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한국전쟁의 타자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존재는 기이할 정도로 지워져 있다. 운산전투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1950년 10월 25일부터 2년 9개월 동안, 한반도에 들어온 중국인민지원군의 수는 연인원 240만을 넘었고, 최대 규모가 주둔했던 1953년 5월경에는 135만에 달했다. 백선엽은 한국전쟁 중 처음 3개월을 제하면 인민군은 중공군의 향도向導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의 대부분이 사실상 중공군과의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희미하다.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이자 병참부사령관이었던 홍 쉐즈洪學智의 항미원조전쟁 회고록이 1992년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을 때 역자 서문을 보면, 홍 쉐즈는 적장이었던 자신의 책이 한국에서 출간된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을 뿐 아니라 한국어판 서문을 쓰는 것조차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당시는 지구적 탈냉전의 전환적 분위기 속에서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은 직후였다. 홍 쉐즈의 반응은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감각하는 우리와 중국 간의 작지 않은 온도차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뿌리 깊은 반공 의식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한국전쟁에 관하여 중국을 적대시하는 정서는 이상할 만큼 미미했던 것이다. 홍석률은 한국전쟁 중 중공군의 존재를 적으로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승만의 극단적 멸공 논리를 지적한 바 있는데, 우리의 한국전쟁 기억에 중공군의 존재가 이토록 미미한 데에도 혹 유사한 논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에서 비극적 기억은 결코 합당한 절차 없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지속적인 반추와 재평가를 통해 화해를 이루지 못하면 언젠가 한층 기형적인 형태로 되돌아온다. 2018년 한반도에 돌연 평화 무드가 조성되었을 때 출현했던 ‘중국 패싱론’이 그런 사례가 아니었을까 싶다. 한국전쟁은 내전인 동시에 전세계 20여개국이 참전한, 자칫 3차대전으로 번질 수도 있었던 국제전이었다. 우리에게는 동족상잔의 비극이지만,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미중 적대구조를 축으로 하는 동아시아 냉전체제가 형성되는 역사적 계기였다. 남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막대한 인력과 국력을 쏟아부은 미국과 중국 역시 한국전쟁의 주요 당사자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전쟁의 행위자로서 중국의 역할은 뒤에서 방조한 소련은 물론 어떤 의미에선 전쟁을 일으킨 북한보다 더 컸다. 그리고 중국은 정전회담에 조인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종전 선언에서 중국을 배제해야 한다는 사고는 어디서 온 것일까. 물론 거기에는 ‘사드 논란’ 이후 한국사회에 증대한 반중감정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원적으로는 우리의 무의식 어딘가에 잠복한,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존재를 적으로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는 모종의 뒤틀린 타자 의식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최근 중국에서 벌어지는 항미원조전쟁의 향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복잡하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인데, 중국이 제작한 영상물에 나타나는 한국전쟁의 모습은 그야말로 낯설다. 마치 영화 「디 아더스The Others」처럼, ‘우리’의 전쟁과 ‘그들’의 전쟁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발생했지만 다른 차원에 속해 있어 서로 만나지 못하는 느낌이다. ‘우리’의 한국전쟁에 중국이 일관되게 삭제되었다면, ‘그들’의 항미원조전쟁 속의 한국 역시 극히 희미하다. 정전 70년이 지났지만 한국전쟁은 여전히 철책선에 갇혀 있다. 전쟁의 기억과 기념은 각자의 공간에서 독백으로 진행되었고 그나마도 서로 다른 이유에서 알게 모르게 억눌려왔다. 그러다 최근 미중 대결 국면을 계기로 중국 내 항미원조전쟁에 대한 금기가 일거에 걷히면서 ‘그들’의 모습이 돌연 우리 시야에 나타난 것이다.
충무로에서 기피되는 한국전쟁 영화가 중국 극장가의 성시를 이루는 불편한 상황은 물론이고, 반대편의 시각에서 그려진 한국전쟁의 모습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중국의 민족주의, 애국주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비판하는 목소리로 한국의 여론 공간이 비등했고, 심지어 항미원조전쟁 기념 글귀를 SNS에 게시한 중국 소녀의 방송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를 금지해달라는 요청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오르는 해프닝도 있었다. 2021년에는 중국의 항미원조전쟁 영화 「금강천金剛川」을 수입하려던 국내 배급사가 여론의 포화를 맞고 사과하기도 했다. 상당히 오랜 시간 우리의 한국전쟁 기억에 ‘적으로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중국이라는 베일 벗은 타자의 얼굴을, 우리는 아직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 보면, 복수의 행위자들 사이의 서로 다른 기억과 서사, 감정의 충돌이 70년이나 지연되었다가 이제야 문제가 된 상황이야말로 기괴한 것 아닐까. 한국전쟁이 복수의 당사자들에게 서로 다른 이름으로 명명되고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되는 것은 어느정도 불가피하다. 특히 한국전쟁을 반추하고 극복하려는 지적 작업에 당사자들 모두가 소극적이었던 그간의 상황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탈냉전이라는 말조차 가물거리는 지금, 한국전쟁의 언저리에는 냉전의 금기가 고집스레 들러붙어 있다. 한국전쟁이 우리에게 무엇인지도 여전히 미완의 질문이지만, 적으로 싸웠던 ‘그들’에게 이 전쟁이 무엇이었는지, ‘그들’은 지금껏 이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거나 망각(당)했는지, 또 이 전쟁은 ‘그들’의 현재에 어떤 유산으로 남아 있는지, 우리는 좀처럼 아는 바가 없다.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항미원조전쟁 붐을 바라보는 우리의 불편하고 불안한 정서 밑바닥에는 이러한 무지도 한몫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은 중국에 한국전쟁, 즉 항미원조전쟁이 무엇이었나라는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은 항미원조전쟁의 기억이 20세기 대부분의 시간 동안 중국에서 억눌려왔다는 것이다. 70년 가까이 지속된 미중의 적대적 공조 체제는 중국에서 항미원조전쟁이 공적 공간에 진입하지 못하고 주변을 배회한 주요 원인이었다. 좀더 안으로 들어가면, 1950년대말에 시작된 중소 갈등 역시 항미원조전쟁이 모호한 정치적 금기가 되는 과정에 내밀하게 작용했다. 이 두 요소가 현대사의 굴곡과 뒤얽히면서, 항미원조전쟁은 오랫동안 중국 대중들로부터 기억의 유배상태였던 것이다. 이 책 2장에서는 오랜 금기와 망각의 상태에 방치되었던 항미원조전쟁이 2000년대 들어 귀환하는 평탄치 않은 과정을 2000~2010년대 작품들을 통해 살펴보았다.
중국에서 항미원조전쟁이 대대적으로 소환되는 최근 몇 년의 상황은 지난 70년을 돌아보면 매우 이례적이고 또 문제적이다. 수백만을 전장으로 내몰고 수십만을 희생시켰음에도 합당한 기념공간을 갖지 못했던 이 전쟁을 미중 대결이라는 정치적 위기를 맞아 또다시 대중을 동원하는 수단으로 꺼내드는 상황은 중국인들에게도 비극적이다. 그러나 악성적인 정치적 환경을 계기로 중국 문화예술계에서 항미원조전쟁에 걸려 있던 오랜 금기가 해제된 것 자체는 복잡한 양면성을 지닌다. 「장진호」처럼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워 애국주의를 부추기는 ‘주선율 블록버스터’가 주된 흐름을 이루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의 깊게 보면 「압록강을 건너」와 같은 모범적 혁명사극조차 주선율의 굵직한 조직 틈새로 배어 나오는 기층의 시선과 목소리를 완전히 차단하진 못하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