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벌레식 문답
정원의 이십 주기 추모 모임 단체 대화방에 나는 부영과 경애를 초청했다. 둘 다 들어와서 인사도 하지 않고 메시지를 올리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의 메시지를 읽는 것 같지도 않더니 잠시 뒤 경애가 대화방을 나갔다는 알림이 떴다. 그럴 줄 알았지만 그럴 줄 모르기도 했다. 나는 부영이 먼저 나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부영은 계속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게 대화방을 나가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생각되지는 않았다. 나가는 최소한의 행위도 하지 않는 방치나 무시, 또는 자신이 초청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완전한 망각 같았다. 그렇게 부영은 끝까지 메시지를 읽지 않은 ‘1’의 숫자로 남아 있었다. 올해에도 정원의 추모 모임에 간 사람은 나 혼자였다.
이십 주기라 그런지 그동안 나오지 않던 정원의 대학 때 서클 친구들과 대학원 친구들도 몇 나왔다. 무슨 얘기 끝에 대학원 친구 중 하나가 고경애 선생은 안 왔네요, 했다. 그 친구는 고선생과 같은 대학에 재직하고 있다고, 정원씨하고 고선생이 아는 사이인줄 몰랐다고, 세상이 이렇게 좁다고,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죠, 하고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나는 같이 하숙한 사이라고 말했다. 아, 하숙, 그렇구나. 그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친구 하나가 갑자기 생각난 듯, 참, 그 대학 법인화 문제로 말이 많았다고 하던데, 누구 통해서 들으니까 고선생이 정년 보장이 안 돼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알아보고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했다. 그건 아마 잘 해결됐을 거예요, 하고 앞서 얘기한 친구가 말했다.
내 옆에 뚱하니 앉아 있던 서클 친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지금 말한 고경애 선생이 제가 아는 고경애가 맞겠죠, 동양사학과 고경애, 라고 물었다. 나는 얼른 맞는다고 대답했다. 그 고경애가 그 고경애라고. 그 친구는 살짝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조심스러운 말투로, 요즘 경애가 무슨 법사의 사상에 경도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또 무슨 포럼에 참석해서 발표를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하,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법사가 누구인지 그 포럼이 어떤 포럼인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모임은 한 시간 만에 끝났고 뒤풀이는 없었다. 아는 사람들끼리 각자 뒤풀이를 하는지 몰라도 아무도 내게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다. 같이 가자고 했어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잘 모르겠다. 간곡히 권했으면 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원과 학과 동기도 아니었고 서클 동료도 아니었고 대학원과도 무관했다. 그저 같이 하숙한 사이였을 뿐이었다. 경애와 부영이 있었다면 셋이 뒤풀이를 했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정원의 추모 모임에서 정원에 대한 얘기는 거의 듣지 못하고 경애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 듣다 온 것 같았다. 집 근처 전철역에 내려 부영에게 전화해봤지만 받지 않았다. 정원의 추모 모임에 다녀왔다는 문자를 보내려다 말았다. 경애에게는 전화하지 않았다. 십 년 전 그 사건 이후로 나는 한 번도 경애에게 전화한 적이 없다. 경애도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는 십 년 만에 정원의 추모 모임 단체 대화방에 경애를 초청했을까. 모르겠다. 나는 휴대전화를 꼭 쥔 채 결국 아무 데도 전화할 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래전처럼 쓸쓸해졌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대학 신입생들은 낯선 공간에 던져진 새끼 오리들처럼 초창기에 대학가에서 함께 지낸 친구들을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신입생 시절 우리 넷은 같은 하숙집에 들어 두 명씩 같은 방을 썼다. 부영과 정원이 이층 끝 방에 살았고 그 옆방에 경애와 내가 살았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떠들썩하게 놀 때면 늘 끝 방인 부영과 정원의 방에서 놀았다. 그들이 자리를 제공하고 뒷정리까지 하는 게 미안해서 처음엔 경애와 내가 소주와 막걸리를 사 들고 갔지만 점점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거리낌이 없어졌다. 우리 사이에서는 돈 있는 사람이 베풀면 돈 없는 사람은 누리면 됐다. 이상하게 베푸는 쪽은 주로 부영과 정원이었고 누리는 쪽은 경애와 나였다. 방도 술도.
부영은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통이 커서 늘 우리의 리더 노릇을 했는데, 리더로서의 자의식도 없는데다 리더의 권위를 도전받아도 개의치 않고 부디 나 대신 누가 리더 좀 해줘 하는 식의 임의적이고 편안한 태도를 취했기에 더 리더로서 적합했다. 툭하면 우리를 구박했지만 우리에게 구박도 잘 당했다. 우리 모두 부영을 믿고 의지했지만 룸메이트인 정원이 특히 그랬다.
정원은 상냥하고 조심성이 많고 무서움을 잘 타는 성격이었지만 때로는 급작스러운 광기나 충동에 몸을 맡겨 우리를 놀라게도 했다. 정원은 ‘자유’나 ‘해방’이 들어간 시나 경구, 노래 가사 등을 많이 외우고 있었는데 특히나 그 말을 전공인 불어로 발음할 때면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온몸에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곤 했다. 그러면 우리 또한 그 유려한 발음에 감탄해 덩달아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평소의 정원은 리본이 달린 작은 꾸러미에 포장되어 어딘가로 배달되기를 기다리는 어여쁜 선물 같았고, 부영은 그런 연약한 룸메이트에게 ‘언니스러운’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자기는 제멋대로이면서 정원이 제멋대로 굴다 상처받는 것은 견디지 못했다. 감싸면서 단련시키려 했고 아끼면서 통제했다. 정원이 저거 너무 순진해서, 정원이 쟨 너무 고지식해, 라는 말을 자주 했지만 그러면서도 정원의 순진함과 고지식함을 교정하기보다는 보존하려 했다. 정원만의 스타일을 허물어뜨리지 않으려 했다. 누가 봐도, 있는 그대로 지켜준다, 그런 느낌이었다.
나의 룸메이트인 경애는 정원과는 다른 의미에서 친절하고 부드럽고 예의발랐다. 정원처럼 자유나 해방 같은 것에 열광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규칙적인 일상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자기 얘기를 별로 하지 않고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아 처음에는 선뜻 가까워지기 어려웠지만 침착하고 인내심이 강한데다 나의 퇴폐적이고 불규칙한 생활을 가능한 한 용인해주고 내 괴벽도 잘 받아주는 편이라 같이 사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인지 몰라도 어느 순간, 얘가 나를 참아주고 있구나, 묵묵히 견디고 있어, 하는 느낌이 강하게 엄습할 때면 나는 숨이 막힐 만큼 높고 단단한 벽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무턱대고 믿었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는 룸메이트인데다, 어쩌면 경애와 대척되는 나의 엉망진창인 삶의 방식이 경애의 높고 단단한 외벽을 뚫고 부영과 정원은 모르는 경애만의 어떤 내밀한 지점으로 파고들어가는 치트 키가 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예를 들어 나는 경애가 두 손을 꼭 잡고 입가를 천천히 올려 미소 짓는 게 엄청난 당황의 표식인 것도 알았고, 웬만하면 놀란 티를 내지 않는 경애가 진심으로 놀라면 표정은 굳은 채로 두 눈썹만 들썩들썩, 누가 보면 기분좋은 일이라도 있는 듯이 기묘하게 춤추는 것도 알았다. 무엇보다 좋지 않은 일을 당했을 때면 면벽을 하고 약간 돌출한 입을 오물거리면서 집요하게 자기만을 탓하고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하는 것도 알았다. 누가 봐도 경애는 남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을 애였지만, 그래서 나는 혹시라도 경애가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절대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것도 알았던 것 같다.
나로 말하자면 대학에 입학하면서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감당 못하고 분방하고 무책임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수업은 거의 빼먹다시피 하고 모든 시위와 토론, 뒤풀이에 꼬박꼬박 참석했고 밤늦게 하숙집에 돌아와서도 누구든 붙잡고 더 마시려 했다. 처음엔 넷이 같이 마시다 결국 내 앞에 남는 상대는 하나였는데, 부영이 마셔주다 정원에게 물려주고 정원이 마셔주다 힘에 부치면 경애가 마셔주는 식의 내 음주 상대 노역이 거의 일주일 주기로 되풀이되곤 했다. 나는 관계에 취약해서 누군가와 갈등하거나 불화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했고 그럴 때마다 재빨리 술로 도망치곤 했는데, 바로 그 유약한 변덕스러움 때문에 일 년 내내 누군가와 갈등하거나 불화했으므로 1학년이 끝나갈 즈음에는 거의 알코올중독자와 비슷한 행태의 삶을 살고 있었다.
2학년이 되면서 우리는 하나씩 하숙을 옮기고 자취를 하고 친척집에 들어가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만나려 했고 서로의 생일을 결사적으로 챙겼다. 한동안 나는 1학년 때의 버릇을 못 버리고 술에 취하면 나의 새끼 오리 친구들을 찾곤 했다. 경애는 특유의 인내심으로 나를 받아주었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의 적극적인 공감을 표하지 않아 심심하고 서운했다. 정원은 내 말을 의심 없이 믿어주고 내 편을 들어주며 함께 흥분하기 일쑤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안해, 준희야, 네가 술 취해서 만나자고 하면 만나지 않겠어, 라고 울먹이며 선언했다. 그후로 정말 내가 술 먹고 건 전화는 조용히 끊어버렸는데 이런 정원답지 않은 단호한 대처에는 분명 부영의 조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부영은 제멋대로 내 전화를 받거나 안 받았다. 만나면 어어하며 대충 듣는 시늉만 할 때도 있었지만 그 인간이 아주 미쳤네 미쳤어 우리 준희 어쩌냐 하며 격하게 공감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부영마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사냥감을 잡듯 내게 매서운 말을 휙휙 쏘아 꽂는 날이 왔다.
진지하게 묻는다, 준희야, 너한테 나는 뭐냐? 정원이하고 경애는 뭐냐? 너는 진짜 술 먹으면 궁중 비화에 나오는 이상한 내시나 상궁들 있지, 딱 그렇다. 갈등과 암투만 먹고 사는 인간 같다. 거기에 상관없는 우리까지 휘몰아 넣는다. 준희 너도 다 알면서 그런다. 어렸을 때 아무도 안 받아줘서 뒤늦게 응석 부리는 건 알겠는데, 한 일 년 반 했으면 됐지. 우리 이제 곧 3학년이 될 텐데 더 질질 끌래? 그래, 너도 뭐 언젠가는 질릴 날이 오겠지. 난 그래서 별로 네 걱정은 안 한다. 너는 잘 살 거다.
종합하면 이런 요지의 말들이었다. 아, 세상 무서운 년! 나는 술 먹고 점점 부영에게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전화하지 않게 되었다.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섰다가도 내 차례가 되면 쓸쓸히 돌아서곤 했다. 누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을까. 갈등과 암투만을 먹고 사는 인간이. 새끼 오리 친구들에게 전화를 못하게 된 후로 나는 술 먹고 자주 다쳤다. 낯선 고립감이 이리저리 쏠리면서 신체의 균형을 망가뜨리는 것 같았다. 술에서 깨고 나면 어딘가 욱신거렸고 팔꿈치나 무릎에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어렸을 때의 다친 마음이 뒤늦게 몸으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부영의 말대로 응석받이였던 나는 살아남았고 부영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정원은 어떤 응석도 없이 갔다. 그리고 정원이 떠난 지 이십 년 되는 날 밤 오래전의 내 못된 술버릇이 모조리 도졌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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