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왜 그런 모습으로
그 자리에 ‘만들었는가’
아마도 「대장금」 때문인 듯하다. 늘 임금과 그 주변 인물만 주인공이던 사극에 좀 만만한 인물들이 그 자리를 꿰차기 시작한 것은 분명 큰 변화였다. 역사는 이긴 자들의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결국은 좀 만만하다 싶은 인물들이라고 해 봐야 권력과는 어떤 식으로든 얽혀 있기 마련이지만, 정치 싸움이나 왕실 여인들의 질투만 있었을 것 같은 궁궐에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도 존재했다는 단순한 진리를 그제야 깨우친 셈이다. 그럴듯한 사건을 그럴듯한 스토리로 구성하는 것보다 무난한 일상을 다루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궁궐을 공부하는 내게 특히나 반가운 일은 궁궐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공간으로 비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늘 엄숙하고 진지하기만 한 일상만큼 재미없는 것도 없다. 궁궐은 종내 그런 느낌이었는데 비로소 그 속에도 애틋한 연애, 어처구니없는 실수, 유머, 유치함과 비겁함이 살아 있는 그저 평범한 공간임을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보여 주었던 이가 바로 장금이었다. 덕분에 한동안 어린 학생들과의 궁궐 답사는 온통 “장금이는 어디 살았어요?”로 도배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그런 식으로 궁궐은 슬며시 살아나고 있다. 엄격함과 위대함으로만 가득할 것 같은 궁궐이 삶의 현장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전각 뒷담을 돌아서면 궁녀와 궁관 들이 엄숙한 궁궐을 지탱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고, 온갖 잡다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을 세종 대왕과 장희빈의 인생보다 더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다.
건축 사학도에게는 ‘궁궐을 짓는 사람들’의 인생도 그런 식으로 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건축가’라는 서구적 혹은 현대적 개념이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지금의 건축가가 하는 직능은 아마도 여러 종류의 전문가들이 분담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 역사에서 이름이 알려진 건축 전문인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꽤 오래전에 감역관 박자청**에 대한 논고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가 아마도 조선시대 궁궐 건축에 관한 이러저러한 일을 한 지식층이었을 것이라는 점 정도를 알고 있을 뿐, 그의 인간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조선 후기의 의궤 자료들을 통해 건축 지식과 기술이 누구의 손에 놓여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 역시 만족스럽지는 않다. 오늘날의 건축가들이 궁궐 건축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그의 건축적 태도가 궁금한 것이기 때문이다. 창의적 전문인으로서 건축가를 상정하기 쉽지 않은 시대적 한계와 부족하기만 한 자료를 생각하면, 좀 더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누구일지 모를 그 건축 전문인에게 어떤 건물을 짓게 하려 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 근대적 의미의 건축가 개념을 조선시대에 대입하는 것은 무리이겠으나, 굳이 그 직능을 연간시켜 보자면 건축가의 직능은 지식인 건축주, 기술인 도편수, 그리고 지관 등으로 분산되어 있었을 것이다.
** 조선 초기의 무신 박자청은 조선 건국 즈음에 입직 군사로 궁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의 동생인 의안대군이 들어가려는 것을 왕명이 없다고 거절한 일로 태조의 눈에 들었다. 충실한 직무 수행으로 선공소감, 호익사대장군 등을 지냈다. 이후 태종 대에 주로 영선에 관한 일을 맡았다. 문묘, 모화관, 제릉, 건원릉 등의 공사에 관여했고, 경성수보도감제조를 맡아 도성을 수축하기도 했다. 세종 대에 참찬의정부사, 판우군도총제부사에 이르렀으나 인정문 밖의 행랑 축조에 실수가 있어 하옥되기도 했다.
궁궐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 지점에서 출발했다. 수많은 책과 인터넷 논객들이 쏟아내는 궁궐의 모습은 지금 관람하는 사람들이 이해한 궁궐이거나 예전에 권력을 가졌던 주류가 살던 궁궐이기 쉽다. 하지만 내 관심은 다르다. 예를 들어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같은 전각을 들여다볼 때, 희정당을 누가 언제 사용했고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혹은 희정당에 그려진 그림이며 장식이 어떤 의미인지보다는, 희정당을 왜 그런 모습으로 그 자리에 ‘만들었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궁궐지』 같은 조선시대의 자료들은 건물을 짓고 난 뒤의 이야기만을 다루고 있었기에 짓는 과정을 살피는 데 꽤 지루한 독서가 필요했다. 『궁궐지』는 선정전宣政殿을 옛 편전이고, 희정당이 지금의 편전이라고 말했다. 희정당과 선정전은 참으로 다르게 생긴 건물이다. 게다가 희정당같이 생긴 편전은 다른 어느 궁궐에도 없다.
도대체 우리 전통 건물들이란 그냥 지어 놓기만 하면 이렇게도 저렇게도 써도 상관없던 것일까? 좋게 보자면 유연함의 극치일 것이다. 트랜스포머블 아키텍처transformable architecture라는 용어가 『KTX 매거진』 같은 잡지에도 등장하는 걸 보면 그것도 괜찮은 가치인가 싶다. 대부분의 건축 공간이 그렇듯이, 우리나라의 옛 건축 공간도 필요한 면적만 확보되면 그럭저럭 어떤 기능이라도 담을 수 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근대건축의 명제가 등장하는 것은 그 이전의 건축이 갖는 상징성과 유연성을 동시에 보여 주는 것이다. 전혀 다른 형태의 공간인 희정당과 선정전이 편전이라는 한 기능을 담는 것은 그래서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것은 ‘개념 없음’일 수도 있다. 이왕이면 원래의 목적, 즉 편전으로 만든 선정전과 독서처로 만든 희정당은 분명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편전은 편전으로 ‘설계’되었을 것이고, 독서처는 또 그 나름대로 계획 방법이 있었다고 해야 그래도 좀 마음이 편안하다.
*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제는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이 1896년에 『리핀코트 매거진』에 게재한 에세이에서 유래했다. 기능주의의 이상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이 짧은 문장은, 비록 기능주의가 실패한 기획으로 평가받는다고 할지라도, 근대건축을 개척해 간 슬로건이었으며 지금도 유효한 명제이다.
지금도 침실이라고 설계 도면에 떡하니 쓰여 있는 방에서 밥을 먹는다. 하지만 밥을 먹을 수는 있어도 침실은 침실로 계획되었다. 말하자면 사용하는 사람의 방식과 만드는 사람의 방식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집을 지은 당시에는 두 가지 관점이 일치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편안한 공간 사용법을 찾아냈거나, 처음과는 다른 구성원들이 공간을 사용하게 되었거나, 생활 습관이 어떤 식으로든 변화하는 등 허다한 이유로 지은 사람의 의도와 쓰는 사람의 방식이 달라졌을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50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존재했던 왕조이다. 이 정도로 긴 시간 동안, 특히나 근대 사회로 가까워져 가면서 급격한 변화의 물결을 겪었던 것을 감안하면 처음의 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만만치 않은 과정이었을 것이다.
사용하는 사람들의 관점 vs. 만드는 사람들의 관점
그래서 궁궐의 건축을 바라보는 데에는 두 가지 시선이 필요하다. 하나는 사용하는 사람들의 관점이다. 어쨌거나 궁궐은 왕실과 벼슬아치들의 공간이다. 공간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든 간에 그건 그들의 몫이다. 세자가 책봉되지 않아 비어 있는 동궁전東宮殿에서 임금이 손님을 맞이하건, 빈번한 왕위 계승으로 늘어만 가는 웃전 여성들이 생활하건, 집은 그런대로 반응하고 적응하기 마련이다. 구중궁궐九重宮闕이 참으로 넓지만 그렇다고 무한정 공간이 남아도는 화수분은 아니다. 좀 넉넉하긴 해도 그 많고 많은 사람들이 복닥거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공간일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전각의 실질적인, 혹은 변통적 사용의 양상은 무턱대고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궁궐을 가장 최적화된 상태로 사용하고자 하는 모색의 결과로 봄 직하다. 조선왕조 500년을 일관된 시대로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무모하고도 위험한 일인가. 1392년의 조선 개국이라는 사건이 고려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조선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켜 놓은 사건이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만큼이나 세종과 정조, 연산군과 광해군은 너무나도 다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이며 그들을 둘러싼 왕실과 조정의 분위기, 관습, 이상과 터부 그 어느 것 하나도 같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조선, 그 하나의 단어로 모든 것을 동일시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인데도 궁궐을 들여다보는 눈은 늘 경직되어 있기만 했던 것 같다.
또 하나의 시선은 바로 만드는 사람들의 관점이다. 처음에 의도했던 대로 500년 동안 쓰이지는 못했더라도 정전은 정전대로, 침전은 침전대로 본성을 갖고 있으리라는 점이다. 아무렇게나 짓는 건물이라 할지라도 이 건물의 쓰임새를 염두에 두기 마련인데, 하물며 궁궐이 아닌가.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각각의 전각들은 어떻게든 스스로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 문제는 건축이란 것이 별로 직접적으로 속내를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한국의 목조건축은 직사각형 평면에 기와 올린 모양이 엇비슷해 보이기까지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조군건축組群建築’이라는 말이 있다. 흔히 동양권 건축을 설명할 때 쓰곤 한다. 개별 건축물로는 뚜렷한 다양성을 드러내기 어렵지만 조합되는 ‘관계 방식’을 통해 그 특징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서원이나 궁궐이나 사찰이나 다 그놈이 그놈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고딕 성당처럼 그냥 딱 봐도 이게 성당이라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공부도 좀 필요하다. 그러니 조선의 궁궐 건축도 전각의 모습뿐 아니라 다른 전각과의 위치 관계, 행각行閣과 마당, 월대月臺와 단청 같은 갖가지 세팅을 살펴보면 해당 건물을 좀 더 그럴듯하게 이해할 것이며, 특히나 건물의 이름이 유래한 고사까지 안다면 더욱 풍부한 이야기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궁궐을 만드는 사람과 사용하는 사람의 서로 다른 시선, 궁궐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종종 이 차이에서 빚어지는 질문을 받곤 했다. 혹은 뭔가 잘못 알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건축 공간을 소비하는 데 익숙했지 생산 과정에 참여해 본 적이 별로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건축 설계 ‘콘셉트’는 그다지 편안하지 않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결국은 이 둘을 다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무수한 질문, 궁궐을 깊이 바라보는 태도
궁궐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늘 변화하고 있다. 그 점이 내가 궁궐 공부가 흥미롭다고 느낀 핵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언젠가 “쉽게 말이 된다고 생각할 때 의심하라”라는 충고를 들은 적이 있다. 기나긴,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사건들로 채워진 역사의 시간 속에서 역사학을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욕심내어 온 것은 인과관계를 짚는 것이었다. 그래서 명료하게 말이 되는 설명을 해 내고 싶은 것이었는데, 만약 그랬다면 궁궐은 시시한 공붓거리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내 완전히 명료한 설명에 이르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 무수한 질문이 궁궐을 더욱 깊게 바라보는 태도와 더 가까운 것이리라.
궁궐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찾고 공부하는 유행이 되었다. 궁궐 이곳저곳에서 길라잡이와 지킴이’* 들을 만날 수 있다. 종종 그분들에게서 새로운 정보를 얻고 도움을 받는다. 솔직히 나는 온갖 상징과 의미로 채워진 현장의 곳곳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아, 그런가요”라는 말로 얼버무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궁궐은 한 사람의 머리로 속속들이 알 수 있을 만큼 녹록한 대상이 아니라서 궁궐에 애정이 있는 사람들과 서로 의지가 되는 순간이 많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궁궐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사극 속의 공간이 엉망진창이니 안타깝다. 사극이 역사학의 결과물은 아니기 때문에 실증과 미장센을 구분해야겠지만, ‘아름답다’ 말고도 훨씬 다양하고 풍부한 언어로 우리의 궁궐을 이해할라치면,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공간을 만든 사람들의 생각을 어떻게든 살려 내어야 한다.
* 한국청년연합KYC의 '궁궐길라잡이'(www.palaceguide.or.kr)와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의 우리궁궐지킴이'(www.rekor.or.kr)는 서울의 궁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대표적인 시민단체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경복궁에 갔다. 심플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안내 팸플릿이 새로 나와 있었다. 늘 주심포니 다포니 재미없는 건축 구조 설명만 수두룩하게 쓰인 안내문들 대신 좀 더 말랑말랑한 이야기들로 전각의 쓰임새와 역사에 대해 속삭여 주고 있었다. 껍데기만 보였던 궁궐이었는데, 팸플릿 속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느껴진다. 그렇게 궁궐은 복고 리바이벌의 세례를 받고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부활한 궁궐의 판타지를 조금은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깝게 이해해 보는 것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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