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갖지 않기로 맹세한 이유
오마르 그라옙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 대한 지상 공격을 제한적으로 실시할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잘 모르는 이들은 이스라엘 탱크가 국경 넘어 몇 미터 전진하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이틀간만 그랬다. 이스라엘이 광범위한 인종 청소와 학살을 계획하고 있을 줄이야, 우리도 몰랐다. 이스라엘의 목표는 한 지역을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깨끗이 쓸어버리
는 것이었다.
토요일 밤 10시 경에 사태는 고조되었다. 이스라엘 무인비행기들이 낮게 활강하더니 커다랗게 윙윙 소리를 냈다. 아파치 헬기와 F-16 전투기가 폭격하면서 서로 엄호했다. 그리고 가자 시 동부 슈재야 일대가 호되게 두드려맞기 시작했다.
중단 없는 폭격. 나는 이 모든 소리를 내 집에서 들었다. 폭발과 포격 횟수를 셀 수조차 없었다.
수백 가구가 집과 살림살이를 두고 떠나 어디라도 피난할 곳을 찾았다. 가자 지구에서는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들은 자식들 말고는 아무 것도 챙긴 것 없이 죽음을 피하려고 거리를 걸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불도저의 삽날에 올라가 숨으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목적지도, 갈 수 있는 데도 없이 그저 헤매 다녔다.
그들은 결국 알 쉬파 병원에 모이게 되었으니, 속속 도착하는 친척이나 이웃, 친구의 시신을 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날 밤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다. 단어가 떠오르지 않고 숨도 쉴 수가 없다. 그 밤에, 슈재야가 타올라서 가자 시는 거대한 불덩이처럼 보였다.
다른 지역은 거의 온종일 정전이었다. 우리는 TV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눈과 귀로 슈재야에 퍼부어지는 무자비한 공격과 사람들의 비명을 듣고 타오르는 불길을 보았다.
우리가 가진 것은 라디오뿐이었다. 라디오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부인하려고 했던 바를 알려 주었다. 진실에 직면해야 될 때까지, 우리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슈재야의 주민들이 도륙당하고 있었다.
밤마다 우리는 어서 시간이 가고 새벽이 와서 하늘을 밝히고 가자 지구에 햇살을 퍼부어주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날 밤은 아니었다. 우리는 태양이 천천히 뜨기를, 그래서 햇빛 아래 드러나는 것을 좀 더 늦게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예상은 했지만, 햇빛이 보여주는 것은 참상 이상이었다.
우리는 슈재야를 알아볼 수 없었다. 쓰나미나 지진 같은 자연 재해에 강타당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는 자연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1948년 나크바1)가 1982년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 사건2)의 장면으로 재현된 것 같았다. 5년 반 전 이른바 ‘캐스트 리드’3) 공습의 회상 장면 같기도 했다.
적십자사가 슈재야의 시신과 부상자들을 수습하기 위해 ‘인도적인 정전’을 제안했다. 이스라엘은 처음에 거부했다가, 받아들였다가, 약속을 깨고 의료진과 구급차를 포격했다.
그 와중에도 의료진들은 길바닥에 널려 있던 72구의 시신과 400명이 넘는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옮겼다. 사상자 숫자는 급증할 거라고 했다.4) 외국 방송의 특파원들과 현지 언론인들은 이 믿을 수 없는 사태에 경악했다. 그들은 안 볼 수가 없는 학살의 현장을 보도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
참상의 이런저런 모습들이 TV의 여러 채널에 비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차마 볼 수 없는 것은, 죽거나 다친 아이를 부모가 울면서 나르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산이라도 옮기는 듯했다.
언제쯤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람으로 여겨질까? 인간으로? 민간인으로?
언제 우리 아이들은 인권을 갖고 안전하게 클 수 있을까?
죽은 자식을 안고 있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떨까? 그의 상실감이? 자식을 보호하지 못했으니 그는 얼마나 부끄럽고 죄스럽게 느낄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기 가자에 사는 한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나는 자식을 이 세상에 내놓고는 속절없이 희생당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자식이 죽는 모습을 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 죽고 그 부모가 우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통스럽다. 내 자신이 그런 일을 감당할 수는 없다.
어떻게 세상은 한 지역과 그 거주민들을 쓸어버리는 것을 ‘자기 방어’요 ‘정당 방어’라 할 수 있나? 어찌 어린이들이 ‘전투원’이고 ‘테러리스트’란 말인가?
가까운 모스크에서 성금 모으기 운동을 시작했다. 나는 더욱 무력감을 느낄 뿐이다. 사랑하는 이와 집과, 이제까지의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든지 그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으므로, 소액이지만 성금을 냈다. 하지만 잃어버린 자식의 빈자리를 돈이나 물건이 메워줄 수는 없을 것이다.
몇 시간이나 나는 멍하고, 손 하나 까딱 할 수 없고, 숨이 막히고, 어지러웠다.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펑펑 쏟아져 나왔다. 뺨을 태우는 뜨거운 눈물이었다.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자다가 폭탄의 세례를 맞았다. 도망치지 못하면 파편에 깔려 죽었다.
오늘 나는 내 인간성과 영혼에 작별을 고한다. 그것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또한 나는 죽어버린 아랍 민족과 지도자들에게 작별을 고하는데, 이 경우에는 애도도 없다. 인권 단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작별을 고한다. 그들은 인권을 보호하는 데 늘 실패해왔다. 보고서와 기록물이 무고한 아이들을 구하지는 못한다.
나는 결코 적지 않은 수의 ‘구호 대행사’들에게도 작별을 고한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피를 선전거리 삼아 돈벌이를 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의 어느 곳에 있는지 알게 될 때까지는, 세계 인도주의란 것에도 작별을 고하고자 한다.
* 주
1) 나크바 : 아랍어로 재앙.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선주민인 팔레스타인인들 70만 명이 쫓겨나고 수백 개의 마을이 파괴되었다. 이 난민들의 후손 수백만 명이 현재 요르단, 레바논,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등지에 흩어져 있다. 매년 5월 15일은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독립기념일’이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나크바의 날’이다.
2)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 사건 : 1982년 레바논의 무슬림 마을 사브라와 샤틸라를 기독교 근본주의 민병대가 습격하여, 대개 팔레스타인인들인 주민들을 학살했다. 학살된 이들은 3,500명에 이른다. 이 학살의 배후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Mossad였고, 학살이 일어난 날 이스라엘 군대가 주민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마을을 포위하고 있었다.
3) 캐스트 리드 : 2008년 말~2009년 초 가자 지구에 혹독한 공습을 퍼부은 이스라엘군의 작전명. 이 공습으로 팔레스타인인 1,417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다쳤다. 이를 팔레스타인들은 ‘가자 학살 사건’이라고 부른다.
4) 이 글은 2014년 7월 중순에 쓰였다. 이스라엘의 공습은 7월 8일 시작되었으며, 8월 11일까지 사망자 1,900명 이상, 부상자 약 1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 날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72시간 정전에 합의하였으나 이후의 전망은 불투명하다.
불타는 도시에서
나이루즈 카못
내 안의 불꽃, 성급히 밝아지는 오렌지색 거품, 나를 죽이는 소음. 고립과 로켓이 함께 폭발한다, 거품은 커져서 온 도시를 삼킨다. 폭발음이 점점 더 커지고 더욱 날카로워진다, 내 안에서. 도시가 불탄다. 내 속에서 도시의 영상이 찢어발겨지고, 언어는 진동하고, 유리는 흩어진다. 유리로부터 날아가는 조각마다 사건이 영상이 실려 있다.
한 아이가 엄마 뱃속의 어느 굽이에서 살려고 꼬무락거린다. 저를 보호하는 엄마의 몸 안에서, 아이의 심장은 멈춰버린 엄마의 심장과 분리된다. 두 쪽으로 이루어진 조그만 심장이 처음으로 혼자 애쓴다. 미사일이 엄마의 내장을 터뜨리지만, 무고한 심장 박동까지 들을 만큼 전능하지는 못하다. 그래서 아이는 폭발음을 듣고, 그 소리에 세상으로 밀려나온다.
가족이 다함께 서서 간절히 기도드린다. 주님께 간구하니 자신들이 안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 방에 빠짐없이 모인 온 가족이 동시에 날아오르고, 층층이 무너져 내리는 건물의 벽돌은 쏟아진다. 파편과 시체와 회색 재만 남는다.
네 명의 아이가 철썩대는 파도를 향해 웃으면서 뜀박질을 한다. 전함이니 전투기 따위를 무서워하지 않고, 어린애다운 순진함이 자신들을 보호해주리라 생각한다.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아무 발자국도 없는 모래 위에 그들의 발자국이 찍힌다. 전함에서 날아온 포탄이 자신들을 산산조각 낼 때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또 한 아이는 병원 침대에서 돌아오지 않을 아버지와 다시는 보살펴주지 않을 어머니를 기다린다. 그의 부모는 죽었다. 아이는 신이 주신 고요 속에 잠잔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비극을 그는 모른다. 비극은 부모가 살과 피를 되찾을 수 없고 다만 고통스러운 기억이 되었음을 알 때 닥칠 것이다.
반짝이는 눈과 천진한 얼굴의 아이. 달덩이 같은 얼굴, 백린탄에 뚫린 부드러운 피부. 타들어가는 아름다움, 아이의 울부짖음. 날 태우지 마!
벽이 흔들리고, 창문이 떨리고, 열기는 달아오른다. 전쟁의 열기. 비행기들이 온밤을 귀뚜라미처럼 집요하게 울어대고, 죽음이 겁나서 두근거리는 가슴은 창문에서 물러선다. 죽음이 다가온다. 죽음을 창문을 겁내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을 쳐다본다. 수평선이 그들을 높이 들어 올리고 그들의 영혼을 파도 위로, 바다 너머로 나른다. 그들은 솟구치는 날개를 갖게 된다. 날아오를 때, 우리의 영혼은 하나가 된다.
학생들이 시험에 합격한다. 그들의 이름이 적힌 합격 증명서가 무덤의 신원 증명서가 된다. 합격한 대학의 교정에 그들이 발을 디디기도 전에, 그 대학은 결원이 생긴다.
사람들은 바깥에서, 쓰레기장과 수업을 중단한 학교 건물에서 잔다. 자기 집이 파괴되리라는 경고가 들려오면 그들은 흩어진다. 끊임없는 공포로 그들은 밤이고 낮이고 서로 엇갈리며 뛰어다니지만, 어쨌든 제 집이 무너질 때는 그 현장에 있는 게 중요하다. 지구가 불타고, 나무와 작물들이 짓뭉개질 때.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비명, 유리 조각에 아로새겨진다. 마치 이 유리조각들이 그들의 영혼을 낙원으로 데려다줄 백합인 것처럼. 울기, 환호하기, 망설이기, 미사일 불발탄을 멀찍이 날라놓기, 잃어버린 평화의 메시지를 찾기.
불꽃의 원, 타오르는 불길, 폭발하는 미사일. 그러나 도시는 로켓 안에 숨어 있다. 죽음의 미사일, 그 안에 감춰진 생명. 로켓은 모르지만, 도시는 안다. 왜냐하면 가자 바닷가의 모래 한 알갱이도 불타지 않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사랑을 북돋는 파도 밑에서, 희망의 숨결을 불어넣는 짠 물결 속에서, 심장이 요동칠 때만이 그것은 타오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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