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일기: 아랍에미리트 연합
아랍의 시간, 카이로스
“오늘 수업은 마그립 예배 전에 끝내자.”
샤르자대학교 수업 중 나집 교수가 저녁에 일이 있는지,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평소처럼 아랍 학생들은 각자의 표현으로 수긍 의사를 밝혔다. 교수에게 오케이 사인 하나 보내는 데 한 5분 정도는 교실이 시끄러워진다. 아랍인의 특성이다. 행동보다는 말이 더 많은 사람들, 일의 추진보다는 논의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
“그러세요, 교수님!”
“어디 가시나요?”
“저희도 수업 일찍 끝나면 예배나 보고 가야겠네요.”
“너도 예배 보고 갈 거야? 나도 같이 보고 가야겠네.”
그사이 나만 혼자 조용히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으로 일몰 시간을 확인한다. 무슬림은 하루 다섯 번 예배를 보는데 이중 일몰 후의 것을 마그립Maghrib 예배라고 한다. 마그립은 아랍어로 ‘해 질 녘’이란 뜻이다. 샤르자대학교의 석박사 과정 공식 수업 시간은 오후 4시~6시 30분이다. 그러나 중간에 애매하게 마그립 예배 시간이 겹치면 교수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한다. 쉬지 않고 6시 반까지 수업을 진행한 뒤 수업 후 예배를 보도록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거나 아니면 일몰에 수업을 중단하고 다 같이 교내 예배당에서 예배를 본 후 다시 수업을 시작하는 것. 후자의 경우, 6시 반을 훌쩍 넘겨 수업을 마치는 날도 많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느끼는 건 일정을 정하는 아랍인의 방식이 한국인과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이들은 시간을 정해 놓고 시계의 숫자에 자신의 일정을 구속하지 않는다. 대신 일상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예배를 기준으로 앞뒤의 스케줄을 조정한다.
이제 시간의 기준을 월과 년 단위로 확장해 보자. 무슬림은 이슬람력의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에는 한 달간 금식일출 후~일몰 전을 한다. 그런데 이 라마단 기간이 7~8월 한여름이었는데, 2020년은 4~5월 봄이었다. 왜 그럴까? 현대 이슬람 사회에서는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라마단, 성지 순례, 이슬람 축제일 등은 ‘이슬람력’을 기준으로 설정한다. 이슬람력은 태음력을 기반으로 하는데, 즉 한 달의 기준을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공전 주기로 삼는다. 무슬림들은 삭초승달에서 다음 삭까지의 소요 일수를 한 달로 치며, 이는 약 29.53일이 된다. 그래서 이슬람력에서는 1년을 354일 또는 355일로 보며,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력보다 1년에 10~11일이 적다.
이슬람 이전에도 고대 아라비아반도의 많은 부족이 태음력을 사용했다. 과거 육안으로 날짜의 흐름을 계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달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단 일부 지역에서는 한 해의 계절 주기를 똑같이 맞추기 위해서 3년마다 한 달을 더하는 태음태양력lunisolar을 사용했고, 3년 중 한 해는 13개월로 쳤다. 그러나 7세기, 이슬람이 전 아라비아반도에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2대 칼리파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는 거대한 이슬람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통일된 날짜 계산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가 박해를 피해 메카에서 야스립으로 이주했던 622년을 원년으로 삼아 태음력을 기반으로 이슬람력을 창안했다. 특히 무슬림들은 알라가 정해 준 우주의 섭리, 그에 따른 달의 주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계절을 고려하여 인위적으로 날짜를 조정하는 태양력 체계를 완전히 배제했다.
그들이 그대에게 초승달에 관해 질문할 때 그것은 인간과 순례를 위한 시간이라 말하여라…. - [코란 2:189]
성스러운 월月을 연장함은 불신을 추가함이니 이로 인하여 불신자들이 잘못 인도되니라. - [코란 9:37]
알라는 그분의 책에서 열두 달을 일 년으로 하사. - [코란 9:36]
이로 인해 아랍에서 대학 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몇 년에 두세 번씩 학기 중에 꼭 라마단 기간이 겹친다. 이때 대학들은 학사 일정을 조정해서 최대한 라마단 기간을 피해 간다. 내가 다니는 샤르자대학교는 일반적으로 봄 학기가 5월 말경에 모두 끝나지만 2020년에는 4월 30일로 조정하여 마쳤다. 4월 23일에 시작하는 라마단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다. 이런 배려를 해주는데도 몇몇 학생은 교수와 추가 협상을 시도한다.
“교수님, 4월 30일에 수업을 마친다 쳐요. 그럼 마지막 일주일은 굶은 상태로 수업을 받아야 하나요?”
“교수님도 힘들고 우리도 힘든데 일주일 당겨서 끝내시죠. 알라가 교수님을 축복하시기를….”
대체로 이 협상의 승자는 학생들이다. 다수의 아랍 학생들이 입을 모아 10분 동안 떠들어대면 교수가 그 기에 눌려 손을 들고 만다.
아랍인들은 시계나 달력에 새겨진 객관적 숫자에 민감한 민족이 아니다. 이런 시간 개념 차이로 인해 아랍인에 대해 불평하는 한국인들을 종종 보곤 한다. ‘빨리빨리’란 말이 입에 밴 한국인들로서는 시간에 무디고 느긋한 아랍인들과 사업을 추진할 때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프로젝트 마감일이 코앞에 닥쳐도 아랍인들은 이슬람 공휴일이나 주말에는 사무실에 나오지 않는다. 아랍인이 약속 시간에 30분 이상 늦는 건 ‘일반’적인 일이고, 아무런 통보 없이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당한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하겠지만, 그만큼 아랍인이 그 약속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나를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아랍인이 어딘가에 있을 테니.
물론 좋은 점도 있다. 아랍인은 비교적 시간에 관대하다. 약속 시간에 늦었다고 잘 삐지지도 않는다. 약속 시간을 정하지 않고 불쑥 찾아온 손님에게도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시간의 문을 활짝 열어 둔다. 손님이 자신의 시간을 빼앗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기꺼이 시간을 공유한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사적인 시간을 즉흥적으로 또 가까이 할애하는 유연성이 있다. 나 역시 미리 약속을 잡지 않았다며 아랍인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지위를 막론하고 말이다. 나의 친구이자 같은 박사 과정에서 공부하는 알리 선생은 셰이크 술탄 통치자 걸프 연구소에서 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무척 바쁜 친구지만, 내가 예고 없이 사무실을 불쑥 찾더라도 그는 항상 양팔을 벌리고 나를 환영해준다. 일은 내일 해도 된다고 말하면서.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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