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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이 돈이 될 때
― 주목 경쟁의 정치경제학
‘테이스티훈’이라는 먹방·쿡방 유튜버가 있다. 본래 게임 유튜버였던 그는 수년간 고정 독자층을 확보한 뒤 먹방을 시도했다. 새로울 것이 없던 그의 먹방은 3회차에 별안간 대박을 터뜨린다. 흥미로운 점은 이 대박이 요리의 성공이 아닌 처참한 실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치즈나 초콜릿을 분수처럼 흘러내리게 만드는 퐁듀 기계중탕기를 이용해 ‘치즈퐁듀치킨’을 만들어 먹고자 했다. 사실 이 요리는 퐁듀용 치즈를 쓰거나 치즈를 녹일 때 우유나 크림을 부어서 점성을 낮춰야 한다. 이를 몰랐던 그는 프라이팬에 녹여낸 고형 치즈를 그대로 중탕기에 부었다. 그러자 점성이 높은 치즈는 중탕기의 나선 펌프를 타고 올라 분수 뚜껑까지 밀어내고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정적이고 평화롭기 마련인 먹방에서 보기 드문 스펙터클이 연출되었다. 솟아오른 나선 펌프가 끊임없이 발산하는 치즈 회오리와 파편은 사방으로 튀며 테이스티훈의 안면을 강타했고, 그는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찌할 바 모르는 표정으로 망연자실했다.
치즈가 모두 사방으로 날아가버린 뒤, 테이스티훈은 기계를 끄고 흩어진 치즈 조각들을 주섬주섬 수습해 치킨에 얹어서 먹기 시작했다. 이 ‘웃픈’ 영상은 소셜네트워크를 타고 전 세계로 퍼지며 1000만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했다. 어지간한 케이팝 영상 부럽지 않은 인기를 얻은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테이스티훈의 영상은 치즈퐁듀치킨을 맛있게 먹는 ‘먹방’을 표방했지만 접시에 제대로 담는 장면조차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먹방의 본령을 배반한 영상이자 일종의 NG로, 폐기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테이스티훈은 완벽하게 실패한 먹방을 그대로 송출함으로써 일약 세계적 ‘유튜브 스타’가 되었다. 요컨대 그는 실패함으로써 성공한 것이다. 다만 ‘성공하는 실패’가 되려면 적당히 망해서는 어림도 없다. 보는 사람 누구나 파안대소를 터뜨릴 만큼의 ‘폭망’이어야 한다. 테이스티훈의 먹방 역시 폭망함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큰 웃음을 주는 콘텐츠로 도약할 수 있었고, 잘나가는 ‘정통 먹방’들을 압도하는 주목과 관심을 끌며 큰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주목경제의 명령,
더 우스꽝스럽게 실패하라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이택광, 2013라는 철학서가 있다. 인생의 조언으로 삼아도 좋을 제목이다. 엇비슷한 의미로 ‘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말이 있다. 후회의 여지가 없는 도전과 승부를 벌였다면 실패하더라도 그 경험을 밑천 삼아 더 나은 조건에서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격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 말은 패배와 실패 일반을 포장하는 용도로 남발되었고, 최근 들어서는 실패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조롱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흔히 ‘졌잘싸’라는 줄임말 형태로 쓰이며 실패한 이들의 정신승리자기합리화를 비꼬는 말이 된 것이다.
이런 경향은 오늘날 한국에서 도전과 실패의 경험 자체가 특권으로, 나아가 재도전의 기회는 사치로 여기는 분위기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도전과 실패가 소수만 가질 수 있는 특권과 다름없다면 차라리 ‘더 우스꽝스럽게 실패하라’가 이 시대에 더 적합한 격언인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확실하게 해내지 못할 바에 ‘폭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송출해 관심을 끄는 편이 주목경제 체제에서 싸울 밑천이라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우리는 주목과 관심이 돈으로 환전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전도유망한 영화 키드였던 아모스 이로 하여금 좌충우돌 끝에 자폭하게 만든 동기 역시 단연 주목과 관심이다. 아모스가 벌인 몰상식과 기행의 최종 목적이 관심과 주목에 있었는지, 그에 따르는 돈벌이에 있었는지는 아리송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주목-관심과 자본의 경계가 갈수록 흐릿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다수가 먹고살기 위해 돈을 좇는 것처럼, 오늘날에는 주목과 관심 자체가 목적이 되면서 이를 얻기 위한 행보가 곧 경제활동이 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른바 ‘조회수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다.
조회수 장사와
기호의 경제
조회수 장사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주목경제다. 주목경제라는 개념을 고안한 미국의 저술가 마이클 골드하버M. H. Goldhaber의 문제의식은 다음의 명제에서 출발한다. 정보시대에서 디지털 재화라 일컬어지는 정보에는 희소성이 없다. 무한히 취할 수 있는 것에는 값이 매겨질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가치한 정보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주목이다. 주목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하느냐가 경제학의 문제라면, 오늘날 주목과 관심의 주고받음은 엄연한 경제행위다.
주목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골드하버는 자동차 생산을 예로 든다. 한국만 해도 등록된 자동차 수가 2300만 대를 넘어선다. 국민 두 사람당 한 대씩 보유한 셈이다. 이러한 수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에게 자동차가 실제 필요운송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사람들은 적당한 성능과 가격의 차량을 갖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차를 원하며, 기왕이면 더 비싸고 고성능의 수입차를 욕망한다. 그러나 아무리 비싼 차라도 정해진 도로에서 교통법규를 지키며 달려야 하는 조건에서는 제대로 된 성능 차이를 만끽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2000만 원짜리 차와 2억 원짜리 차를 비교하면서 둘의 실제 성능 차가 10배씩 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휴대전화 시장의 형편도 비슷하다. 한국에서 스마트폰 교체 주기는 평균 30개월 안팎이라고 한다. 이는 통상 24-30개월에 이르는 약정 기간과 겹친다. 기기의 수명과 무관하게 약정 종료에 맞춰 새 휴대전화를 마련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뜻이겠다. 2010년을 전후로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휴대전화의 성능과 기능은 혁명적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그 이후 10년간의 신제품들은 정보처리 속도가 카메라 화질 등의 개선을 제외하면 대동소이한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스마트폰 단말기 시장의 활황세가 꺾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상품에서 성능과 기능 이상의 무언가를 원하기 때문이다. 기호가 그것이다.
이제 상품의 쓸모·기능·내구성·사용가치는 관건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상품이 품고 있는 기호다. 고급 수입차와 적당한 가격의 국산 자동차 간 성능 차이가 수백-수천만 원씩 하는 가격 차를 그대로 반영할 리는 없다. 자동차 가격을 높이는 것은 브랜드다. 전통적으로 수입차 브랜드를 선호하는 상류층의 기호, 그에 따라 수입차와 국산 차량에 매겨지는 차등화된 지위라는 기호, 나아가 국산차를 타는 그들과 수입차 오너인 나를 구별 짓는 기호에 값이 매겨지는 것이다.
기호의 경제에 대해 더 길게 파고드는 것은 이 책의 주제를 넘어서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기호를 팔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주목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언급했듯 한국에 등록된 자동차는 인구 두 사람당 한 대를 넘기고 스마트폰 보급률은 95%에 이른다. 멀쩡하게 잘 쓰고 있는 제품을 새것으로 바꾸도록 부추기기 위해 제조사들은 소비자의 이목을 끌어야 한다. 성능과 기능 등 실용적 측면에서 다를 것 없는 상품들끼리의 경쟁에서는 아예 어느 쪽이 많은 관심을 유도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 일찌감치 품질보다 마케팅에 전력을 쏟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모두를 위한
‘무플보다 악플’
기호의 경제는 정보시대의 도래와 맞물리면서 주목경제로 이행한다. 주목과 관심이 상품 판매에 필요한 보조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돈이 되는 것이 주목경제의 핵심이다. 정보는 복제와 전송을 통해 무한하게 확장되는 디지털 재화다. 인터넷과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정보의 공급은 수요를 훨씬 웃돌게 되었다. 무한한 정보의 물결 속에서 유의미한 것과 무의미한 것, 사실인 것과 거짓인 것,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하여 대다수 정보는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은 채 표류하다가 흩어져버린다. 요컨대 아무리 유익한 정보라고 한들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지 않으면 무가치한 것이다.
정보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주목이다. 손쉽고 빠르게 접근 가능하며 무한히 공급되는 정보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값어치가 없다. 경제적 가치가 있다는 것은 희소성을 띠며, 따라서 비용을 치르고서 접하거나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정보와 달리 희소성을 지니며 아무나 막 가져다 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주목이다. 아무리 멀티태스킹이 각광받는 세상이라지만 한 사람이 동시에 보낼 수 있는 주목은 한정되기 때문이다.
초 단위로 변화하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정보의 무한-과잉 공급에 압도되어 표류하기 쉽다. 따라서 그때그때 본인에게 필요하고 이로운 정보를 선별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충분한 감식안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대다수다. 평범한 사람들은 당장 눈에 띄는 것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편 하나의 정보에 주목할라치면 금세 또 다른 정보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때문에 각각의 정보가 차지할 수 있는 주목의 밀도는 점점 떨어지게 된다. 익숙한 정보보다 더 눈에 띄는 새로운 정보에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목을 끌고 유지하기 위한 정보 공급자들의 경쟁은 더욱 격해지고, 콘텐츠 또한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변한다. 아무리 완성도 높은 콘텐츠라도 ‘주목 경쟁’에서 탈락한다면 가치가 없는 셈이다.
아모스 이가 설파하고자 했던 종교 비판과 세속주의, 독재정권 비판, 표현·사상의 자유 등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콘텐츠 역시 주목경제의 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모스 이의 콘텐츠가 리처드 도킨스 같은 지식인을 모델 삼아 종교의 백해무익함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며 조목조목 따지고 들어가는 점잖은 영상이었다면 그토록 큰 화제를 모을 수 있었을까? 그가 기성 정치평론가처럼 리콴유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이 왜 문제인지 차분히 논증하는 영상을 내보냈다면 수백 만의 조회수를 기록할 수 있었을까? 물론 ‘소년 감독’으로 주목받았듯 ‘소년 논객’으로서 잠시나마 매스컴을 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이상의 논쟁을 전개할 만큼의 지식과 논리를 갖추진 못했기에 관심은 금세 시들었을 것이다.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의제를 벼리고 관련 지식을 더 쌓는 것이 정도正道겠지만, 일찌감치 비슷한 콘텐츠로 명성이 자자한 선배 유튜버들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프로를 흉내내어 미숙한 논리로 승부하는 것은 ‘어중이떠중이’의 실패를 피하기 어렵다. ‘이거 볼 바에야 더 잘 만든 거 본다’는 평가가 전부인 실패 말이다.
아모스 이는 리콴유를 비판해서 주목받은 것이 아니고 종교를 부정해서 스타가 된 것이 아니다. 그는 리콴유와 마거릿 대처의 성관계를 묘사한 그림을 공개하고 《쿠란》을 강간하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며 유명세를 얻었다. 나아가 본인이 저지른 기행으로 인해 경찰에 구속됨으로써 마침내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그는 논객을 참칭했지만, 지식과 논리가 부족한 처지에서 번듯한 논객들의 콘텐츠를 흉내내다 적당히 실패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같은 주제를 다루되 논설과는 무관한 스턴트를 벌임으로써, 완벽하게 우스꽝스러운 실패로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It’s so bad, it’s so good’이라는 영어 표현이 있다. 어떤 작품이 너무나도 형편없고 엉망인 나머지 애정이 생길 지경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아마추어가 대충 만든 허접한 패러디물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이 평가의 전제는 ‘프로의 자세로 진지하게, 열심히 만든 것’이어야 한다는 데 있다. 〈더 룸〉2003이라는 영화가 대표적이다. 이 99분짜리 장편영화는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다.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스토리 전개, 미해결로 남는 하위 플롯, 엉성한 연기와 대사 전달력, 연속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편집 등으로 개봉 당시에는 철저하게 외면받은 작품이다. 한 비평가는 〈더 룸〉을 “구린 영화의 〈시민 케인〉”이라며 조롱했다. 그런데 그의 비아냥 섞인 평가는 훗날 이 작품이 ‘역사상 최악의 영화’라는 유명세를 타게 되자 역설적으로 더없이 적절한 비평으로 바뀌어 회자되고 있다. 이 영화의 제작·각본·감독·주연배우를 전담한 토미 와이소Tommy Wiseau는 영화계커리어가 전무한 사람으로, 지금까지 나이와 출생지조차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미스터리한 인물이지만 영미권의 젊은 네티즌 가운데 그와 〈더 룸〉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뒤늦게 발굴되어 컬트적인 사랑을 받고 오랫동안 ‘밈meme’으로 소비되고 있는 〈더 룸〉은 우스꽝스러운 실패가 성공으로 이어진 무수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밈’에 대한 설명은 4장, 80-82쪽 참조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는 표현은 대중적 인기가 성패로 결정되는 연예인과 정치인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부고란만 아니면 무조건 언론에 나오는 것이 좋다’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소셜미디어가 전 인류를 ‘네트워킹’ 하면서 이제는 만인에게 무플보다 악플이 나은 시대가 되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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