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붙이는 말
글쓰기 뒤에 덧붙이는 글쓰기. 묻지 않고 남겨둔 질문을 던지기 위해 글쓰기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를 묻기. 중뿔나게 괜히 그래 보는 것.
자기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은 그 삶을 이루는 순간순간들을 맞이하며 전진하는 것, 삶의 모자이크를 이루는 조각들을 만나러 가는 것. 모자이크 조각들마다 제가끔 하나의 현존을 필요로 한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 그것은 이 순간순간들을 기억하는 것, 모자이크의 수많은 다른 조각들을 기억하는 것, 이미 멀어져 기억 속에서 서로서로에게 색깔을 입혀주고 있는 조각들을 모아주는 것, 그것은 똑같은 현존이 거기에 다시 있다는 점. 적어도 이는 조심성 있는 가설이다.
이 이야기를 풀어놓는 동안 이 가설은 반박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좀더 세심하게 그 가설을 검증해보면 여기엔 반박의 여지가 매우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하나인 후고 폰 호프만슈탈은 그가 쓴 「시간의 흐름 위에 드리운 난막卵膜」에서 이렇게 썼다. “그것은 아무도 끝까지 생각할 수 없는 일. 그리고 너무 무서워 감히 불평도 못하고 모든 것이 미끄러져 와르르 무너지는 일.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나의 자아는, 내겐 마치 강아지같이 불안스럽고 소리 없고 낯선 어린아이로부터 출발하여, 미끄러지듯이 여기까지 왔다.”
삶이 길수록 그것이 스스로에게 환기喚起를 허용하는 바는 더더욱 산만해진다. 그러나 삶은 길어지면서 또 다른 결과를 자아낸다. 장 폴 사르트르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처럼 실존은 본질에 선행할 뿐만 아니라 실존은 지속되면서 본질을 형성하고, 빚어내고, 조탁하고, 단순화한다. 우여곡절을 거쳐 최종 목적지에 다다른 삶은 마침내 그 축을 드러내고야 만다.
그러면 우리는 비로소 뒤를 돌아볼 수 있고, 긴 시야 속에서 드러난 것의 주된 색을, 들은 것의 주된 음을 찾을 수 있다. 그런 색과 그런 음은 우리 각자에게서 체험한 것과 하고 싶었던 것 사이의 뜻밖의 만남에 의해 만들어진다. 내게 그려지는 형상은 중재자의 형상이다.
중재자라는 표현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특별한 모험적 사건이 내게 이 칭호를 허용해주었다.
모든 것은 1996년 부활절에 시작되었다. ‘불법체류자’ 아프리카인 300명이 파리의 생탕브루아즈 성당을 점거하고 신분보장(정규 체류증 발급)을 요구했다. 그들은 자신이 신분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밀입국자도 노숙자도 아니며, 이민자들에게 강요된 부조리한 입법의 피해자다. 그 입법은 ‘인권의 나라’ 프랑스에 합당치 않은 법이다.”
그렇다. 하지만 성당을 점거하다니? 그것도 비위생적인 조건에서! 가톨릭교회 고위층은 불안해했다. 미사 장소인 이곳을 점거한 이들을 내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아프리카인들은 어느 중학교에 들어가 시위를 했다.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용감하고 통 큰 한 여성이 개입했다. 인도주의적 대의를 위한 투쟁에 항상 모습을 보이는 여성이었
다. 뱅센 숲[파리 동남쪽 교외에 있는 큰 숲]의 카르투슈리에서 공연하는 태양극단(테아트르 뒤 솔레유)의 단장 아리안 므누슈킨이었다. 그녀는 녹지공간이자 창작의 공간인 이 극장을 이들에게 열흘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시민행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인사들로 하여금 이 아프리카인들의 주장에 동참하는 행진을 하도록 주선했다. 이 25명의 친구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예견한 그녀는 이 행진에 이름을 붙였다. ‘중재자 동아리’였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내 나이와 ‘종신 프랑스 대사’라는 칭호 때문에 나는 이‘ 중재자 동아리’의 대변인이 되었다.
『타르튀프』[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의 희곡 작품]의 간소하면서 우아한 무대를 배경으로 극장의 계단식 객석을 마주보며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기자회견을 주도한 사람은 노엘 코팽이었고, 동참한 사람은 제르맨 티용, 로랑 슈바르츠, 뤼시 오브락, 레몽 오브락, 폴 리쾨르, 에드가 모랭, 폴 부셰, 자클린 코스타 라스쿠, 상기네티 제독, 장 피에르 베르낭,
모니크 슈밀리에 장드로, 베르조노 신부, 코스트 신부, 마들랭 신부, 루이 슈바이처 목사, 그리고 나였다.
극장 객석에는 당사자인 아프리카인 가족들, 빽빽 울어대는 그들의 아기들, 그들의 의견발표를 위임받은 점잖고 사뭇 긴장한 대표들, MRAP*, GISTI**, CIMADE***, 드루아 드방droit devant[곧장 앞으로] 등 이 아프리카인들을 후원하는 여러 단체의 대표자들, 가이요 대주교, 레옹 슈바르첸베르 등이 앉아 있었다. 아리안 므누슈킨은 넓은 공연장의 한 모퉁이에서 동참한 모든 이에게 따스한 인간적 온기와 마실 것을 나눠주고 있었다.
* Mouvement contre le racisme et pour l’mitie entre les peuples, 인종차별 반대, 민족 간 우
정 증진 운동.
** Groupe d’nformation et de soutien des immigres, 이민자 안내 후원그룹.
*** Comite inter-mouvements aupres des evacues, 내쫓긴 사람들 돕기 운동 위원회.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설명했다. 전반적인 신분보장은 배제되었다. 사례별로 상황을 검토하여 최대한의 결과를 얻어내야 했다. 하지만 또한 좀더 일반적인 문제, 즉 프랑스와 유럽의 이민 관행이 입법·행정·사법 모든 면에서 비인간적이고 부조리하다는 문제제기도 해야 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나와 절친한 친구들이며 그중 몇몇은 내 삶의 여러 시기에 나의 본보기나 상징이 되어준 이들인데, 이들은 어떤 유의 중재자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함께 힘을 합치면 이 문제의 해결에 얼마만한 무게를 실어줄 수 있을까?
바로 이때, 최소한의 신뢰성을 찾는 고단하고 꽤나 비장한 여정이 시작된다. 우선 아프리카인들에게 신뢰를 얻고, 또 그들을 위해, 그들과 더불어, 전반적 신분보장을 요구하고 그들을 후원하는 여러 단체의 신뢰를 얻는 것. 그다음에는 당국자들의 신뢰를 얻는 것. 당국자들은 중재자를 원치 않으며 웬만하면 현행 절차를 그대로 고착시켜 법률상 인정되는 범주에 드는 사람들에게만 체류증을 발급하려 한다. 법률상 인정되는 사람들이란, 프랑스 국적을 지닌 아동의 외국인 부모를 말한다. 그 이상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이 ‘흡인장치’를 촉발하고, 그러면 남쪽에서 몰려온 ‘떼거리’들의 프랑스 ‘침략’ 예비단계가 되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가능한 한 활짝 열린, 그러나 문안과는 양립할 수 없는 중간적 입장을 취했다. 각 사례별로 신분보장을 하되 그 완급과 기준을 제대로 하여 프랑스 사회에 통합될 의사와 능력을 보이는 사람은 모두 지속적으로 프랑스 사회에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인 대표자들은 다른 전망이 없으니 이러한 해법으로 가기 위해 우리의 도움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만큼 그들의 첫 목표는 자기들끼리의 결속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뱅센 숲에 자리한 이 극장을 떠나야만 하게 되어, 그들은 파리의 동東역 부근에 있는 철도청 화물창고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민주노동동맹CFDT의 노조원인 철도청 직원들이 불법으로 이 창고의 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우리를 중재자로 받아들이도록 공권력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하게끔 강제하는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들의 지지 행동과 대언론 발표문에 힘입어 우리는 드디어 그 일이 성취되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총리의 최측근인 협력자들이 우리를 맞아 회합을 갖기로 결정한 날이었다. 그들이 우리와 합의한 사항은 누가 보아도 우리의 기준과 속히 해법을 찾고자 하는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이 해결책으로도 제외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해 당사자인 불법체류자 중에서도 극히 일부여야만 했다. 그런 사람들은 원래 살던 나라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 경우는 재정착을 위한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법적 중재자는 아니더라도 실질적 중재자가 된 우리는 이 일을 총괄적으로 중앙에서 이끌어갈 책임을 지는 경찰청 측 협력자들의 집중적이고 신속한 작업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과업은 근 300종의 서류를 제출하여 ‘호의적’ 검토를 받게 하는 일이었다. 경찰청장은 우리에게 200여 개의 호출장을 보냈고, 우리는 이를 5월 24일 저녁에 아프리카인들에게 보냈다. 그들은 이 200장이 200명의 신분을 보장하겠다는 신호이기를 바라며 너도나도 손을 내밀었다. 그날 저녁, 파졸 거리의 어둠침침한 창고에서 사람들은 격앙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미 8일 전에 단식투쟁을 시작했고, 우리에겐 특히 이것이 걱정거리였다.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단식에 돌입했고 자원봉사단체인 ‘세계의 의사들’ 협회는 긴장된 분위기에서 이를 일시적으로 막아보려 했다. 극렬 투쟁단체들은 우리의 방식이 너무 순진하고 비효율적이라며 문제 삼았다. 아프리카인들 중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가두시위에 들어가겠다며 위협적인 몸짓을 보였다. 온건파가 이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인가?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파업이 끝났다는 것, 그리고 대화가 시작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의 중재는 가장 중요한 단계를 넘어섰단 말인가? 갈등이 평정되게 한 우리의 공헌을 치하하는 총리실 보좌관들이 경찰청에서 내줄 신분보장 제안사항에 대해 우리에게 예고해주기로 합의되어 있었다. 며칠이 흘러갔다. 아프리카인들은 조바심을 냈다. 그들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당국이 자신들에 관해 모든 정보를 알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그 정보 중에는, 당국이 언제든 아프리카인들을 체포하여 신분이 불확실할 경우 ‘차터’기[비정기적 전세기] 편으로 고국으로 송환시키게 만들 수 있는 자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체 중 몇 퍼센트가 신분보장을 받게 되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이들이 제출한 서류 중 4분의 3이 검토된 것인가? 5분의 4?
나는 전화기에 매달려 당장 총리공관에서 결정적 의논의 자리를 갖자고 주장했다. 경찰청의 제안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총리에게서 지금보다는 확실히 좀더 관용적인 정치적 제스처를 얻어내자는 의도였다. 요컨대 우리가 중재자 노릇을 맡은 이상 뭔가 끝을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추락은 고통스러웠다. 나는 6월 26일 11시에 총리의 일에 협력하는 사람들과 만나자는 전화 제안을 받았다. 바로 당일 정오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정말 운이 억세게도 좋아 중재자들 중 일곱 명은 풀려났고, 우리는 총리공관에 다시 모여 그토록 고대하던 논의를 시작했다.
이때 검토된 아프리카인들의 사례 중 정규 체류 자격을 부여받는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비율이 15퍼센트 미만이라는 통보에 우리는 격하게 반응했다. 그런 결정은 받아들일 수 없다, 들고일어난 아프리카인들을 도저히 평정시킬 수 없게 만드는 결정이다, 어느 모로 보나 신중한 기준에 부합하는 결정이 아니다, 우리와 협력하여 이 결정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이런 미미한 결과 이상의 것을 얻어내기로 굳게 결심하고 총리공관을 나왔다.
그런데 12시 15분, 우리가 총리의 협력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AFP 통신은 내무부장관의 공식 발표문을 내보냈다. 그 발표문에 따르면 이번에 검토를 거쳐 정규 체류가 확정된 48건 중 단 22건만이 파졸 거리에서 시위에 참여한 ‘우리의’ 아프리카인들 사례라는 것이었다. 이 22건 외의 여타 ‘불법체류자’들은 누구도 프랑스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염치없는 속임수에 넘어간 셈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프랑스 대통령에게 직접 호소하는 것뿐이었다. 아니면 공적으로 중재의 소임을 띤 다른 주체를 찾아 그때까지 시도했던 일을 다시 시작하든가.
우리는 다시금 뱅센 숲의 카르투슈리, 전과 같은 장소인 태양극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의 실패와 분노를 널리 알리고 정부의 책임을 촉구하고자 했다. 이 기이한 ‘중재’작업의 고비마다 아내는 내내 나와 함께했다. 다른 사람들이 발표를 마치자 아내는 발언 신청을 하더니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
저는 중재자도 아니고 협회 회원도 아니며 그저 평범한 시민입니다. 중재자의 아내로서 저는 두 달 전부터 발생한 일을 묵묵히 지켜보았습니다. 관련 당국의 책임자들은 편안한 집무실에 앉아 자신들의 경력에─어쩌면 다가오는 선거에─신경을 쓰면서, 자기들이 잘 모르는 서류에 관해 태연하게 냉혹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들은 서류 내용을 모르고, 서류를 처리하는 것은 수하 직원들입니다. 직접 이 서류를 접하고 실무에 종사하는 분들은 그 헌신에 대해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분들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제출된 서류 하나하나마다, 한 사람의 이름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스칩니다. 그들은 복잡다단한 입법에 휘둘려 당황하고 절망합니다.
결정권을 쥔 공무원들, 파졸 거리의 창고에 가서 자신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에 관한 일을 맡아 해야 하는지 알아볼 정도의 호기심도 결코 가져본 적 없는 그들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두 달 동안 이 아프리카인 300명의 고뇌와 희망과 절망을 함께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이나마 그들을 알게 되었고 인간으로서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 속에서 그들의 연대와 존엄성과 억압, 선동적 담론이며 진화작업에 대한 저항을, 그들을 발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최악의 조건에서 그 어떤 출구조차 없어도 어린 자녀들을 돌보는 여성들을 만났습니다. 공포와 눈물 속에서도 뱃속의 아기를 잘 지키는 임신부들을 보았습니다. 같은 여자이기에 저는 그들의 고통을 공유하며 그들의 용기에 감탄합니다.
또한 저는 이 일에 뛰어들어 득될 것이 하나도 없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는 증명할 길 없는 중재자들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정체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관용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며, 또한 자신의 윤리에 따라, 자신들이 항상 지켜온 원칙의 이름으로 행동했습니다. 이들이 어떤 이들의 비판을 받는 것도 귀로 들었고, 그들보다 훨씬 용렬한 자들─결정권을 쥐고 있는 자들─에 의해 조롱당하는 것도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처럼 상처를 준다고 흔들릴 그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저는 한없이 씁쓸한 마음으로 그 아픔을 느낍니다.
여럿이 힘을 합친 세상에서 저는 남달리 헌신적이고 불굴의 의지를 지닌 특별한 분들을 발견했습니다. 반면에 좀더 혼란을 부추기는 역할, 좀더 선동적이고 어쩌면 좀더 정치적인 역할을 맡은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저는 불길한 장난을 하고 있다고, 그 장난의 피해자는 오직 아프리카인들뿐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아프리카인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많은 이들이 보이는 공감과 연대와 지칠 줄 모르는 지지를 당신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한번 실패했다 하여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절망의 순간을 겪어보았습니다. 때로는 이보다 더 심한 절망도 체험했습니다.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소말리아, 르완다, 부룬디 등지에서 이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상황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연대하여 길을 가고, 아낌없이 베푸는 행위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능케 합니다. 이런 것을 만났다면 타인에 대한 의무도 또한 생겨납니다. 아프리카인들은 출신 대륙인 아프리카에 대해 연대의식을 직접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텔레비전에 우프키르 장군의 딸이 프랑스에 와서 대담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대담자는 그녀에게, 왜 망명지로 프랑스를 택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감옥에 갇혀있을 때 자기는 프랑스라는 나라를 인권과 환대의 상징으로 꿈꾸었노라고. 저는 우리나라 프랑스가 그 가치를 되찾았으면 하는 꿈을 꿉니다.
내가 볼 때 크리스티안의 이 발언은 우리의 참여에 부여할 의미를 아주 잘 요약하고 있었다. 우리의 참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데 가치를 둔 참여였던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은 한 번 실패했다 하여 좌절하지 않았다. 모임 장소로 이용했던 카르투슈리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본당 신부인 쿠앵데 신부의 복음에 입각한 동의하에, 파리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인 ‘구트도르’ 동네 한복판에 있는 생베르나르 성당에 들어갔다. 시위 참가자 중 열 명은 아프리카인 대표자들의 충고도 ‘중재자’들의 만류도 듣지 않고 이곳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대단한 책임감과 불굴의 연대連帶의지로 이어온 이들의 싸움은 50일간 계속되었다. 8월 23일 1,100명의 경찰병력이 느닷없이 생베르나르 성당에 들어와 이곳을 점거하고 있던 시위자들을 끌어냈지만, 점점 더 꼬여만 가는 상황을 종료시키지는 못했다. 정부는 처음엔 신분보장 혜택을 받는 사람의 숫자를 두 배로 늘리면서 양보했지만 자의적 독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부에 굴하지 않고 계속 대항하는 아프리카인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모욕함으로써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6월에 형편없이 실패한 것 같았던 우리의 투쟁, 우리의 이른바 중재(중재 아닌 중재)는 프랑스와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불법체류자’ 집단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조금씩 일간지, 언론, 노조의 지지를 받았고, 지지하는 정치적 계층도 점점 늘어났다…….
이 원고를 탈고할 무렵에 겪은, 그래서 내게는 너무도 생생한 이 생 베르나르 성당의 ‘불법체류자’ 사건은 이처럼 내 평생 계속된 중재, 그 실패와 재도전 사이에서 내가 그간 체험한 관계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던 사건이다. 내 안 어딘가에 있는 중재자, 그는 결코 단념하지 않는다. 그 중재자가 불러일으킨 희망은 여러 차례 무산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 좌절 중 어떤 것은1 0일, 10년, 100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좌절 기간에 또 다른 희망이 생겨나며, 그 희망은 그 당시에 꺼져버린 희망보다 더 멀리 오래 지속된다. 이러한 새로운 균형의 전달자로 남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실존적인 선택이다.
그러고 보니 나의 탄생 별자리가 천칭자리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천칭’은 라틴어로 ‘리브라’livra다. 이는 의미심장한 어원이다. 프랑스어의 ‘리브르’livre(책)와 ‘리베르테’liberte(자유)가 모두 이 어원에서 파생된 단어다. 천칭이란 끊임없이 가부를 분별하고 무게를 재는 자의 상징인 것이다.
세 살 때 단호히 ‘카디’라는 이름을 선택함으로써 나는 이슬람 판관인 분쟁 중재자 ‘카디’의 소명에 나 자신을 내어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독일인으로 태어나 프랑스인이 된 나는 그 어떤 순간에도, 심지어 체포되어 심문당하는 힘겨운 순간에도 끊임없이 두 문화, 두 국민의 만남을 추구했다고 생각한다. 두 문화, 두 국민이 합쳐지면 과거의 폭력과 미래를 조건 짓는 균형 사이에서 잠재적 중재자가 될 것이다.
청소년기에 나를 매혹시킨 최초의 명작소설 『선택적 친화력』Wahl -verwandtschaften *을 읽으며 겸손하면서도 결정적인 등장인물을 만났는데 그에게 저자 괴테가 붙인 이름은 ‘미틀러’였다. 이 이름은 바로 이 ‘중재자’ 기능을 지칭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네 사람은 이 중재자로부터 이득을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미틀러의 중재는 실패하기 때문이다. 지혜보다 열정이 승한 미틀러는 비단 소설 속에서만이 아니라 작품을 넘어서도 좀더 자유롭고 조화로운 사회에 대한 요구를 상징한다.
* 독일 작가 괴테가 1809년에 발표한 비극적인 내용의 장편소설로, 원소끼리 선택적으로 끌어당겨 결합하고자 하는 화학작용을 인간관계에 적용시켜 그린 작품이다.
릴케가 쓴 모든 장시들 중에,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암송하는 시편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사이를 중재하려다 실패하는 헤르메스의 체험을 읊은 작품이다. 그 마지막 행은 이미 뿌리로 변해버린, 그리고 연인 오르페우스가 결국 못 참고 뒤돌아보자 ‘불확실하게, 부드럽게, 조바심치지 않고’ 지옥으로 되돌아가는 젊은 여인 에우리디케를 내내 지켜보는 헤르메스 신의 우울한 심정을 노래한다.
성공한 중재란 없다. 그러나 중재는 번번이, 그 실패를 통해 또 다른, 더욱 너른 중재의 길을 열어준다. 또 다른 중재도 역시 실패할 것이다. 이렇게 지치지 않고 이어지는 중재와 중재를 통해 우리 인류의 용감한 역사는 쓰이는 것이다.
1996년 8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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