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마늘
(전략)
음식은 천국이 되었지만 경제학은 블랙홀로 빠져들고
내가 요리하는 법을 익히는 사이 영국의 음식 혁명도 새롭고 결정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나는 영국 사람들이 1990년대 중반 어느 여름날, 마치 한여름 밤의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네 음식이 솔직히 말해서 정말 형편없다는 사실을 집단적으로 깨닫는 장면을 상상하곤 한다. 일단 자기 나라 음식이 시쳇말로 ‘구리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전 세계의 요리를 받아들일 자유의 문이 열린다. 1990년대 영국인에게 바로 그 문이 열린 것이다. 이제는 태국식 대신 인도식을 고집할 필요도, 멕시코식 대신 튀르키예식을 더 좋아할 이유도 없었다. 맛있는 음식은 모두 다 환영이다. 얼마나 황홀한 자유로움인가! 모든 선택지를 동등하게 놓고 고려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십분 활용한 영국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세련되고 다양한 음식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되었다.
영국은 음식 천국이 되었다. 런던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새벽 1시에 거리에 세워진 밴에서 사 먹는 값싸면서도 훌륭한 튀르키예식 되네르 케밥döner kebab, 회전 구이 케밥에서부터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비싼 일본식 가이세키会席 요리연회용 코스 요리에 이르기까지 상상하는 모든 것이 다 있다. 강렬하고 대답한 한국식에서부터 요란하지 않지만 배 속까지 뜨끈하게 데워 주는 폴란드식까지 맛도 무궁무진하게 다양하다. 이베리아반도, 아시아, 잉카 문화를 모두 포용한 섬세하고 복잡다단한 페루식 요리에서부터 단순하면서도 풍부한 맛을 뽐내는 아르헨티나 스테이크 사이에 존재하는 갖가지 음식 중에서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 대부분의 마트와 식료품점에서는 이탈리아, 멕시코, 프랑스, 중국, 카리브해 연안국, 유대 지역, 그리스, 인도, 태국, 북아프리카, 일본, 튀르키예, 폴란드 재료를 구할 수 있고, 심지어 한국식 재료도 가끔 눈에 띈다. 특화된 조미료나 재료도 잘 찾으면 손에 넣을 수 있는 확률이 높다. 1970년대 말에 교환학생으로 옥스퍼드에 와 있던 미국인 친구가 올리브유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약국뿐이었다던궁금한 독자를 위해 부연 설명하자면 약국에서는 귀지를 녹여서 제거하는 용도로 올리브유를 판다 바로 그 나라와 지금 이 나라가 같은 나라라니 믿어지는가?
물론 이 현상은 전 세계적인 트렌드다. 교역, 이민과 해외여행이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외국 음식에 더 큰 호기심을 보이고 열린 마음으로 낯선 음식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은 다르다―정직한 자기 인식음식에 한해서을 한 순간부터 이 나라는 음식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풀었다는 면에서 다른 나라와 매우 다른, 어쩌면 유일무이한 나라가 되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처럼 원래 음식 전통이 강하고 음식에 대한 견해가 확고한 나라들은 변화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나라들에서는 훌륭한 그 나라 음식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식 패스트푸드 식당, 싸구려 중국 음식점, 팔라펠falafel이나 케밥아주 맛있을 수도 있지만 늘 그렇지만은 않다 가게, 가성비 안 좋은 엄청나게 비싼 일본 음식점 등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거의 없다.
내 음식의 우주는 빛의 속도로 확장되고 있었지만 내가 속한 다른 우주인 경제학 분야는 슬프게도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학은 서로 다른 비전과 연구 방법을 자랑하는 다양한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이 활동하는 분야였다. 가장 굵직한 학파만 해도 고전학파Classical, 마르크스주의Marxism, 신고전학파Neoclassical, 케인스학파Keynesian, 개발주의Developmentalism, 오스트리아학파Austrian, 슘페터학파Schumpeterain, 제도주의Institutionalism, 행동주의Behaviorism 등 다양했다. 이 수많은 학파의 경제학자들은 서로 공존했을 뿐 아니라 상호 교류를 하기도 했다. 어떨 때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오스트리아학파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 그리고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케인스학파와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그랬듯 목숨을 걸고 서로 죽일 듯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파 간의 상호 교류가 더 점잖게 이루어진 경우도 많았다. 각 학파는 활발한 토론뿐 아니라 세계 각국 정부가 시행한 정책 실험을 통해 자신들의 논점을 갈고닦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학파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하기도 했고많은 경우 제대로 인정하지 않은 채, 서로 다른 이론들을 융합하는 시도가 학계 일부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1970년대까지의 경제학 분야는 서로 다른 장단점을 가진 수없이 다양한 음식 문화가 공존하며 경쟁을 벌이는 요즘의 영국 음식 분야와 닮은 데가 많았다. 모두 각자의 전통에 긍지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배우지 않을 수가 없고, 그 과정에서 의도하든 하지 않든 크고 작은 융합이 많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이후 경제학 분야는 1990년대 이전의 영국 음식 문화처럼 되어 버렸다. 한 가지 학문적 전통, 다시 말해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메뉴의 전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학파와 마찬가지로 신고전학파 또한 장점이 있다. 그리고 심각한 단점도 있다. 신고전학파가 경제학계 전체를 장악하게 된 경위는 너무나 복합적이고 복잡해서 이 책에서 살펴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원인이 어찌 되었든 간에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주류 경제학으로 자리 잡았고일본과 브라질, 그리고 그보다는 조금 정도가 덜하지만 이탈리아와 튀르키예가 소수의 예외에 속한다, 그 영향력이 너무 강해져서 이제는 ‘경제학’과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동의어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지경이 되었다. 이런 식의 지적 ‘단일 경작monocropping’은 이 분야의 지적 유전자 풀을 좁히는 결과를 낳았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다시 말해 대다수 경제학자들 중 다른 학파의 장점은 말할 것 없고, 심지어 다른 학파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이라도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나마 다른 학파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 학파들이 신고전학파에 비해 열등하다고 선언한다. 그들은 일부 학파, 가령 마르크스주의 같은 학파는 “경제학도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른 학파들이 과거에 내놓은 몇 안 되는 유용한 통찰, 가령 슘페터학파의 혁신에 관한 아이디어나 행동주의학파의 인간의 제한된 합리성에 대한 아이디어 등은 ‘주류’ 경제학, 다시 말해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이미 융합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이 융합이 아니라 베이크드 포테이토를 올린 피자처럼 단순히 ‘추가’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경제학이 우리의 정체성과 사회를 바꾼다
독자들 중에는 학자들 몇이 좁아터진 소견으로 지적인 단일 경작에 매달리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질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할 만한 질문이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경제학은 북유럽 고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나 수백 광년 떨어진 우주 공간에 있을지도 모르는 지구 같은 행성을 찾는 학문과 다르다고 답하곤 한다. 경제학은 우리 삶에 엄청나게 크고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리 모두는 경제학 이론이 세금, 복지 지출, 이자율금리, 노동 시장 규제 등의 정부 정책에 영향을 주고, 이런 정책은 우리 일자리와 노동 환경, 임금, 주택 담보 대출과 학자금 대출 상환금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경제학 이론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고생산성 산업을 발전시키고, 혁신을 꾀하고, 지속가능한 친환경적인 개발을 가능케 하는 정책 수립에 영향을 끼쳐 그 경제 체제의 장기적·집단적 발전 가능성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경제학은 개인적이건 집단적이건 경제적 변수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 다시 말해 우리 자신에 대한 규정 자체를 변화시킨다.
정체성에 대한 영향은 2가지 방향에서 일어난다. 우선 경제학은 개념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각 경제학 이론은 서로 다른 특징을 인간성의 본질로 추정한다. 따라서 그 시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경제학 이론은 동시대인들이 무엇을 가장 중요한 ‘인간의 본질’로 생각하는지에 영향을 준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 추정하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지난 몇십 년 동안 세계를 주름잡으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루저’라고 조롱당하거나 (이기적인) 저의를 품고 있다고 의심받는다. 행동주의나 제도주의 경제학 이론이 제일 주목받는 세상이었다면 인간이 더 복합적인 동기를 지닌 존재고, 이기적 동기는 그중 하나일 뿐이라는 믿음이 팽배했을 것이다. 이런 학파들의 시각을 따른다면 사회를 어떻게 설계하는지에 따라 여러 동기 중에 특정한 것을 장려할 수 있고, 심지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동기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학은 사람들이 무엇을 정상으로 보는지, 서로를 어떤 식으로 보는지, 그런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에 영향을 준다.
경제학은 또 경제가 발달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며, 그에 따라 우리가 생활하고 일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고, 그 결과 우리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개발도상국이 공공 정책 개입을 통해 산업화를 촉진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아닌지에 대해 경제학 이론마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 나라의 산업화 정도는 다른 유형의 개인을 만들어낸다. 가령 더 산업화된 나라 사람들은 농업 사회 사람들에 비해 시간을 더 잘 지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이―그리고 거기에 따라 나머지 일상도―시계에 따라 조직되기 때문이다. 산업화가 진행되면 노조 운동도 촉진되는데 공장에서는 다수의 노동자가 한데 모여 일을 하고, 농장 같은 환경보다 다른 사람과의 협조가 훨씬 더 잘 이루어져야 작업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노조 운동은 결과적으로 평등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는 중도좌파 정당을 낳는데, 이런 정치 세력은 공장이 사라져도 약화는 될지언정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지난 몇십 년 사이 부자 나라들에서 목격된 현상이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학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성격에 영향을 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서로 다른 경제학 이론은 개인의 형성에 서로 다른 영향을 끼치고, 그에 따라 그 개인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사회도 달라진다. 가령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산업화를 권장하는 경제학 이론은 평등주의적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 큰 세력을 이루는 사회를 가능케 할 것이다. 다른 예로 인간이 (거의) 전적으로 이기적인 동기에서 움직이는 존재라고 추정하는 경제학 이론을 신봉하는 사회에서는 협력 관계를 형성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둘째, 각각의 경제학 이론은 ‘경제학적 영역’의 경계를 각자 다르게 규정한다. 많은 이론에서 필수 사회 서비스로 간주하는 의료, 교육, 상하수도, 대중교통, 전기, 주거 등을 민영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다면, 그 이론은 ‘1인 1표’라는 민주 사회의 원칙을 축소하고 ‘1원 1표’라는 시장 논리를 확장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제학 이론에 따라 (소득이나 부의) 불평등‘12장 닭고기’ 참조, (노동자 대 자본가, 소비자 대 생산자 등의) 경제적 권리‘2장 오크라’ 참조 같은 경제학적 변수에 부여하는 중요성과 비중이 달라진다. 이런 차이는 결국 사회에서 빚어지는 갈등의 정도에 영향을 끼친다. 소득 불평등이 크거나 노동자 권리가 잘 보장되지 않으면 힘을 가진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세력에 돌아가는 파이의 크기가 작아짐에 따라 하부 계층 안에서의 갈등도 악화된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경제학은 소득, 일자리, 연금 등에 관한 학문이라고 좁게 규정할 때보다 훨씬 더 근본적으로 다양한 면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래서 나는 우리 모두가 경제학의 원리를 몇 가지라도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더 중요한 차원, 즉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더 나은 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내가 이런 주장을 하면 경제학은 보통 시민의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것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눈이 돌아가게 어려운 전문 용어와 기술적인 논쟁, 복잡한 수학공식과 통계가 난무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갈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경제학 이론이 난데없이 나타나 우리가 몸담은 세상 전체를 뒤집어엎고 주물럭거리는 것을 “절망 어린 침묵 속에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가 만들어지고 돌아가는 방식에 만족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자신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원칙과 정부의 철학이나 정책이 일치하는가? 세계적인 거대 기업과 평범한 노동자가 공평하고 정당하게 세금 부담을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어린이가 잠재력을 100퍼센트 발휘해 가장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사회의 가치가 공동체, 공동의 책임, 모두가 공감하는 목표를 향상시키는 방향과 일치한다고 믿는가? 독자들의 답이 어떨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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