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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락 노동 ─ 고통의 즐거움과 즐거움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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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늘날의 우리는 탈진할 때까지 일에 매진할까? 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기지 못하는 걸까? 그 이유가 궁금하다면 극단적으로 탈문맥화된 인간의 신체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겐 스토리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에서 그리고 감정과 공포에서 드러나며, 노동이나 향락의 관계에서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사회도 매우 특별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한편으로 자유롭지만, 다른 한편으로 성과 사회의 매우 엄격한 정언명령에 복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런 개별적이고 문화적 관련성을?신경학과 달리?고려한 학문이 바로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이다. 이 책은 그의 이론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이미 20세기 초에 사회의 충동 포기 요구로 인한 “문화적 신경증”을 간파했다. 우울증과 공포의 원인은 신경 흐름의 오류가 아니라 복잡하고 개인적인 억압기제에 있다는 것이 정신분석 이론의 가장 중요한 기본 인식 중 하나이다. “공포를 유발하는 신경회로에 대한 지식보다 공포의 심리적 이해가 덜 중요한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공포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프로이트는 그렇게 말했다.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모든 것이 “정상”이면 잘 작동하고 작동이 멈추면 약품이나 기술을 동원해 고칠 수 있는 논리정연하고 자율적이며 투명한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처음부터 흠집투성이의 존재이다. 인간은 타인에게 의존한다. 인간은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갈망한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애정 관계에서뿐 아니라 일에서도 탈진할 때까지 자신을 혹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런 욕망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타인과 관련이 있다.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좀 더 노력하면 가능할 거란 희망으로 인정에 대한 끝없는 야망을 불태운다.
타인에 대한 바로 이 필수적인 의존성은 한편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끝없는 절망으로 밀어 넣는다. 우리는 절대로 타인의 인정에 대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의 의심은 인간의 의지와 마찬가지로─우리의 삶의 에너지, 호기심, 성적 욕망, 야망, 창조력을 포함해서─근본적으로 떨쳐버릴 수 없는 이 같은 불안에서 기인한다. 우리들은 플라톤이 『향연』에서 묘사하듯 자신에게 만족하며 명랑하게 세상을 굴러다니는 다리 넷 팔 넷의 생명체가 아니다. 우리는 욕망하는 존재이다. 제우스가 둘로 갈라놓자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다니는 그들처럼 우리는 인정을 갈망한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말을 빌면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욕망을 남김없이 충족시킬 수는 없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쩌면 다행이다. 안 그러면 동기가 없어질 테니) 어느 정도의 긴장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탈진 증후군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타인에게 얼마나 과도한 신경을 쓰고 있는지, 따라서 사회의 인정 관계가 근본적으로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경쟁 사회에선 성공이 중요할 뿐 노동은 오로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우리의 노동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공허해지며 밀도 있는 자존감을 안겨주지 못한다. 나아가 노력과 평가의 관계마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의료 사회학자 요하네스 지그리스트Johannes Siegrist의 말대로 현재의 우리는 심각한 “만족의 위기”에 처해 있다. 관념적인 이유에서 혹은 전략적인 이유에서, 우리는 열악한 임금을 받거나 전혀 임금을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에 힘을 다 소진하면서도 이것이 모두 미래에 대한 투자이며 조만한 적절한 대가가 돌아올 것이라 희망하면서 대가 없는 실습과 연수, 직업 교육에 매달린다. 지그리스트가 스웨덴의 스트레스 전문가 퇴레스 테오렐Tores Theorell과 함께 주장했듯이, 결국 그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건강과 행복에 극단적인 결과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그 이전에는 헤겔과 마르크스)는 이렇게 중요한 상호 인정의 구조를 포착하여 그것을 자기 이론의 근거로 삼았다. 프로이트에게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 욕망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이 인정받고 싶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생산성과 에로틱한 욕망을 발전시키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불완전함과 의존성의 다른 측면은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이 역시 프로이트가 선구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은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 타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내던져진 자신의 상태에 대해, 그리고 갈망하는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할 때마다 냉기를 뿜어대는 허무에 대해 느끼는 불안이다. 신경학은 이런 불안에 대해서 실존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저 최대한 빨리 없애버리려고 할 뿐이다. 하지만 불안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기껏해야 잠시 가릴 수 있을 뿐이다. 불안은 과잉행동으로 도피하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행동은 허무로 이끌 뿐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완벽한 심리적 마비, 신체적, 정신적 “기력 소진”, 우울증의 완곡한 표현인 “탈진 증후군”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왜 오늘날 이처럼 초조하게 인정을 갈망하는 것일까? 그런 갈망의 원인이 어쩌면 노동 그 자체에 있는 걸까? 노동이 소외되어 자신의 본래적 존재를 반영하지 않기 때문일까? 인정에의 욕구는 어떤 지점에서 인정 중독으로 돌변하는가? 워커홀릭은 섹스를 위한 섹스가 아니라 오로지 카메라를 위해서만 섹스를 하는 포르노 배우와 얼마나 유사한가? 항상 누군가 우리를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그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할 것 같은 세속화된 “신의 눈”은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떤 상상 속의 타자인가?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놓아줄 수 있는 타자인가? 아니면 항상 우리를 못마땅해하는 독재자인가? 왜 워커홀릭은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탕진하는 걸까? 워커홀릭은 사도 바울의 말대로 신이 내리는 상을 얻기 위해 자기 몸을 부수는 금욕주의자와 얼마나 닮았을까? 웰니스 향락은 정말 행복에 도움이 되는 걸까?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인간에게는 항상 (실제건 상상이건 구체적이건 추상적이건) 인정을 바라고 관계를 맺는 상대가 있다. 이런 구조가 사유에도, 아니 무엇보다 사유에 해당된다는 사실은 고대의 철학자들이 밝혀놓았다. 플라톤의 『향연』에 의하면 사유란, 정신적 생식이며 따라서 항상 두 사람이 필요하다. 소크라테스는 산책길에 항상 대화 상대와 동행했다. 그의 철학은 진정한 의미에서 변증술의 철학, 한가로운 두 사람 사이에 성립하는 대화의 기술이었다.
“향락 노동”이란 말은 이런 배경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변증법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과도하지 않고 구체적이며, 순수하게 정신적이지 않고 항상 신체적이기도 하며, 쾌락 그리고 한가로움과 결합되어 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변증법적 사유의 성공은 자신뿐 아니라 타자의 힘에 좌우된다. 이런 타자는 인간일 수도 있고, 답을 찾겠다고 매달리지 않아도 꿈을 꿀 때면 나타나서 생각을 자극하고 영감을 주는 위대한 사랑의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신인 에로스일 수도 있다.
이 책은 향락 노동이 지니는 깊은 양가성을 조명한다.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침실로 가져간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소외되지 않은 노동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유토피아를 실현하고 있는가? 혹시 노동을 통한 즐거운 자아실현과 한시도 일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강박을 혼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향락은 사유와 어떤 관계가 있나? 왜 소크라테스는 먹고 마시면서 에로스에 대해 철학을 했는데, 하이데거는 조용히 사색에 잠기기 위해 굳이 산중 오두막에 들어가는 금욕적 태도를 취해야 했던가? 왜 오늘날의 우리가 과거 사람들보다 사유의 에로틱, 아니 에로틱 그 자체와 더 멀어진 것만 같은가? 한편으로는 충동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생각으로나 가능할 것 같은 각종 위반 행위를 멋지다고 칭송하는 사회에 사는 우리는 도대체 섹슈얼리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우리 사회의 포르노화는 어쩌면 우리가 근본적으로는 더 근엄해지고 더 금욕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속이기 위한 방편이 아닐까? 정말 우리는 탈터부화된, 철저하게 후안무치한 시대를 살고 있는 걸까? 혹은 스타들의 사생활을 노출하는 토크쇼나 “싼 것이 최고다!” 같은 슬로건은 우리가 예전보다 죄책감을 더 많이 느낀다는 증거가 아닐까? 세속화는 우리의 향락 행동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기술적-의학적 진보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우리가 우리 몸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고 마음대로 훈련하고 성형하고 변형할 수 있으며 자연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로 자유의 증대를 의미하는가? 신체의 탄력성,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몸이란 결국 사회 전반에서 요구되는 바로 그 기동성의 기형적 변형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 책은 이런 질문들에 대답을 찾으면서 지금의 성과 사회에서 강요된 자유, 자유로운 강제의 배경을 추적하고자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자유로운 세대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점점 더 부조리해져가는 성과의 요구와 마주하게 된다. 자기 책임과 자기 착취가 더해가는 시대에 우리가 원하는 것과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쉼 없는 행동과 강박적인 자기 최적화의 시대에 다시 “놓아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 다양한 형태의 놓아두기는 이용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목적의 자유, “무목적”의 자유이다. 모든 요구에 반사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때에만, 모든 가능성을 가능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박적으로 활용하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다. 그것은 풀어주고 들여보내고 존재하게 하는 자유, 무위의 자유, 중단과 여유, 놓아주기의 자유이다. 능동성 옆에 수동성을 가져올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우리가 사는 사회 그리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금욕과 방탕의 자리에 우리를 흥분시킬 향락이 들어서야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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