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환경을 보호하고 민주적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30년이 넘게 운동해 오는 동안, 종종 이런 물음을 받곤 했다. 영성이나 여러 종교적 가르침, 특히 성경에서 영감을 받았느냐고, 또 이것이 내 행동주의와 그린벨트 운동(GBM)의 활동에 영향을 미쳤느냐고. 나는 환경보호와 평범한 사람들의 자강을 종교 활동이나 사명의 일환으로 여겼을까? 더 나아가 환경보호를 위한 노력 또는 삶 전체에 적용되는, 우리가 알아야 할 영적 가르침이 있을까?
돌이켜 보건대 내가 그린벨트 운동을 시작한 1977년에는 나 개인의 신앙이나 종교 일반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때는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할 뿐이었다. 나는 시골에 사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을 돕고 싶었다. 세미나와 워크숍에서 알게 된 그들 삶의 기본 조건들을 개선해 갈 생각이었다. 여성들은 깨끗한 식수와 영양분을 갖춘 음식, 소득, 요리와 난방에 쓸 연료가 부족하다고 했다. 그래서 운동 초기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땅을 파고 사람들을 동원해 주변의 나무와 숲, 수원지, 흙, 야생동물 서식지를 보호하거나 되살리는 일이 영적이거나 종교와 이어진 활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적’이라 부를 수 있는 활동과 ‘세속적’이라 부를 수 있는 활동을 구별한 적이 없다. 몇 해 지나지 않아서 나는 우리가 하는 일이 나무 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기도 했다. 그 씨앗이 싹트면, 자신감과 자각을 잃어버린 공동체의 상처가 치료될 것이었다. 그러려면 공동체에 속한 개인들이 진정으로 발언권을 되찾아 자신의 인간적, 환경적, 공민적, 정치적 권리를 주장해야 했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평범한 시민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과 마을, 지역,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는 환경에 이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민주적 공간을 넓히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그린벨트 운동과 여기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오래도록 영감과 힘을 줘 온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여러 마을과 지역 사람들이 그린벨트 운동에 관심을 보이며 방법과 경험을 공유하고자 했다. 어느 순간, 나는 열정과 통찰력뿐만이 아니라 무형의 핵심 가치들이 그린벨트 운동을 이끌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린벨트 운동의 네 가지 핵심 가치
1 환경에 대한 사랑 환경에 대한 사랑은 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환경을 사랑하는 이는 지구에 이로운 행위를 하게 된다. 나무를 심거나 잘 자라도록 보살피고, 자라나는 나무에 거름을 주고, 동물과 동물 서식지를 보호하고, 흙을 지키고, 지구와 주위 환경과 그것이 주는 모든 것에 실제적으로 고마움을 표현하는 여러 활동을 한다.
2 지구 자원에 대한 감사와 존중 지구가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지구 자원을 조금이라도 낭비하려 하지 않으며, 쓰레기 줄이기, 재사용, 재활용(reduce, reuse, recycle)의 3R을 실천한다. 일본에서는 이런 개념을 ‘모타이나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3 자강과 자기 발전 자립정신을 갖고 자신의 삶과 생활환경을 개선해 나가려는 의지, 다른 누군가가 나 대신 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약물중독과 같은 무기력하고 자기파괴적인 행위를 멀리한다. 필요한 내적 에너지를 스스로 이끌어 내듯이, 변화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자기 자신 안에 있음을 이해한다.
4 헌신하려는 마음과 자발적 활동 그린벨트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서, 다른 이들에게 이바지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 자원을 쓰면서도 보상이나 치하, 심지어 알려지기조차도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음을 뜻한다. 예언자, 성인, 여러 지역 활동가들을 특징짓는 것은 자기를 내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선을 위해 제 몫을 다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공동선이란 가깝고 친밀한 사람을 위한 일일 수도 있고, 머나먼 곳에 사는 모르는 사람을 위한 일일 수도 있다. 여기서 ‘다른 이들’은 꼭 사람만이 아니라, 삶과 지구를 우리와 공유하는 뭇 생명을 두루 아우른다.
이런 가치들은 그린벨트 운동이 조직으로서 지니는 무형의 미묘한 정신적 측면을 요약한 것이다. 이 가치들 덕분에 그린벨트 운동이 나날이 발전해 올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결코 돈이나 명성, 또는 지위 상승을 바라고 수많은 땀방울을 흘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뒷날 노벨상을 받게 되리라고 짐작이나 했겠는가! 활동은 때로 몹시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가치를 감싸 안고, 더 나아가 정의와 공정함, 책임과 의무를 실현하려 노력했다. 불굴의 태도는 활동 내내 우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우리는 그 굴하지 않는 태도로 지역사회와 관료, 종교 지도자, 운동가, 그리고 국가 지도자들과 소통해 왔다.
이 가치들은 그린벨트 운동 고유의 것이 아니다. 이 가치들은 보편적인 것이지만 만지거나 볼 수 없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척 소중한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 인간성을 정의한다.
이 가치들은 특정 종교의 가르침 안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신의 품속에서 그 가치에 따라 살겠다고 신앙을 고백하지 않아도 좋다. 이 가치들은 인간 본성의 일부일 것이다. 나는 우리 인류가 그 가치를 믿고 따르기 때문에 더 나은 사람이 되며, 그 가치를 따르지 않을 때보다 더 잘살게 된다고 믿는다. 이를 무시한다면, 이 가치들은 이기주의, 부패,
탐욕, 착취 같은 부도덕에 떠밀리다가 끝내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나는 지구가 파괴되면 인류 또한 그렇게 된다는 것을 경험과 관찰로 깨달았다. 물이 오염되고 공기 중에 매연과 연기가 가득한, 상처 입은 환경에서 우리가 먹는 음식은 중금속과 플라스틱 잔류물로 오염된다. 또 흙은 사실상 쓰레기와 다를 바 없어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 더러워진 흙은 우리 건강을 야금야금 갉아먹다가 끝내는 몸과 마음, 영혼에 상처를 남긴다. 그러므로 환경을 해치는 것은 우리 자신과 인류 전체를 해치는 일이다.
반대의 경우도 똑같은 이치로 말할 수 있다. 지구가 되살아나도록 돕는 것은 우리 자신을 돕는 일이다. 겉흙과 생물 다양성이 사라지면서 또는 가뭄과 사막화가 확산되면서 지구가 고통을 겪을 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거나 지켜 주기 위해 노력한다면 지구는 그 보답으로 우리가 자아를 치유하고 생존해 나가도록 도와줄 것이다. 사라진 숲을 되살리는 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가 더욱 건강하고 순수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깨끗한 공기로 숨 쉬고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다면, 건강한 흙이 채소와 곡물을 풍성하게 길러 낼 수 있다면, 우리의 질병과 건강하지 못한 생활방식은 치료된다. 그러므로 지구를 충만하게 가꾸어 갈 때 믿고 따르는 가치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구를 사랑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지구가 베풀어 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낄 때 우리 자신에게도 고마움을 느낄 수 있고, 스스로 힘을 길러 지구를 가꾸면서 우리 자신을 고쳐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구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이바지하는 일이다.
인류에게는 사랑과 아름다움과 창조성과 혁신을 알아보고 그것이 모자랄 때에는 한탄할 수 있는 의식이 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그래서 다른 동물들과 무엇이 다른지를, 우리 자신의 능력과 평범한 생물학적 본능을 뛰어넘는 수준에서 경험할 수 있다. 이슬방울이나 활짝 벌어진 꽃의 섬세함, 조약돌 위를 흘러가는 시냇물, 코끼리의 위풍당당함, 여리디여린 나비의 몸뚱이, 바람에 물결치는 밀밭이나 나뭇잎들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심미적 태도는 그 자체로 소중하다. 그리고 그 미적인 반응은 우리 안에 자연 세계에 대한 경외감과 미감을 불러일으켜 신성을 느끼게 해 준다.
한 그루의 나무가, 숲이, 또는 어떤 산 자체가 신성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그것이 생명을 뒷받침해 주고 있음을 그런 깨우침 덕분에 알 수 있다. 우리가 숨 쉬는 산소와 마시는 물을 만들어 주는 자연 덕분에 뭇 생명이 살아갈 수 있으므로 자연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환경은 신성한 것이다. 생명에 꼭 필요한 것을 파괴한다는 것은 생명 자체를 짓밟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더듬어 가는 영적 가치들은 자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러 종교의 많은 선지자들이 자연에서 깨달음을 얻거나 그 속에 파묻혀 지혜를 구했다. 게다가 우리 인류는 신성에 관한 생각이나 아이디어를 표현할 단어가 충분하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상징을 이용하는데, 그 가운데에는 나무, 강, 해, 달, 동물처럼 자연 세계에서 찾아낸 것이 많다.
이런 관계 덕분에 종교인들은 지구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고, 지구가 치유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장 잘 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산업화와 기계화, 도시화, 주거지 파괴를 겪으면서 자연과 분리되어 왔다. 종교 창시자와 선조들의 근본적인 사상과 생각은 왜곡되고 굴절되어 이런 현상을 일으킨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후손들은 선조들이 처음에 정립해 놓았던 것에서 멀어졌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본디 지구를 보살피라고 가르치지만 그 가르침은 나날이 빛을 잃어 왔다. 기독교가 영토팽창주의자, 식민주의자, 민중과 지구를 착취하는 자들과 정치적으로 얽혔기 때문이다. 이들이 자연에 상처를 입히고 덧나게 하여 오늘날의 자연은 치유가 절실해졌다.
이 책에서 나는 그린벨트 운동을 이끌어 왔고 지금도 그 중심에서 운동의 정신을 감싸 안고 있는 핵심 가치들을 더 넓은 범위에서 살펴보려 한다. 지구와 우리 자신이 입은 수많은 상처를 치료하려 할 때 폭넓게 받아들여져야 할 가치들이다. 나는 신학자도 아니고 신학생이나 종교 입문자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환경 운동가들을 위한 신학적 발언이나 도덕적 지침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내가 여기서 살펴보려는 가치들은 포괄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내 삶과 활동에서 가장 의미가 있었던 것들이다. 그것들은 진부한 가치가 아니다. 그린벨트 운동가들은 신참자이든 경력자이든 늘 그 가치들을 되새기곤 한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1장과 2장에서는 핵심 가치들의 타당성을 살펴보고, 그 가치들이 그린벨트 운동의 업적에, 그리고 일부는 내 삶에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서술한다. 그리고 먼 곳을 다녀온 여행담을 들려줄 텐데, 그 절정은 지구가 입은 수많은 상처를 보여 주는 콩고 우림 지역이다. 이것이 상처 입은 우리 세계의 외적 상태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뿐 아니라 우리가 정신적 생태계라 부를 수 있는 것과 우리 영혼, 그리고 인간이라는 의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이 상처들을 인식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일은 단순하지만, 몹시 심각한 어떤 상처들은 깨치기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어렵기도 하다.
때로는 더 분명하게 보기 위해 한 걸음 비켜나 다른 각도에서 상황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인 3장에서 나는 우리 지구를 바라보는 몇 가지 방법을 언급한다. 첫 번째 방법은 큰 그림으로 보는 것이다. 달에 착륙한 우주인이 우리에게 보여 준 사진처럼 지구를 우주에서 바라본다. 두 번째 방법은 지구의 오랜 역사를 지질학적 연대에 따라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이다. 세 번째는 우리가 지역적인 것과 작은 것에 눈을 돌릴 때 생각하는 지구의 그림이다. 이 세 가지 방법은 모두 우리 의식을 바꾸는 데 도움을 준다. 우주 안에서 우리의 상대적 위치를 자각하고, 우리가 모든 존재에서 분리되지 않는 일부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 책의 세 번째 부분은 4~11장이다. 여기서는 그린벨트 운동의 네 가지 핵심 가치가 우리의 일상적 활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들여다본다. 아프리카에 살든 아니든 상관없다. 살아온 경험을 통해서 나는 신앙을 보편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지만,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나라들 상당수가 그렇듯이 케냐에서도 기독교가 으뜸가는 종교이고 성경은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기독교와 만나게 되는 유일한 책이다. 그래서 우리 그린벨트 운동가들은 지역사회에 다가가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고, 기독교인들이 구약과 신약으로 일컫는 성경에서 많은 본보기를 이끌어 낸다. 이 가르침 덕분에 지구의 천연자원을 보호하는 올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를 모른 체한다. 그리고 이 세 번째 부분에서 나는 자연 세계를 숭배하고 존중하는 여러 신앙과 영적인 가르침도 살펴보려 한다. 이 가르침들은 지구가 상처를 입었음을 알아채게 하고 그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도 알려 준다.
나는 이 책 전체에 걸쳐 유대교와 기독교 공통의 유산과 함께 키쿠유 부족사회의 전통 관습을 예로 들어 이야기를 펼쳐 간다. 나는 키쿠유족의 일원으로 그 전통에서 자라났다. 키쿠유족의 세계관은 많은 원주민 사회와 토착 사회, 또는 소수민족들을 일반적으로 대표하며 내게 가장 친숙한 전통이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이 세계관을 ‘원시적’이라 여겼으나 전통 사회의 관습과 가치가 특히 내세의 깨달음과 부, 행복을 약속하는 ‘새로운’ 또는 ‘현대의’ 종교 교리와 꼭 충돌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선교사들은 원주민의 제례와 의식이 새로운 신앙과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특히 비극이었던 이유는, 과학자들이 오늘에 와서야 이 전통적인 문화와 생활양식 덕분에 지역의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게 보존될 수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과학자와 일반인 모두 원주민들의 신앙이 자취를 감추기 전에 그 신앙을 새로이 바라보고 거기서부터 배우는 일이 중요함을 분명히 깨닫고 있다.
속인으로서 신성에 대한 내 이해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이 책 전체에 걸쳐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포함하는 아브라함의 가르침과 키쿠유 전통의 유일신을 표현하기 위해 ‘하느님’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나는 ‘근원’이라는 표현도 쓴다. 하느님이라고 하면 많은 기독교인은 자애로운 할아버지가 천상에 앉아 세상을 굽어보면서 우리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모습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근원이라는 단어를 쓰면 이런 이미지를 지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원은 모든 지식과 깨달음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곳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 어떤 이는 신이라고 일컫고, 어떤 이는 자연, 어떤 이는 창조주라고 부르는 것이 머무는 곳이다. 여러 문화에서는 서로 다른 말로 이 근원적 에너지를 표현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일컬었다. 그것에 어떤 이름도 붙이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원 같은 것은 없다고,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것을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 개념에서, 근원은 부주의하거나 무지한 존재의 오류를 바로잡는 존재가 아니다. 농부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지나치게 가축을 방목하거나 숲을 베어 내 사막화를 촉진하고 토양침식을 모른 체하고 빗물을 모아 두지 않는다면, 그래서 가뭄이 들고 사람들이 고난을 겪게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잘못이 아니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느님을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과연 그 신도들이 살아가는 동안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을 관리할 책임을 져야 하느냐고 말이다.
하느님은 근원이시지만, 우리 마음이 욕망하는 모든 것을 제한 없이 베풀어 주시지는 않는다. 마을에서 우물을 파거나 마을 가까이 강이 흐를 때, 근원께서 물을 영원히 내려 주실 것이라고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강물도 우물물도 마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보충해 주지 않는다면 고갈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의 제약을 인식하고 지구의 자연자본이 유한하다고 깨닫는 것보다 과학의 속도가 더 빠르다. 비교적 부유한 이들의 생활양식과, 그 생활양식에 어울리는 물질적 재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 가는 현실은 그 부가 기대고 있는 생태계에 어마어마한 짐을 지운다.
과학자, 기후 전문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후변화의 영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진지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유엔 정부간기후변화협의체(IPCC)는 2100년 즈음에 지구의 최저기온이 1.8도, 최고기온이 4도 올라갈 것으로 추정한다. 21세기 말에는 해수면이 28~43센티미터가량 상승해 작은 섬나라들이 바다 밑에 가라앉을 것으로 예상된다.1 가뭄, 홍수, 혹서, 허리케인 등 이상기후에서 비롯한 현상은 점점 더 자주 일어나고 있으며, 이 추세가 계속 이어져 끝내 기후를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으로 예견된다.
아프리카는 특히 기후변화의 타격을 심하게 받는 지역으로, 10년 단위로 기온이 0.2~0.5도 오르고 있다. 지구온난화는 사하라사막 주변의 반건조지역과 중남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심하다. 온난화의 영향으로 아프리카 상당 지역에서 계절성 강우가 심한 변동을 겪을 것이라고 한다. 이는 더 잦은 가뭄과 흉작, 홍수, 그리고 사막화 진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게다가 IPCC에 따르면 “점점 더 극심한 기후변화를 겪으면서 아프리카의 식량 안보가 악화될 것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기후변화를 겪으면서 가난하든 부유하든 모두 이 지구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욕구와 바람은 지구가 베풀어 줄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충분히 가지려면 다른 사람들이 덜 가지고 살아야 한다. 괜찮다고 얘기하기 위해서는 덜 파괴적인 다른 방법을 찾는 일 말고도 안 된다고 말하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기후변화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나면서 우리는 다가오는 세기에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컴퓨터 모델은 태풍, 가뭄 등 기후가 일으키는 재앙이 더 자주, 더 심하게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 예로 해수면이 상승해 세계의 저지대가 물에 잠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구가 밀집된 저지대에서는 수백만 명이 내륙으로 대거 이동하거나 선단을 이룬 거대한 난민이 되어 바다를 떠돌아야 한다. 수확이 불안정해지고 가뜩이나 모자라는 천연자원에 압박이 더해지면 난민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흔하게 벌어질 것이다. 이 모습을 우리는 수단과 동아프리카, 그리고 다른 여러 곳에서 이미 목도하고 있다. 산업화된 나라들은 최악의 혼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기술적 방편과 재정 자원을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산업화되지 않은 나라에 사는 50억 명이 넘는 이들은 그렇지 못한 데다가 이 수는 더 늘어 가고 있다.
저절로 치료가 되는 방법은 없다. 지구가 입은 상처는 심각하기 때문에 치료에 큰 정성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우리가 도울 수 없거나 돕지 않는다면 지구 또한 우리를 보살필 수 없다.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를 가이아, 즉 그 자체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유기체로 인식한다. 그의 학설처럼 지구는 자기 조정 수단을 작동해 기온의 균형을 되찾는 길을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과 많은 종들은 빨리 적응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 우리가 스스로 물어야 하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지금 통찰력을 발휘해 최악의 상황을 막을 것인가, 아니면 그저 손 놓고 있다가 때를 놓칠 것인가?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에게 이로운 목표를 향해서 세계를 이끌어 갈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우리 관습과 가치를 손질해 늦지 않게 자기 파멸을 멈출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생태학적 위기가 왜 신체의 위기이자 영적인 위기인지에 대해 과학의 설명을 뛰어넘는 대답을 요구한다.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수준의 의식이 필요하며, 우리는 그제야 비로소 우리가 지구 생명체라는 더 큰 식구의 일원임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이 의식에 이를 수 있다면 지구가 아파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그 상처를 치료하는 데 집중하게 하는 영적 가치를 내면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구의 관리자가 되고 지구에 옳은 일을 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에게도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 우리 본성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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