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동백꽃>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는 봄의 전령사, 생강나무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김유정(1908~1937)은 이상과 함께 젊은 나이에 요절한 대표적인 문학인이다. 1937년 30세의 나이를 다 채우지 못하고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시인 이상도 같은 해 역시 폐결핵으로 27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사망했다.
짧은 생애였지만 김유정은 1930년대 한국소설에서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소설에는 <동백꽃>의 눈치 없는 총각, <봄봄>의 데릴사위와 같이 우직하고 순박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과 토속적인 속어와 비어 등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풀어낸 것이 김유정 소설의 특징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지금 읽어도 하나하나가 생생하고 재미있다. 이런 점이 잘 어우러져 그의 소설을 읽으면 ‘해학’이 무엇인지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동백꽃>, <봄봄>외에도 <소낙비>, <금 따는 콩밭>, <만무방>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동백꽃>은 김유정이 죽기 1년 전인 1936년 잡지《조광朝光》에 발표한 작품이다. 마름과 소작인으로 다른 계층에 속하는 사춘기 남녀가 ‘노란 동백꽃’ 피는 농촌을 배경으로 사랑에 눈뜨는 과정을 다루었다. 눈치 없는 남자 주인공이 점순이의 애정 표시를 알아차리지 못해 당하는 갖가지 곤욕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동백꽃>을 처음 읽은 우리 둘째 딸도 점순이의 애정 표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는 왜 점순이가 자꾸 수탉을 데려와 남자 주인공네 닭과 싸움을 붙이며 못살게 구는지, 왜 자꾸 감자 같은 것을 주면서 거절하면 화를 내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학생이 된 어느 날, 빙긋이 웃으며 “왜 점순이가 ‘나’를 못살게 굴었는지 이제 알겠어요”라고 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둘이 동백꽃 속으로 넘어지는 장면도 “처음에는 그냥 손을 잘못 짚어 넘어지는 줄 알았어요”라고 해서 우리 가족들이 한바탕 웃은 적이 있다.
그런데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을 읽다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노란 동백꽃’이 나오는 것이다.
거지반 집에 다 내려와서 나는 호드기 소리를 듣고 발이 딱 멈추었다. 산기슭에 늘려 있는 굵은 바윗돌 틈에 노란 동백꽃이 소보록하니 깔렸다. 그 틈에 끼어 앉아서 점순이가 청승맞게스리 호들기를 불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놀란 것은 그 앞에서 또 푸드득, 푸드득, 하고 들리는 닭의 횃소리다. 필연코 요년이 나의 약을 올리느라고 또 닭을 집어내다가 내가 내려올 길목에다 쌈을 시켜 놓고……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첫 번째 글은 남자 주인공이 산에서 나무를 해서 내려오는데 점순이가 호드기(버들피리)를 불면서 닭쌈을 붙이는 것을 목격하는 장면이고, 두 번째는 마지막 부분으로, 점순이가 ‘나’를 떠밀어 동백꽃 속으로 쓰러지는 마지막 장면이다.
작가는 왜 붉은 것이 대부분이고 어쩌다 흰 꽃이 있는 정도인 동백꽃을 노란 동백꽃으로 표현했을까. 김유정이 잘못 묘사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고향인 강원도에 노란 색 동백꽃이 실제로 있는 것일까.
‘노란 동백꽃’의 실제 이름은?
답은 둘 다 아니다. 김유정이 말한 '동백'은 일반적인 상록수 '동백나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나무는 강원도에서 ‘생강나무’를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강원도에서는 오래전부터 생강나무를 ‘동백나무’ 또는 ‘동박나무’로 불렀다고 한다. 원도 춘천 사람인 김유정은 이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대중가요 <소양강 처녀>의 2절을 보자.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로 시작한다. 여기서 나오는 동백꽃도 ‘생강나무꽃’을 가리키는 것이다. <강원도아리랑>에 나오는 ‘열라는 콩팥은 왜 아니 열고, 아주까리 동백은 왜 여는가’에 나오는 동백도 역시 생강나무를 뜻한다고 한다. 붉은 꽃이 피는 동백나무가 자라지 않는 중부 이북 지방에서는 생강나무의 열매로 기름을 짜서 동백기름 대신 머릿기름으로 사용했다. 이 때문에 생강나무를 동백나무로 부른다는 것이다.
김유정 문학촌 전시관에 있는 <동백꽃> 표지 사진. 동백꽃을 붉게 그려놓았다. |
이런 점을 모르고 1990년대까지도 김유정의 소설집 표지를 붉은색 동백꽃으로 그린 출판사가 있었다. 김유정 고향마을에 조성해 놓은 김유정 문학촌 전시관에는 표지에 붉은 동백꽃을 그려놓은 김유정 책이 두 권이나 있었다.
생강나무는 잎을 비비거나 가지를 자르면 생강 냄새가 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꽃이 필 때면 특유의 향기가 퍼지기 때문에 우리는 근처에 생강나무가 있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 수 있다.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도 바로 생강 냄새를 가리키는 것이다. 생강이 아주 귀하던 시절에는 이 나뭇잎을 가루로 만들어 생강 대신 쓰기도 했다.
생강나무는 가을에는 동물 발바닥 모양으로 생긴 잎이 샛노란 빛깔로 물들어 붉게 물든 가을 산에 포인트를 준다. 열매는 처음에는 초록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했다가 늦가을엔 다시 검은색으로 변하는 등 색깔이 세 번 변한다. 까맣게 익은 열매와 노랗게 물든 잎이 어울려 보기 좋다.
생강나무 |
김유정역, 김유정로, 봄봄 막걸리
김유정의 고향이자 소설 <동백꽃>의 배경 마을인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실레마을에는 ‘김유정 문학촌’이 있다. 고증을 거쳐 김유정 생가를 복원해놓았고, 마당에는 소설에서 점순이가 닭싸움을 붙이는 장면을 조각상으로 만들어놓았다. 둘째 딸은 이곳에 많이 심어놓은 생강나무를 보더니 “여기로 넘어졌으면 아팠겠다”라고 했다. 개나리라면 몰라도 생강나무는 나뭇가지에 꽃이 피기 때문에 꽃 속에 ‘폭 파묻혀 버렸다’라는 표현을 쓰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표현을 했는지 의문이다. 경춘선 ‘김유정역’에서 문학촌으로 들어가는 길목 가로수로도 작은 생강나무들을 줄줄이 심어놓았다. 나무가 더 자라면 가을 단풍이 멋있을 것 같았다.
실레마을 주변에는 김유정 문학촌 외에도 ‘김유정’이란 이름이 들어간 명칭이 많다. 서울~춘천 고속도로 남춘천 나들목을 빠져나오면 나오는 길이 ‘김유정로’이고, 현재 전철 개통으로 새롭게 변한 경춘선 ‘김유정역’도 있다. 김유정역은 2004년 경춘선 신남역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사람 이름을 역 이름으로 쓰는 곳은 우리나라에서 이곳이 처음이다.
실레마을을 감싸고 있는 금병산(해발 652미터)은 곳곳이 김유정 작품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를 기리기 위해 금병산에는 ‘봄봄길’, ‘만무방길’ 같이 김유정의 작품 이름을 따서 만든 등산로가 있다. 산 정상에서 춘천 시내를 내려다보며 능선을 타고 내려가는 길이 ‘동백꽃길’이다. 능선길에서는 생강나무를 흔히 볼 수 있다.
금병산 등산을 마치고 김유정 문학촌 입구 춘천닭갈비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 집에서는 춘천에서 만든 ‘봄봄 먹걸리’를 팔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제비들이 그 음식점 안에 집을 지어놓고 수시로 드나들고 있었다. 주인은 그런 제비들을 위해 문을 열어놓고 영업을 했다. 난 술을 잘 못 마시지만 이런 모습들을 보자 막걸리 생각이 절로 났다. ‘봄봄 막걸리’는 정말 톡 쏘는 알싸한 맛이 났다.
산수유 |
봄의 전령사, 생강나무와 산수유를 구분하는 방법은?
생강나무와 산수유는 둘 다 아직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초봄에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는 봄의 전령사들이다. 그런데 둘이 비슷한 시기에 노란 꽃봉오리를 내밀기 때문에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멀리서 보면 거의 비슷해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나 산수유와 생강나무는 전혀 다른 나무다. 생강나무는 녹나무과이고 산수유는 층층나무과로 분류도 다르다. 생강나무는 줄기에 딱 붙어 짧은 꽃들이 뭉쳐 피지만, 산수유는 긴 꽃자루 끝에 노란꽃이 하나씩 핀 것이 모여있는 형태다. 색깔도 산수유가 샛노란 색인 반면 생강나무는 연두색이 약간 들어간 노란색으로 좀 다르다. 또 생강나무는 줄기가 비교적 매끈하지만 산수유 줄기는 껍질이 벗겨져 지저분해 보인다.
꽃 필때가 지나면 두 나무를 구분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나중에 잎이 나는 것을 보면, 산수유 잎은 긴 타원형이지만, 생강나무 잎은 동물 발바닥 모양이다. 가을에 생강나무는 동그란 까만 열매가 열리고 산수유는 타원형인 빨간 열매가 열리는 점도 다르다.
생강나무는 산에서 자생하고, 산수유는 대부분 사람이 심는 것이기 때문에 산에서 만나는 것은 생강나무, 공원 등 사람이 가꾼 곳에 있는 나무는 산수유라고 봐도 무방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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