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
영선은 이렇게 말하고 영미를 돌아보았다. 영미는 운전대를 잡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영선이 잠시 기다렸지만 대답이 없었다.
“지난번 면회에서 걔가 우리를 아주 잡아먹으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환이까지 잊어버리다니, 걔가 어떻게 수환이를……”
말하는 도중에 영선은 차가 갑자기 속도를 내는 걸 느꼈다. 커브를 돌 때 그녀는 중심을 잡지 못해 다급히 창문 위 손잡이를 부여잡았다.
“영미야! 속도 좀 늦춰!”
속도는 조금 늦춰졌지만 영선에게는 여전히 빠른 것으로 생각되었다. 국도변 나무들이 휙휙 지나갔다. 영선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이고, 하나님 아버지! 얻어 타고 다니는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영선이 보란 듯이 안전벨트를 바짝 조여 맸지만 영미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뜬 채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너도 낼모레면 환갑인데 운전할 때 그렇게 흥분하는 거 아니다.”
영선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오금을 박은 뒤 열선이 켜진 좌석에 몸을 기댔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영미가 불쑥 말을 꺼냈다.
“뭘 더 바라겠어?”
영선은 영미를 힐끗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도 맞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어쨌든 더는 나가서 술 먹고 돌아다니진 못할 테니까.”
“내 말은, 언니하고 나하고……”
영미의 말에 영선이 좌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 우리가 뭐?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니? 영경이 아파트도 팔아버리는 게 좋겠지? 물려줄 자식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영미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우리가 뭐 어떻게 할 건 하나도 없고.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니 됐지 않냐고. 뭘 더 바라겠냐고.”
영미의 말을 끝으로 차 안은 엔진 소리와 스쳐가는 바람 소리 외엔 조용했다. 바깥공기는 아직 쌀쌀한데 차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봄볕은 따스했다.
수환과 영경은 12년 전 마흔셋 봄에 작은 웨딩홀에서 처음 만났다. 수환은 신랑의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영경은 신부의 대학교 동창이었다. 신랑 신부가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인데다 쌍방이 모두 재혼이었기에 식은 매우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하객은 양쪽을 합쳐 50명이 넘지 않았다. 중년의 신랑 신부는 신혼여행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재혼의 목적이 거기 있기라도 한 듯 식이 끝나자마자 양쪽 친구들을 자신들의 집에 모아놓고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술자리는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새벽에 수환은 술이 억병으로 취한 영경을 업어서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다음 날부터 그들은 매일 만나 함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 수환이 술을 잘 마시지 못했으므로 술자리는 늘 영경이 만취해서 뻗는 걸로 끝났다. 그러면 수환은 첫날 그랬던 것처럼 영경을 업어 그녀의 아파트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번거로운 과정은 일주일 만에 수환이 옥탑방을 정리하고 영경의 아파트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그후 그들은 딱 한번 빼고는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었다.
면회실로 들어선 영경은 소파에 혼자 앉아 있는 기순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휠체어를 밀고 갔다. 영경은 수환이 탄 휠체어를 기순의 소파 옆에 고정하고 자신은 기순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어여 와라. 어여 와.”
틀니를 하여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기순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수환은 그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밥은 먹었냐?”
기순이 어물거리는 소리로 물었다.
“먹었지, 그럼.”
수환이 말했다.
“밥은 잘 주냐?”
“그럼, 잘 주지.”
기순이 이번엔 영경을 보았다.
“아가, 너도 밥은 먹었냐?”
“네, 먹었어요.”
“그래, 아가, 너는 몸이 약해서 밥을 많이 먹어야 한다.”
영경의 귀에 정확히 그렇게 들린 건 아니었지만 대충 그런 말일 터이므로 영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수환이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형은?”
기순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고?”
수환이 목소리르 높였다.
“형은? 형은, 어디, 갔냐고?”
“응. 네 형은 담배 피우러 나갔어. 곧 들어올 거야. 아직도 못 끊고 저런다.”
수환은 수철이 곧 들어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순은 드디어 때가 왔다는 듯 검버섯으로 뒤덮인 두 손으로 수환의 왼손을 꼭 붙들고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수환아. 우리 수환이. 불쌍한 우리 수환이……”
기순은 한동안 울었다. 수환은 기순에게 손을 잡힌 채 영경을 보았다. 영경은 멍한 눈빛으로 기순의 머리 위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엄마, 기운 ᄈᆞ지신다. 그만해.”
수환이 슬그머니 손을 뺐다. 기순이 주머니에서 거즈 손수건을 꺼내 눈곱을 닦으며 말했다.
“내가 밥만 끓여먹을 수 있으면 요 근처에 방 얻어가지고 살면서 매일 와서 너를 이렇게 만져볼 것을.”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 형이 그러라고 하겠어”
“네 형이 말도 못 꺼내게 해.”
시무룩하던 기순이 갑자기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이게 다 환이 네가 쇠를 많이 만져 이렇게 된 거다.”
뻔한 레퍼토리였지만 수환은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건 아니라니까.”
“뭐가 아니야? 젊어서부터 쇠 깎고 불질을 해서 그런 거야.”
기순이 분연히 말했다.
“아니야. 그래서 생기는 병은 따로 있고 나는 그 병이 아니라니까.”
“다들 그러더라. 몸에 쇳독이 올라서 병이 난 거라고. 안 그러면 젊은 나이에 왜 이런 병에 걸려?”
“엄마, 나 안 젊어.”
수환은 웃으며 영경을 보았다.
“쉰다섯이 왜 안 젊어? 공장 차려놓고 쇠 만지고 불질 안 했으면 네가 왜 이런 병에 걸려? 눈에 아다리 걸려가면서 그 힘든 일 해서 다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아이고, 내가 그년을 어디서라도 만나면 요절을 내도 시원찮다만은.”
기순의 분명치 않은 넋두리를 들으며 수환은 계속 영경을 바라보았다. 영경은 똑같은 표정이었다. 수환이 가장 잘 알고 있고 가장 두려워하는. 넋이 나간 듯 텅 비어 있는 가면의 표정……
수철은 오전 면회 시간이 다 끝나갈 때쯤에야 들어와 말없이 기순의 뒤에 서 있다가 면회 종료 벨이 울리자 다시 울먹이기 시작하는 기순을 일으켜세웠다.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영경도 벨소리를 듣자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철이 기순을 데리고 면회실을 나갔고, 영경이 수환의 휠체어를 밀고 그 뒤를 따랐다. 본관의 현관 입구에서 수환은 환갑 넘은 형이 여든 넘은 노모를 10년도 더 된 낡은 자동차의 뒷좌석에 태우고 요양원 정문을 빠져나가는 걸 바라보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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