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법이라는 말뚝
“사법부의 역할은 법이 무엇인지 선언하는 것이고, 잘못된 입법은 새로운 입법을 통하여 해결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대법원 2020.8.27. 선고 2019도11294 전원합의체 판결 중 대법관 이기택, 대법관 김재형, 대법관 박정화, 대법관 안철상, 대법관 노태악의 반대의견.
판사들 사이에서는 시·군 지역 법원으로 발령받은 판사가 관할구역의 인구를 줄여버렸다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내막은 이렇다. 한 판사가 관할구역 내 음주운전을 근절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딱한 사정이 있건 말건 음주운전자에게 바로 실형을 선고하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시·군 지역은 사실 한 동네나 다름없다. 벌금이나 내고 돌아오겠거니 했던 이웃 사람들이 갑자기 줄줄이 구속당하고 나니 동네 사람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먼일 같았던 법의 지엄함이 비로소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덕분에 관할구역에서는 음주운전 사건이 정말로 줄기는 했다. 다만 관할구역 인구도 덩달아 줄었다고 한다. 음주운전을 한 사람들이 그 판사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란다.
이 이야기를 들은 판사들은 일단 대체로 웃는다.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자 하는 판사의 선의가 관할구역 인구 감소라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결론으로 이어지는 아이러니 때문이다. 물론 그 웃음 뒤에는 직업적 영향력에 대한 자부심도 어느 정도는 섞여 있을 테다.
하지만 나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은 “판사의 말이 곧 법이다”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하고 있다.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확인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혹시나 이 전설 같은 이야기를 접하게 된 뭇사람들이 “거봐, 맞지? 판사들이 이렇게 힘이 세다니까”라며 수군거릴지 싶어 조마조마하다.
나는 “판사의 말이 곧 법이다”라는 말을 오히려 거꾸로 새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법이 곧 판사의 말이다.” 판사는 사건에 적용될 법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그 법이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풀어 설명하는 것을 그 역할로 할 뿐이다. 판사가 하는 일은 ‘법’에 근거하며, 따라서 ‘법’을 벗어날 수 없다. 법이란 ‘판사의 말뚝’과 같다. 판사가 ‘제아무리 멀리 벗어나려 해도 말뚝이 풀어준 새끼줄 길이’만큼만 가능한 것이다.
반박이 있을 수 있겠다. “판사가 결론을 내면 그것으로 사건은 끝나는 것 아닌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판사의 결론에 불복할 수 있는 수단이 얼마나 많은가. 법원 안에서 구제 수단을 찾는다면 하급심 판결에는 상소를, 확정된 판결에는 재심을 고려할 수 있다. 법원 밖에서라면 형사 판결에는 사면을, 민사 판결에는 사적 면제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압권은 법 자체를 바꾸는 경우다. 판사가 법이 무엇인지 선언했는데 그 선언이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면, 국회의원은 법 자체를 바꿔 판사가 앞으로 선언할 내용을 견제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2020년 6월 2일 이전시기가 중요하다’에 음란물 사이트 운영자에게 돈을 내고 텔레그램으로 아동·청소년이 등장하는 음란물 동영상 파일을 다운로드할 수 있는 URL 주소를 받았다. 이 사람이 법정에 왔을 때 판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의 행동이 잘못이라며 그를 처벌할 수 있을까?
판사는 법에 따라 재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법에서는 “아동·청소년을 이용한 음란물임을 알면서 이를 소지한 자”를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음란물 그 자체가 아닌 URL 주소만 받은 행동을 두고 음란물을 ‘소지’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판사는 “URL 주소만 받은 경우는 법에서 처벌 대상으로 삼는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뒤 그에게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다. 아동·청소년이 등장하는 음란물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므로 관련된 범죄는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신념을 판사가 가졌다 한들 그 신념을 판결에 반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자 국회의원이 나서서 법을 바꾸었다. 법에 아동·청소년을 이용한 음란물을 ‘구입, 저장’하는 행위까지 처벌하는 규정을 새로 추가한 것이다. 이로써 URL 주소만 받은 경우의 처벌 공백이 비로소 채워졌다.
판사의 한계를 잔뜩 늘어놓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판사를 무력하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판사의 권한과 재량을 작게 볼 생각도 없다. 더 큰 것, 예를 들면 안정과 질서 같은 것을 위해 판사가 스스로를 자제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그 절제에서 판사의 권위가 세워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의 처음에 적은 판결 문장을 좋아한다. 판사가 하는 일사법부의 역할은 법이 무엇인지 선언하는 것을 명확히 이야기해 주는 동시에 한계잘못된 입법은 새로운 입법을 통하여 해결해야 한다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문장은 호소문처럼 읽히기도 한다. “우리네 판사의 역할은 이렇습니다. 현재 법 체계에서 이러저러한 해석과 결론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더 나서면 질서가 흐트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 나서주십시오.”
관할구역의 인구를 줄여버렸다는 판사의 결기는 말뚝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듣는 어떤 사람은 판사라면 응당 그래야 하지 않느냐며 속 시원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판사마다 다른 결론이 마뜩잖을 수도 있다. 누구는 판사 잘 만나 벌금을 선고받고 누구는 판사 잘못 만나 실형을 선고받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여길 수 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하기 어렵다. 다만 판사로서 내가 지켜내고자 하는 것은 있다. 가진 권한의 한계를 거듭 살펴보고 내 판단이 잘못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그러니까 말뚝을 항상 돌아보는 것, 혹시나 새끼줄이 풀린 것은 아닐까 살펴보는 것. 원론적이고 진부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래도 그 자세를 유지하고자 애쓰는 것이 우리 판사의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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