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밥
저이는 어찌 저리 환할까 기웃거리다가, 드디어 비결을 찾았어요. 날마다 맑은 햇살 푸지게 담아 드시더군요. 설거지한 그릇 널어 바짝 말리고는, 마당 그득히 쏟아지는 햇살 듬뿍듬뿍 받는 거예요.
햅쌀보다 맛나고 다디단 햇살들을요.
봄에는 봄 햇살, 여름에는 여름 햇살, 가을 겨울에는 갈겨울 햇살, 그릇에 넘치겠지요. 구름 그림자 놀다 가고 바람은 자고 가고 꽃 냄새, 두엄 냄새는 쉬었다 가겠지요.
이보다 영양가 높은 곡식 달리 더 있을까요. 아무리 비우고 비워도 또 고봉으로 쌓이지요. 위봉산 넘어온 저 햇살들, 자연의 찬란한 햅쌀들.
함께 사는 소양이하고만 먹기 아까워서 여기저기 기별합니다. 냥이야 제비야 집 나간 모란아, 밥 먹으러 와. 내가 맛있는 햇살밥을 지었단다.
입동
큰 그림자와 작은 그림자가
나란히 뜀박질 중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소란스럽다
나뭇잎들은 추워 옹송그리지만
아랑곳없이 시끄럽고 화창하다
작은 가방 멘 큰 그림자가 도망가고
빈손의 작은 그림자 까르르 쫓아간다
유치원 가기 싫은 큰 그림자를
작은 그림자가 밀고 가는 것일까
큰 그림자 따라붙는 작은 그림자가 바쁘다
신이 나 달려가던 작은 그림자,
멈칫 서더니 삐뚤빼뚤 되돌아온다
아이쿠나, 에나멜 분홍신 한짝이 벗겨졌다
신으려던 분홍신을 불빛이 꿰뚫어오자,
작은 그림자 옆으로 홱 밀어젖히고
큰 그림자는 하얀 스프레이로 남았다
봄부터 입때까지 그림자들 날마다 이러고 있다
반복하고 반복다보면 철없는 분홍신이
혹 벗겨지지 않을 날 올지도 몰라 하고.
이순의 저녁
둘은 모녀간일까. 길가에 놓인 운동기구를 타며 정답게 속삭이고 있다. 지나가던 내 귀가 주욱 늘어나 두 사람 주변을 서성인다.
이따 집에 가서 전 부쳐 먹자. 비도 설핏 다가들고. 엄마, 여기 오기 전에 저녁 드셨는데? 고기에다가 맛있게. 내가? 내가 밥을 먹었어? 근데 왜 이렇게 배가 고프냐.
들은 말들을 되새김질하는 것일까. 걷는 내내 접힌 귀는 우울에 빠져 있었다. 집에 다 와가는데도 처져 있어 귀에게 전했다.
집에 가서 전 부쳐 먹을까? 귀찮다는 듯이 귀가 달싹인다. 환영이야.
환영과 환영* 사이 갈림길에서 서늘해졌다. 안녕과 불안이 동시에 튀어나온다.
*늘그막의 환영歡迎에는 환영幻影이 따라다닌다.
하굣길
사위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용기 아버지가 거적때기에 뭔가를 둘둘 말아 바작에 지고 귀신 나온다는 판소묏등까지 걸어왔다. 면 소재지에서 만화책 뒤적거리다 해찰한 나는 희끗한 그가 너무도 반가웠으므로 발랄하게 물었다.
뒤야지 폴러 가시는교? 용기 아버지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시다, 저물었는디 얼렁 들어가라. 가뿐해 보이는 지게 멜빵을 거머쥔 채 휘청거렸다. 용기네 막둥이가 숨 놨다는 소문이 며칠 동네를 떠돌다 닭털처럼 가라앉았다. 그뿐이었다.
내가 용기 아버지 나이쯤 되어서야
그 황망한 날의 속울음이 차올랐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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