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자기만의 방에 이르는 여정
버지니아 울프의 유명한 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남성 중심적인 영국 지식인 사회를 풍자하면서 여성의 공간적·경제적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한국에서 연극으로 각색된 〈자기만의 방〉은 1992년 이후 여성주의 연극운동의 핵심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이 연극은 원작의 풍자적이고 계몽적인 스타일을 차용하면서도 한국의 맥락에 맞게 내용을 재구성한다.
지난 20년간 이 연극이 겪은 변화는 한국의 정치적 정서와 여성운동의 변화를 반영한다. 1990년대 초 이 연극은 자신의 글과 이론에서 여성을 폄하하거나 가르치려드는 한국 남성 지식인을 향해 비판의 칼끝을 겨눴다. 화자는 가부장적 권력에 대해 적개심을 품은 한 분노에 찬 여성이다. 이 여성의 적개심은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 힘쓴 저항의 정치운동을 연상시킨다. 2007년에 상연된 작품은 초점과 서술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 남성 지식인들의 관점을 비판하는 대신 여성의 공간과 신체, 특히 우주의 은유로 쓰인 자궁에 초점을 맞췄다. 제작자이자 주연인 이영란 교수는 이 새로운 버전은 현 상태에 대한 집단적인 대립의 접근법보다는 개별 여성의 내적 조화를 고무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적대적인 수사에서 개인 중심의 조화로운 담론으로의 이전은 30년에 걸친 냉전적 군사독재 이후 선거민주주의가 확립된 1987년 한국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정치 변화를 반영한다. 이 같은 정치적 변화와 함께 시민사회운동이 급성장하면서(Moon 2002, 박경태 2008) 여성운동과 환경운동, 소비자운동, 성소수자·입양아·이주노동자·장애인을 위한 인권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민주화 이전 대학생, 농민, 노동자가 주축이었던 사회정치적 운동들은 국가의 억압에 맞서 강력한 집단적 시위를 조직했다(Koo 2001, N. Lee 2005, Nam 2009). 1987년 이후 시민사회운동은 여전히 이 서로 다른 집단 간의 연대를 강조했지만 1990년대, 그중에서도 특히 아시아금융위기가 진행된 1997~2003년과 그 이후에는 개인의 권리와 독립적인 기업주의 정신이 민주주의의 주요소로 인식되었다(서동진 2009, Abelmann 1996, Song 2007, 1009b). 3장과 4장에서 나는 이 같은 정치적 전환이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특히 삶은 향유해야 한다는 데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대중적인 감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 장에서는 비혼여성들의 삶에서, 특히 이들이 독립적인 세대를 꾸리는 과정에서 이 같은 정치적 전환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성도덕 레짐
한국 여성들은 (2장에서 설명할 높은 도시 주거 비용뿐만 아니라) 관습적인 전통 때문에 결혼 전에는 부모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다. 한국에서는 부모와 따로 떨어져 사는 여성은 비정상 취급을 받는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아버지의 관할로 인식되기 때문이다(Deuchler 1992, Haboush 1991, Janelli and Janelli 1982). 성리학적 전통은 조선시대(1392~1910년)에 공고화되었다. 이 성리학 전통에 따르면 부모는 결혼하지 않은 딸의 섹슈얼리티를 보호하고 감시할 책임을 져야 한다. 여행과 대중매체를 통해 코즈모폴리턴 문화가 널리 알려지고 인기를 얻고 있음에도, 또한 갈수록 많은 여성들이 과거에 비해 결혼을 그저 선택으로 여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같은 관념은 지속되고 있다. 개신교와 천주교 같은 서구의 종교가 한국에서 폭넓게 확산되면서 불교나 토속적인 샤머니즘 같은 다른 종교들과 함께 성리학 역시 그 힘을 잃기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기독교라 해서 보수적 성도덕과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부부간의 출산을 위한 섹스만을 합법적인 섹슈얼리티로 인정하는 보수적인 젠더 규범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에서 지배적인 기독교 교파를 주도한 것은 근본주의적인 개신교도들이었기 때문에, 보수적 전통을 뒤집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볼 수 있다. 30대 초반의 비혼여성 소정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이 든 세대들한테는 부모랑 같이 살지 않는 미혼여성에 대한 편견 같은 게 분명히 있어요. 생활에 규율이 없고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거죠 [웃음].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시장이나 중매 같은 데서 부모랑 같이 살지 않는 비혼여성들에 대해 불편해해요. 언니 결혼식에서 한때 나를 꽤 예뻐하셨던 숙모를 만난 적이 있어요. 내가 사람들한테 혼자 산다고 말했다는 걸 혼내시면서 그냥 형제나 부모랑 같이 산다고 말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다시 웃음].
30대 초의 비혼여성 준희는 대학 기숙사에 살 때도 부모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저녁에 기숙사에서 내가 전화를 받지 않거나 다른 데서 자고 온 기미라도 있으면 집안 전체가 발칵 뒤집혔어요. 그래서 도망쳤죠. 가족들도 나한테 엄청 화를 냈고 나도 가족들한테 화가 많이 났어요.
내가 인터뷰했던 여성 대부분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거주지를 통제하는 기존의 규범에 굴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여기에 저항했다. 저항의 형태는 이들이 받는 결혼 압력의 정도와 결혼에 대한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양하다. 소정이 짓는 웃음처럼 어떤 저항은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미세하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분명한 저항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준희는 부모로부터 도망쳐 나왔고, 그래서 부모는 준희에게 캐나다 어학연수를 협상 카드로 제시했다. 요컨대 혼자 살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해서 성인으로서의 자유를 꿈꾸는 한국의 비혼여성들은 보수적인 성도덕 레짐과 경쟁관계에 있는 자유로운 자기통치 실천의 적극적인 주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도덕 통치의 전장에 서있는 것이다.
한국 여성들이 보수적인 도덕 레짐과 좀 더 자유로운 도덕 레짐 사이에서 투쟁하고 협상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20세기 초 이후로 이런 투쟁이 없었다면, 교육·투표권·정치적 지도층·예술 생산·경제적 권력·코즈모폴리턴 문화에의 노출 등의 영역에서 성평등이 법적으로 이루어지지도, 더디게나마 사회적으로 수용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성평등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대 말과 독재 종식 이후 달라진 점은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자유로운 사상, 욕망, 실천들이 일반 여성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데 있다. 이전의 경직된 정치적·도덕적·문화적 규율하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려는 시도가 분명 일반적인 사회현상은 아니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도 일부 한국 여성들은 결혼과 가족제도를 벗어난 삶을 추구했다. 이들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나 전세계 다른 유사한 여성들처럼 ‘신여성’ 혹은 ‘모던걸’로 알려졌다.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대로 살아가는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의 이미지는 1960년대 초 최초의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기 전, 한국전쟁(1950~1953년)의 상처가 어느 정도 회복된 1950년대 말의 짧은 자유주의 레짐에서 다시 일시적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런 시절과 분위기는 잠시뿐이었다. 결혼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여성들은 그로부터 한참 뒤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1989년쯤 되어서야 늘어났다. 이로 인해 중상층뿐만 아니라 많은 젊은 노동계급 성인(노동계급 가정 출신의 대학생을 포함해서) 역시 해외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연구참여자들 중 많은 수가 유럽·호주·멕시코에서 배낭여행을 하거나, 어학연수 혹은 친지 방문을 위해 북미를 다녀온 경험이 있다. 경제력이 별로 없는 젊은이들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여행시장에서 가장 저렴한 여행상품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경험과 자유를 누렸다. 내 연구참여자들은 모두 이런 경험들을 근거로 개인적인 성장과 코즈모폴리턴적 경험을 추구했던 자신들의 삶이 젊은 남성 동년배들과 별다르지 않다고 자랑스럽게 밝혔다.
자유로운 환경이 대중화되어 젊은 비혼여성들에게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사례는 대중매체를 통해 동시대 외국영화, 특히 할리우드의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에 노출의 기회가 확장된 점을 꼽을 수 있다. 이 같은 노출은 아시아금융위기를 거치는 동안 확대되어 완전히 자유화되었다(외국영화시장은 경제 구조조정의 조건으로 규제가 완화되었다). 할리우드 영화는 1950년대에 한국에 소개되었고, 〈매시MASH〉와 〈다이내스티Dynatsty〉 같은 일부 오래된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들도 이미 한국에서 방영되었지만,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가 대대적으로 소개된 것은 아시아금융위기 이후였다(McHugh and Abelmann 2005). 내 연구참여자들은 공통적으로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 〈윌 앤 그레이스Will and Grace〉, 〈퀴어 애즈 포크Queer as Folk〉, 〈앨리 맥빌Ally McBeal〉,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 〈CSI〉를 언급했다. 금융위기 이전에도 1990년대 초 자유주의 시대가 시작되던 무렵부터 여성영화제와 퀴어영화제 등 새로운 독립영화제에서 외국영화를 관람할 기회는 이미 늘고 있었다. 이런 축제들은 처음에는 대학에서 시작되었지만, 기업과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점차 대중적으로 개최되기 시작했다. 아시아금융위기 시기와 그 이후에는 서울여성영화제, 전주독립영화제, 부천판타스틱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처럼 지방정부가 주요 영화제를 개최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내가 인터뷰했던 비혼여성들은 거의 전부가 할리우드 텔레비전 드라마의 열성적인 팬이자 각종 영화제의 단골 관람객들이었다. 이런 영화제에 자원봉사자나 임시직으로 일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1990년대 초에는 문화적 자유화뿐만 아니라 여성운동 역시 민주화 이후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 기간에는 〈자기만의 방〉이 초연되었고 이후 10년간 전설을 남겼다. 또한 1995년 베이징여성대회와 (정치와 정부의 지도층 내에서) ‘성평등의 주류화mainstreaming of gender equality’를 주창하는 전 지구적 여성운동의 흐름 속에서 지역 여성운동 역시 강화되었다.
성 주류화 시대에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여성운동의 지도부와 활동가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비혼여성 문제는 대단히 더디게 부상했다(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4장을 참고할 것).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은 비혼여성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 유통시킴으로써 주변화 문제를 해소하고자 했다(비혼은 문자 그대로는 ‘결혼하지 않은’이라는 의미지만, ‘결혼에 연연하지 않는’의 의미가 더 정확하다). 비혼여성에는 의미 있는 반려자가 있는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여성과 이혼 여성이 포함된다. 이 새로운 용어에는 ‘미혼여성’과 ‘독신여성’ 같은 좀 더 상투적인 용어들과 차별성을 갖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있다. 이렇게 새롭게 정의된 비혼여성들은 2007년에 시작된 여성주의 성향의 비혼여성축제와, 그 외 다른 진보적인 여성미디어와 노동단체들의 청중이자 지지층을 구성한다.
따라서 스스로를 비혼여성이라고 여기는 내 연구참여자들은 여성의 주거 해방을 개인적인 실천으로서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의식과 공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그 투쟁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사회적 규범에 맞서 새로운 정체성으로 무장했다. 이들은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이 특수한 사회역사적 순간들(미디어와 여행을 통한 코즈모폴리턴적 문화의 영향과 성평등의 주류화)을 거쳐왔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 시기에 학생운동가로 활동했었으며 사회운동의 자유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점차 여성과 다른 사회정의 문제로 정치적 관심을 옮겨간 시대적 변화의 장본인들이다. 따라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으로서 자기만의 주거지에서 살기 위한 여정과 사회운동과 관계맺기 위한 노력은 자유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좌파적인 인간상의 증표라 할 수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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