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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신의 계시를 받다
― 이슬람 국가의 탄생
권능의 밤
40세의 한 중년 사내가 산속 동굴에서 날마다 깊은 명상에 빠져 있었다. 그곳은 메카Mecca 인근의 히라 산山이었다. 이슬람력歷으로 라마단월月 하순 어느 날, 그는 걷잡을 수 없는 힘에 붙들려서는 어디로부턴가 들려오는 음성을 듣게 된다.
“읽어라!”
사내는 대답했다.
“저는 읽고 쓸 줄 모릅니다.”
그러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네 알라하나님, 신의 이름으로. 알라께서는 한 방울의 응혈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꾸란》 96:1-2
사내는 훗날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천사 가브리엘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처음 그 목소리에 사로잡혔을 때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채 덜덜 떨기만 했다. 그 사내의 이름은 무함마드. 메카에서 무역상을 하면서 부유한 삶을 살던 그는 언제부터인가 히라 산에서 명상에 빠져 들었다. 그러다가 서기 610년 라마단월 하순 어느 날, 천사를 통해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된 것이다. 천사의 목소리를 듣게 된 무함마드는 몸을 떨며 기어가다시피 해서 겨우 집에 도착했다. 놀란 그의 아내 카디자는 남편에게 담요를 덮어주며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다. 무함마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아내에게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이 정신이상이 아닌지 스스로 의심했다.
천사를 통한 신의 계시는 이후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알라는 무함마드를 신의 뜻을 대신 전하는 ‘예언자’로 발탁했다. 그리고 알라를 알지 못한 채 다른 신을 섬기는 인류에게 올바른 길을 전하고 그들이 알라에게만 예배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맡겼다. 카디자는 남편에게 일어나는 일이 실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남편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신의 뜻에 복종했다. 카디자는 역사상 최초의 무슬림이슬람을 따르는 사람으로 기록됐다. 훗날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가 천사의 음성을 듣고 《꾸란》의 첫 번째 구절을 전달받은 그날 밤을 ‘권능의 밤[라일라트 알-카드르], Laylat al-Qudr’이라고 일컫는다. 또한 모든 무슬림들은 바로 그날을 기려 라마단월 한 달 동안 금식을 하면서 지낸다. 지금도 라마단Ramadan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가장 큰 행사로 여겨진다. 한편 무함마드는 사람들에게 천사로부터 계시받은 신의 메시지를 전했다.
“알라는 모세와 예수를 예언자로 보내 자신을 알리셨지만, 여전히 알라를 잘 모르는 불행한 인류를 위하여 마지막 예언자로 나 무함마드를 보내셨다!”
“모세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대교나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기독교 모두 알라의 가르침을 부분적으로만 알고 따르는 것이니, 온전한 알라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야 한다!”
처음에는 무함마드의 외침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박대하고 무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무함마드를 따르는 제자들이 생겨났다. 메카의 가난한 계층 출신들이 추종자의 주를 이루었지만 무리 중에는 급진적인 사회 변화를 갈망하는 부유한 가문의 젊은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전하는 종교를 ‘복종’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슬람Islam’으로 칭했고 자신을 따르는 공동체를 ‘움마Ummah’라고 불렀다. 당시 아라비아 중개 무역의 중심지였던 메카에는 빈부격차가 심했는데, 일부 권력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광경이 흔한 모습이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에 맞서 무슬림들 간의 평등을 강조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부르짖었다. 무함마드의 가르침은 유목민들의 수평적인 부족 문화와 맞물려 메카 사회 전반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나아가 무함마드는 메카에 만연하던 다신교 전통을 강력히 비판했다.
“오직 유일신이신 알라에게만 예배하라!”
이러한 무함마드의 설교에 메카 사람들은 반감을 가졌고 눈살을 찌푸렸다. 메카의 기득권층 입장에서는 기존의 사상과 질서를 위협하는 신흥세력이 반가울 리 없었다. 무함마드가 중심이 된 무슬림 집단은 종교공동체였지만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기존의 지배세력들은 위협을 느꼈다. 예언자를 따르는 세력이 날로 커지자 메카의 귀족들은 무함마드와 움마를 박해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무함마드는 10년 동안 메카에서 알라의 말씀을 전했다. 하지만 핍박은 날로 심해져갔다. 그러다가 무함마드의 아내 카디자를 포함해 무함마드를 지지하고 보호해주던 이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무슬림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622년 무함마드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메카의 북쪽에 자리한 오아시스 도시 야스리브Yathrib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가 추종자들과 함께 메카에서 야스리브로 이주한 사건을 ‘헤지라Hegira’라고 부르며 거룩하게 기념했다. 야스리브는 나중에 ‘도시’라는 뜻을 가진 메디나Medina로 이름이 바뀐다. 훗날 이슬람 제국은 무함마드와 그 일행이 메디나에 도착한 날인 622년 7월 16일을 기원으로 삼아 이슬람력을 만들었다.
이슬람 이전의 중동
이슬람이 일어나기 1세기 전의 중동은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두 초강대국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지역이었다. 자연스럽게 비잔틴 제국의 국교 기독교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교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배화교. 두 세력이 중동 지역의 종교를 양분하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의 영역은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레바논 등 레반트 지역과 소아시아아나톨리아였고 사산조 페르시아는 이란과 이라크 일부 지역, 그리고 중앙아시아 일부 지역을 지배했다. 당시 아라비아 지역에는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뿐 아니라 유대교와 마니교 등을 따르는 사람들도 상당수 존재했으며 토착종교인 다신교도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중동의 기독교 세계가 모두 비잔틴 제국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당시 소아시아와 시리아 등은 비잔틴 제국의 속주였는데, 이들 지역 주민들 중 상당수가 지배 세력인 비잔틴에 큰 거부감이 있었다. 이 지역은 과거 로마 제국이 정복한 땅으로 이후에도 유럽에서 건너온 그리스·로마 세력의 정치적 지배에 저항하는 기운이 강했다. 중동 지역의 교회들 역시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비잔틴 제국의 기독교인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켜 ‘멜키파왕당파’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이는 비잔틴 교회와의 교리상 충돌로 나타났다.
451년 비잔틴 제국의 마르키아누스Marcianus, 396~457년 황제는 칼케돈Chalcedon에서 각 지역의 교회 대표들을 소집해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결정하는 공의회를 열었다. 일명 ‘칼케돈 공의회’라고 알려진 이 회의에서 ‘양성론’과 ‘성모사상’이라는 정식 기독교 교리가 확정됐다.
·양성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이고 인성은 인간과 동일한 실체이며 두 개의 본성은 분리될 수 없다.
·성모사상: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인 예수를 낳은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이다.
이 같은 교리의 확정은 비잔틴 제국의 공식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마르키아누스 황제는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기독교 세력을 탄압했는데, 탄압 대상은 크게 둘이었다. 하나는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결합한 하나의 본성만을 지닌다’고 주장한 단성론파였다. 주로 이집트와 시리아의 교회들이 단성론을 따랐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의 신격과 인격은 완전히 구분, 분리되는 본성으로 마리아가 예수를 낳을 당시 예수는 (신격이 없는) 인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머니로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한 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였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시리아와 이라크 등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라크 지역의 기독교 국가였던 라흠 왕조 역시 네스토리우스파였는데, 비잔틴 제국의 탄압을 피해 사산조 페르시아의 편에 붙었다. 486년 사산조는 네스토리우스파를 페르시아의 공식 기독교로 선포했다. 이후 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의 영향권이 중앙아시아 지역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훗날 이슬람이 빠르게 확산된 중앙아시아 지역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이슬람보다 앞서 일신교 신앙을 전한 것이었다.
이슬람이 시작되던 시점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한샤‘왕중왕’이란 뜻으로 페르시아 황제를 일컫는 칭호는 수십 년 동안 대를 이어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오랫동안 진행된 두 강대국 간의 전쟁은 결국 두 나라를 모두 약화시켰다. 두 나라 모두 경제는 황폐해졌고 인구도 크게 줄었다. 결과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헤라클리우스610~641년 재위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아시아에서도 패권을 잡는 듯했다. 바로 그즈음에 히자즈Hijaz 지역에서 이슬람 세력이 일어났다.
아라비아 반도 남부 지역은 사실상 권력 공백 상태였다. 한때 예멘의 힘야르 왕국이 남부 아라비아에서 위세를 떨쳤으나 에티오피아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초강대국들도 아라비아 남부 지역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로 전쟁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던 비잔틴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입장에서는 정복해봤자 지키기도 어렵고 사막이 많아 별로 쓸모없는 아라비아 남부 지역으로까지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초강대국들의 전장이 되어버린 소아시아와 레반트 지역과 달리 아라비아 남부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다. 특히 히자즈 지역의 중심도시 메카는 상업이 크게 발달해 물자가 풍족했다. 당시 메카의 권력과 부를 좌지우지한 집단은 꾸라이시Quraysh족이었는데, 예언자 무함마드 역시 꾸라이시족의 일파인 하심Hashim 가문 출신이었다. 하지만 꾸라이시족의 상류층은 신흥세력인 이슬람을 경계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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