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종이에 경의를
“무엇보다도, 종이를 존중하시오!”
─ J.M.W. 터너가 메리 로이드에게 한 조언을 메리 로이드가 1880년에 회상한 것.
『터너 연구(Turner Studies)』(1984) 4권 1호에서 인용.
종이 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이곳은 종이와 종이로 만든 물건의 보존과 연구를 위한 박물관이다. 종이로 만든 물건이라 함은 책, 편지, 일기 등은 물론 회계장부, 투표용지, 판지 상자, 종이 깃발, 반창고, 수표, 출납부, 현수막, 삼각 장식 깃발, 컵 받침, 출생증명서, 사망 증명서, 세례 증서, 서출 증서, 보드게임, 책갈피, 명함, 우유 팩, 포장 상자, 메뉴, 차림표, 영수증, 해도, 진료 기록서, 걸그림, 담배 종이, 의류(양복, 모자, 셔츠, 코트, 기모노, 멜빵바지, 작업복 등), 관, 색칠 공부 책, 꽃종이, 쿠폰, 색종이, 기름종이, 손톱 줄, 봉투, 거름종이, 거즈(의료용, 산업용, 요리용), 폭죽, 파리잡이 끈끈이, 온갖 공문서, 부고, 인사 카드, 엽서, 연, 양탄자, 초롱, 전등갓, 대출 카드, 신분증, 여권, 잡지, 카탈로그, 신문, 지도, 지구의, 종이 가방, 종이컵, 종이 인형, 종이 꽃, 지폐, 종이 파이프, 파노라마, 사진, 놀이 카드, 우표, 포스트잇 메모지, 포스터, 처방전, 퍼즐, 성적표, 기록부, 사포, 구두 상자, 문방구, 스티커, 종이 리본, 가격표, 꼬리표, 표, 티백, 전화번호부, 벽지, 포장지,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이 포함된다.
우리는 종이로 된 세상에 산다. 종이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다. 적어도 상상하기가 매우 어려운 건 분명하다. 물론 상상해볼 수야 있다. 우리는 뭐든 상상할 수 있으니까. 위대한 작가, 화가, 음악가 들이 책, 그림, 음악을 통해 우리에게 상상하는 법을 가르친 덕이다. 우리는 종이로, 종이를 통해, 종이를 이용해서 상상하는 법을 배우고 훈련받았다. 그 덕분에 종이 없는 세상도 상상해볼 수 있다. 그건 죽은 상태나, 태어나지 않은 상태를 상상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변을 본다. 다만 화장지가 없다. 시리얼 한 그릇을 먹지만 당연히 시리얼 상자는 없다. 차는 티백 없이, 커피는 커피 필터 없이 마신다. 전철 타러 가는 길에 신문을 안 산다. 신문이 없으니까. 사실 돈도 없다. 음, 동전은 있겠다. 동전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있다. 아니면 돈으로 쓰는 별보배고둥 껍데기가 든 주머니나. 그래도 복권은 안 산다. 껌도 마찬가지다. 포장지가 없으니. 전철 표도 없고, 사실 배차 시간표도 없다.(재미 삼아 전철, 전철역, 집, 사무실, 직장 같은 것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계획표도, 시간표도, 조사서도, 우편물도, 청사진도, 특허장도, 지도도, 도표도 없이 그런 게 존재할 가능성은 무척 낮지만 말이다. 불가능하다고는 못하겠지만, 그 가능성은 여러분이 종이에 적힌 글을 읽거나 종이에 글을 써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상태로 지금 이 글을 읽을 가능성만큼이나 희박하다.) 전철 안에서 광고를 보지도 않을 거고 광고판이나 게시판도 마찬가지다. 종이컵에 담아 종이 커버를 씌운 테이크아웃 커피도 안 산다. 커피 가게에 스탬프 카드 같은 것도 있을 턱이 없으니 도장도 찍지 않는다. 편지를 부칠 일도 없다. 우체국도 없다. 온라인 서점 택배도 없다. 일하면서 이메일을 프린트하거나 서류를 폴더에 정리하거나 양식에 기재할 일도 없다. 사무실 벽에는 벽지도 없고 가족사진도 없다. 포스트잇 메모지를 붙이거나 컴퓨터 화면상에서 ‘문서’를 작성해 ‘파일’을 만들어 ‘폴더’에 넣지도 않을 거다. 점심시간에 잡지나 소설책을 읽지도 않을 거고, 종이로 싸서 종이봉투에 넣어주는 샌드위치를 먹지도 않을 거고, 손에 묻은 기름을 냅킨으로 닦지도 않을 거다. 오후에 손톱 줄로 손톱을 다듬거나 화장지로 화장을 고치거나 코를 풀지도 않을 거다. 컵케이크도 없고 케이크 상자도 없다. 명함도, 청구서도, 은행도, 건축협회도, 보험회사도 없다. 소규모 산업과 간단한 정부는 있을 수도 있겠다. 규범과 질서도 좀 있고. 하지만 담배를 피우지도, 물티슈로 뒤를 닦지도, 선물을 포장하지도, 숙제를 채점하거나 첨삭하지도, 메뉴를 읽지도,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지도, 폭죽을 터뜨리지도, 불꽃놀이를 하지도 않을 거다.
잠깐이라도 종이가 사라진다고 상상해보라. 무얼 잃게 될까? 모든 것을 다 잃을 것이다.
종이는 궁극의 인공물
종이가 쓰인 지 2000년 정도가 되었다. 중국에서 처음 발명되었고 희귀하고 값비싼 재료로 취급받다가 마침내 불안과 전염병처럼, 희망과 절망처럼 퍼지고 퍼져서, 19세기에는 제지 기계가 생겨나 사람 손 대신 기계가 종이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종이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해 환상적인 종이의 시대가 도래했다. 서양 사무직 노동자가 한 해에 평균 1만 장이 넘는 종이를 쓴다. 미국 사람은 1년 동안 총 340킬로그램에 달하는 종이를 소비한다. 시멘트 7포대 혹은 설탕 150봉지가 넘는 무게다. 종이가 없었다면, 틀림없이 누군가가 어떻게든 발명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구텐베르크라든가. 종이가 없으면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낱활자도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까. 종이는 궁극의 인공물이다. 싸고, 가볍고, 내구성 있고, 접을 수도, 자를 수도, 구부릴 수도, 뒤틀 수도, 코팅을 할 수도, 엮을 수도, 방수 처리를 할 수도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무엇에든 사용할 수 있다. 배? 물론. 옷? 물론. 가구? 물론. 집? 물론. 무기? 물론. 게임, 퍼즐, 장난감? 물론. 고속철도 바퀴? 물론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 차차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말한 것은 종이의 실용적인 쓸모만 두고 한 말이다. 일본에서는 종이를 잘라 만든 끈으로 성소를 신성하게 꾸민다. 인도에서는 종교 축제 때 ‘산지’라고 하는 오린 종이를 이용해 ‘랑골리’를 만든다. 랑골리란 힌두 신들을 맞기 위해 땅바닥에 그리는 아름다운 문양이다. 스위스에서는 법적 문서가 인증되었다는 뜻으로 정교하게 오린 종이를 사용한다. 중국에서는 도교나 불교의 전통 장례식을 치를 때 망자가 저승으로 편히 갈 수 있도록 신성한 종이를 불에 태운다. 셜록 홈즈는 종이로 범인을 잡을 수 있다. “‘여기 종이가 좀 있네.’ 어느 겨울밤 우리가 불가에 마주 앉아 있을 때 내 친구 셜록 홈즈가 말했다. ‘왓슨, 정말로 한번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보네.’”(단편 「글로리아 스콧 호」) 홈즈가 종이로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 재미 삼아 한번 훑어보자. 「보헤미아 스캔들」에서 홈즈는 『컨티넨탈 가제티어Continental Gazetteer』라는 책을 참조해서 문제의 종이가 보헤미아에서 생산된 것임을 추리해낸다. 「네 개의 서명」에서는 참고 서적을 들춰볼 필요도 없이 바로 어느 종이가 “인도 토착 제조업자”가 만든 것임을 알아본다. 홈즈는 여러 기술적 주제에 관한 논문들을 썼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에는 “양봉 실용서”와 “여러 종류의 담뱃재 구별법”, 문신, 귀와 손 모양, 발자국 추적, 라수스1)의 다성부 성가에 대한 연구도 있고 비밀 문서에 관한 ‘가벼운’ 논문과 문서의 연대 추정에 관한 논문도 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증권거래소 직원」에서는 종잇조각 하나를 가지고 왓슨의 건강 상태를 짐작한다.
“자네 새 슬리퍼를 신었군. 그걸 신기 시작한 지 몇 주밖에 안 됐을 거야. 그런데 살짝 들려 올라간 슬리퍼 바닥 면을 보니 약간 그을려 있더군. 처음에는 슬리퍼가 젖어서 말리다가 태운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 하지만 발등에 동그란 종이 상표가 붙어 있는 게 보였네. 물에 젖었다면 그건 벌써 떨어져 나가고 없을 거야. 그렇다면 자넨 슬리퍼를 신은 채 불을 쬐었던 것이네. 그런데 건강이 좋은 사람이라면 이런 6월에 아무리 발이 젖었어도 불을 쬐는 일 따윈 하지 않았을 걸세.”
옳은 말씀.
이런 식으로 종이의 논리를 거침없이 펼쳐나가다 보면 종이 자체가 세상의 기틀이라는 뜻밖의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다. 종이접기에서는 먼저 기본을 만드는 법을 배운다. 새 기본형, 개구리 기본형 등을 만들고 이걸 토대로 온갖 종류의 모형을 만들 수 있다. 아주 단순한 산 접기와 골 접기만 가지고 세상을 만들어낸다. 이와 비슷하게 종이는 우리 역사의 온갖 산과 골의 기본, 기틀이었다. 경제, 예술, 전쟁과 평화가 모두 종이를 수단으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우리가 종이 없는 세상에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실감하게 된다. 아니, 적어도 일부 종이는 없는 세상. 곳곳에서 종이가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종이 한 장 오가는 일 없이 항공편을 예약하고 탑승 수속을 한다.(그래도 여권과 비자와, 그걸 챙기는 것을 잊지 말라고 적어놓은 리스트는 필요하고 비행기 안에서는 문고판 책, 구토 봉지, 비상시 대책 요령 책자, 손때 묻은 기내 잡지, 도착 직전에 주는 물티슈를 잘 쓸 테지만.) 주차권 없이 주차를 하고, 전자책을 읽고 아이패드를 사용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종이가 늘어나기도 한다. 출간되는 책이 더 많아지고, 바리스타가 건네주는 종이컵도 점점 많아지고, HP 가정용 프린터를 갖춘 집도 늘어난다. 책의 종말인가? 신문의 제목이 줄기차게 묻는다. 그래도 종이가 계속 쓰일 것인가?
짧은 답: 그렇다.
이 책에서는 아주 장황한 방식으로 종이의 죽음이라는 말이 과장되었음을 보일 참이다. 종이를 잔뜩 머금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종이에 작별을 고한다고 함은 어느 날 글쓰기를 익혔다는 이유로 말하기를 멈춘다는 말과 비슷하다.” 데리다는 여러 글에서 종이의 문제를 반복해서 다룬다. “종이에 대한 의문이 계속 제기되는 것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 나한테는 그것 말고 다른 어떤 주제도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다. 언제나 종이, 종이, 종이다.”
종이, 종이, 종이. 플로피 디스크를 기억할 정도로 나이가 있는 사람은 한때 선도적인 관리자들의 공통 목표가 종이 없는 사무실이었던 때가 있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애비게일 J. 셀렌과 리처드 H.R. 하퍼가 쓴 『종이 없는 사무실의 허상The Myth of the Paperless Office』(2001)을 보면 이메일과 네트워크 컴퓨팅 등 기술적 진보 덕에 사무실 종이 소비량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났다고 한다. 기술 변화로 종이가 필요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종이가 사용되는 시점”이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곧 인쇄해서 배포하는 게 아니라 배포한 다음에 인쇄할 따름이다. 어쨌든 온갖 기술 개발의 궁극적 목표가 결국에는 ‘종이 같은 장비’를 구현하는 것인 듯 보인다. 기기를 통해 정보에 접근하고 정보를 보내고 읽는 데 그치지 않고 기계에 마치 종이처럼 필기를 할 수 있게 하려고 한다. 종이는 기계에 유령처럼 남아 있다. 우리는 종이의 광팬이고 종이 근본주의자들이다. 종이가 없을 때에도, 종이가 필요 없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증명되었을 때조차도, 우리는 계속 종이를 상상하고 존중하고 종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일례로, 내가 지금 타이핑 하고 있는 워드프로세서 문서는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하얀 종이 모양으로 생겼다. 화면 구석에는 휴지통 모양의 이미지가 있다. 문서에는 여백이 있고 문단이 있다. ‘쪽’ 아래에 있는 ‘쪽 수’가 지금 이 자리가 ‘4쪽’이라고 일러준다. 왜 그럴까? 화면 너머 어딘가에 거대한 종이 공장이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건가? 내 컴퓨터의 ‘월페이퍼’(바탕화면)에는 안개에 덮인 산봉우리 그림이 있다. 상상의 벽에 벽화를 그린 것, 혹은 커다란 사진을 붙여놓은 것 같다. ‘종이 시대의 종언’의 최대 아이러니는 종이의 이미지가 사방으로 확산되며, 그것이 여전히 우리가 읽고 쓰는 방식을 결정짓는다는 점이다. 종이가 언어 자체의 은유로 적절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도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어를 종이에 비유할 수 있다. 뜻은 앞면, 소리는 뒷면이다. 종이 뒷면을 자르지 않고 앞면을 자를 수는 없듯이 언어에서도 뜻에서 소리를 떼어내거나 소리에서 뜻을 분리할 수는 없다. 추상적으로만 분리가 가능한데 이렇게 나눈 것은 순수한 심리학이나 순수한 음성학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사고에서 종이를, 혹은 종이에서 우리의 사고를 떼어내거나 분리할 수도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변한다. 언어도 변한다. 그러나 종이는 그대로이다. 종이는 뭐든 흡수할 수 있고 무엇에든 흡수될 수 있다. 오늘날 가장 잘나가는 최첨단 기기도 종이와 닮은꼴이다. 아이패드는 공책을, 킨들은 책을, 휴대전화는 수첩을 닮았다. 읽기의 리듬도 여전히 ‘쪽’을 기준으로 삼는다. 내 킨들에서는 낮이 가고 밤이 오듯 1쪽 뒤에 2쪽이 온다. 종이의 유령은 내가 읽는 것의 색깔까지 정한다. 종이 때문이 아니라면 왜 하필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이겠는가?
종이가 끝없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종이는 불태워지고, 분실되고, 폐기되고, 버려지고, 재발견되고, 복원되고, 되살려진다. 그럼에도 학술 연구에서 종이는 별로 중요하지도, 꼭 필요하지도 않은 주제로 여겨서 전문 잡지나 서적이 아니면 딱히 다루지 않는다.(일본어에는 요코가미야부리横紙破り라는 관용구가 있다. 종이의 결과 다르게 찢는다는 뜻인데, ‘비뚤어짐’ 혹은 ‘억지스러움’이라는 뜻을 지닌다. 종이를 무시하는 사람은 비뚤어진 사람, 순리를 거스르는 사람이다.) 종이는 워낙 일상적으로 쓰이는 인공물이라 그런지 종이에 대한 대중 역사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여러 형태를 띤 종이의 역사를 더듬어 조금이나마 복원하려고 한다.
중요한 일은 모두 종이 위에서 일어난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해 종이의 역사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개인적 취향에 따라 기획된 종이 박물관에 가까울 듯싶다. 박물관의 기념품 가게나 상상의 박물관이라고 하는 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상상의 박물관이라는 표현은 앙드레 말로에게 빌린 것이다. 말로는 소설가이자 예술사가이자, 이게 프랑스의 독특한 점인데, 1959년에서 1969년까지 문화부장관이기도 했다. 말로는 요즘 사람들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상당수가 원래는 예술로 취급되지 않았고 토템이나 부적, 신의 형상이나 현현 등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말로가 『상상의 박물관』(전 3권, 1952~1954)에 쓴 말을 빌면 “17세기에는 송나라 회화와 푸생의 작품을 견줄 수 없었다. 그랬다면 ‘이상하게 생긴’ 풍경을 고귀한 예술품과 비교하는 꼴이었을 것이다.” 말로에 따르면 상상의 박물관은 “변신의 노래”이며 “창조에 맞서 우주를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줄곧 예술로 여겨지던 것들뿐 아니라, 예술이라 불릴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찬미다. 따라서 종이 박물관에는 찰스 디킨스의 육필 원고가, 파란 색종이나 노끈으로 묶은 갈색 소포 종이와 나란히 놓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자신과 세계를 들여다보는 광대한 종이 거울이 생긴다. 거대하고, 끔찍하고, 경이로운.
분명히 해두자면 종이의 역사는, 특히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엄밀히 말해 종이의 역사라 할 수 없는 종이의 역사는, 책의 역사나 글쓰기의 역사와 같을 수 없다. 이런 것들의 역사는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당연하지만 종이 이전에도 글쓰기가 있었다. 자작나무 껍질, 점토판, 상아, 나무, 벼, 파피루스, 야자 잎, 비단 등에 썼다. 종이가 생긴 뒤에도 글쓰기가 있었고. 이 책은 책에 관한 책은 아니다. 책이 종이로 만든 물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물건이기는 하지만. 이 책은 종이 제조에 관한 책도 아니다. 종이 제조도 광대하고 흥미로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이 책은 우리가 왜, 어떻게 종이에 밀착되고 접합되고 봉합되어 우리 존재 자체가 종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보이고자 한다.
중요한 일은 모두 종이 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종이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태어나면 출생증명서가 나온다. 학교에서 이런 증명서를 더 모으고, 결혼할 때 한 장 더 생기고, 이혼할 때 또 생기고, 집을 사거나 죽을 때도 생긴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지만 끝없이 종이가 되고, 종이가 우리가 되고, 우리의 인공 피부가 된다. 우리의 존재가 곧 종이다. 종이는 행동의 바탕이고 우리가 하는 일의 동반자고 과거를 이해하는 열쇠다. 우리는 어떻게 과거를 알 수 있나? 종이와 종이에 쓰인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물론 건축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건축은 종이에 상당히 의존한다. 그러니까 종이가 벽돌을 감싼다.
이 책에서 나는 종이가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비애감과 옛날 종이를 그리워하는 향수의 존재를 인지한다. 예전 종이의 두께감과 묵직함, 젊음의 이상이 담긴 너덜너덜해진 포스터들. 우리의 역사를 대변하는 이런 종잇조각이 점점 낡고 희귀해진다는 것. 한편 무엇보다도 종이의 역설, 종이의 쓰임에 내포된 아이러니, 이중적 의미, 가치, 광활한 범위와 규모를 다룰 참이다. 종이 한 조각이 (그림이거나 육필 원고일 때에)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유물일 수도 있고 휴지 조각일 수도 있다는 사실.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올 수도, 나쁜 소식을 퍼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 연애편지일 수도, 자살한 사람의 유서일 수도 있다. 종이는 뜻을 전달하기에 적당하면서 생각을 담기에는 부족하다. 종이는 생각보다 앞서지만 생각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이에 기억을 저장하는 한편 종이만 믿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종이는 실체는 보잘것없어도 그 안에 의미를 가득 담는다. 물질이면서 환영이다. 망가지기 쉽지만 영속적이다.(그래서 잃어버린 원고 이야기가 흔하다. 토머스 칼라일의 『프랑스혁명The French Revolution』의 첫 권 원고를 하녀가 불쏘시개로 써버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한편 토머스 드 퀸시는 “침실 양초 불똥이 나도 모르는 사이 종이 더미에 떨어져서”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의 초안을 잃었다. 앨프리드 테니슨은 『서정 시집Poems, Chiefly Lyrical』 원고를 구멍 뚫린 코트 주머니에 넣는 바람에 잃어버렸다.) 종이는 연약하지만 날카로워 자칫하면 손을 베일 수도 있다. 덧없으면서 영원하다.(바이런은 「돈 주앙Don Juan」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노년은 연약한 인간을 얼마나 궁지에 몰아넣는가 / 종이는, 이런 휴지 조각 같은 것조차도 / 그 사람보다, 그의 무덤보다, 그의 물건 어느 것보다 더 오래 남는데.”) 종이는 모든 것이며 아무것도 아니다. 궁극의 맥거핀2)이다. 신비스럽게도 우리 존재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고, 표층을 벗어나 상상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며, 더 깊이 보면 앙리 베르그송이 “삶의 심연의 끊임없는 웅웅거림”이라고 부른 것으로 넘어가는 문턱이다.
종이에 담긴 최대의 아이러니는 뭘까? 종이의 가장 큰 마력은? 바로 이런 점이다. 종이는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존재할 수 있게, 혹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시간과 거리를 무너뜨리고 가로지른다. 예를 들자면 지금 나는 종이 위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러분은 나를 볼 수 없고 내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어쩌면 나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펜을 종이에 가져다 대는 신비한 행위를 통해, 그리고 여러분의 인내심 있는 독서를 통해,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환상이 생겨났다. 종이 위에 음성이 있고, 나는 종이 위의 음성 속으로 사라진다. 종이가 나를 만들어내고, 드러내고, 또 지운다. 온전한 드러남. 완벽한 위장. 윌리엄 골딩의 소설 『자유낙하Free Fall』(1959)에서 화자는 독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똑딱거린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당신이 읽고 있는 검은 거멀못들의 45센티미터 위에 자리 잡았다. 나는 당신 자리에 있고, 나는 유골함에 갇힌 채로 흰 종이에 나를 매어놓으려 한다. 거멀못들이 우리를 한데 묶어주고, 아무리 열정이 넘쳐도 우리가 함께 느끼는 것은 오직 절연감뿐이다.” 나는 여기에 있다. 내가 그곳으로 간다.
이 책에서는 종이의 기술적·물질적 역사도 이야기하지만 상징적 역사, 혹은 상징의 역사라는 면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종이는 어떻게 거룩하게 여겨지고 신성시되고 물신화되었는가. 종이는 어떻게 자유를 약속하고 부여하며 분명한 한계 또한 부과하는가. 안타깝지만 이 책에 없는 종이도 많다. 이를 테면 데쿠파주3)나 시험지나 악보나 카드 게임은 다루지 않을 것이다. 온라인에서라면 이런 한계가 없을 것이다. 클릭만 하면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으니.(검색하고 싶어지는, 종이와 관련된 몇 가지 단어와 개념들을 나열해보자. 파피에 푸드레papier poudre(화장용 기름종이), 파피요트papillote(고기, 생선 등을 싸는 기름종이나 은박지), 파페테리papeterie(문구함), 종이 목사[집필 활동 등만 하고 예배를 집전하지 않는 목사], 종이 죽 해골, 종이 시대, 종이 시멘트 등 무한한 잡동사니의 역사가 있다.) 차마 건드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와 형태의 종이가 있다. 일본 종이만 봐도, 잘 알려지지 않은 보물이 수백 종은 있다. 히키아와세引き合わせ는 무사의 흉갑 안쪽에 바르던 종이고 호소가와시細川紙는 정부의 땅문서에 쓰였다. 시부가미渋紙는 감물을 먹인 종이로, 곡물 보관용 자루를 만드는 데 썼다. 또 인력거꾼이 입던 종이 누빔 옷, 약봉지, 기모노 포장지 등도 있다. 서로 다른 재질의 종이가 내는 소리, 냄새. 사무실용 대형 프린터에서 나는 암모니아 냄새. 아무리 모아도 컬렉션이 완성될 수는 없다. 그래도 시작은 했다.
우리는 종이로 된 세상에 사는, 종이로 된 사람이다. 살바도르 플라센시아의 『종이로 만든 사람들』(2005)이라는 소설은 종이에 관한, 종이로 된 걸작이다. 이 작품에서 안토니아라는 수도승은 “최초의 오리가미 외과 의사”가 된다. 안토니오는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교단에서 파문당하고 추방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바퀴 손수레에 판지, 냅킨, 책 등을 가득 담아 밀고 홀로 공장 안으로 들어가 틀어박힌다.
안토니오는 책등을 쪼개 오스틴과 세르반테스를 낱장으로 뜯어내고 레위기와 사사기에서 책장을 들어내어 모두 『백열광의 서The Book of Incandescent Light』의 책장과 뒤섞었다. 그런 다음 포장지와 종이 공작용 색판지를 풀어서 마분지를 칼로 오리고 접기 시작했다. 그녀가 맨 처음 만들어졌다. 마분지 다리, 셀로판지로 만든 충수, 종이 가슴을 지녔다. 남자의 갈비뼈가 아니라 종잇조각으로 만들어진 인간.
이 놀라운 피조물이 안토니오의 작업대에서 일어나, 지쳐 죽어가는 창조주를 넘어서, 세상 밖으로 나간다.
이제 그녀의 손을 잡고 종이 박물관에 들어가 보자.
* 주
1) 라수스Orlandus Lassus(1532~1594) : 네덜란드의 작곡가로 많은 대중음악과 종교 음악을 작곡했다.
2) 히치콕 감독 영화에서 기원한 말로, 청중의 주의를 끌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실제 스토리 라인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서사적 장치.
3) 색종이를 오려 붙여 물건을 장식하는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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