 몸 상태나 단발적 증상들이 질병으로 재분류되고 신체 고통의 의료화가 진전되는” 데 박차를 가했다.Barsky and Boros 1995, 1931 사회운동 세력과 환자 단체, 그리고 각 환자들 역시 의료화의 중요한 지지자들이었다.Broom and Woodward 1996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제약 회사 등의 기업들과 소비자가 될 수 있는 잠재적 환자들이 의료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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