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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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칼럼을 쓴다는 건 말하자면 수만 명이 모여 있는 광장의 무대에 서서 10분 정도 마이크를 잡는 일과 같다. 그 긴장은 5년 동안 60편의 글을 쓰는 동안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나처럼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일을 하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나는 왜 쓰고 있을까. 아무래도 그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2014년 5월, 노들장애인야학이하 노들야학, 노들의 20년을 기록한 책 《노란들판의 꿈》을 쓴 후 나는 13년간 활동했던 야학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해에 여러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세월호참사 유가족과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해서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과 《숫자가 된 사람들》을 만들었다. 좋은 사람들 속에서 많이 배우고 즐겁게 일했지만 그 일을 다음 작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글을 쓰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공동 작업일지라도 결국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컴퓨터 화면을 보며 버텨야 하는 일이었다. 의미있는 일이지만 외롭고 허한 일이기도 했다. 기록활동을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동료들이 있었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내가 노들야학은 아니지만 노들야학 같은 아주 ‘찐한’ 공동체를 만나 다시 교사로 살아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몰랐다. 그저 어디로든 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떠난 곳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많은 사람이 삶의 방향을 찾거나 바꾸었다는 그 길을 걸으면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 그 길은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은 평화로운 안전하고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나는 화살표를 따라 꾸역꾸역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40일 후 그 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나는 몹시 당황했다. 그 많던 화살표가 일제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지?’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내가 정말로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했다. 나에게 방향을 알려주던 화살표 같은 존재들이 이젠 내 곁에 없다는 것도, 나는 화살표 없이 살아본 적이 없고 살아갈 능력도 없는 인간이라는 것도, 그때 절절하게 깨달았다. 산티아고에 도착해 한껏 들뜬 여행자들 사이에서 나는 몹시 불안하고 두렵고 우울했다. 결국 두 달이나 남아 있던 귀국 비행기 티켓을 앞당겨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게 아니라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상태였다. 글을 쓰던 2년 동안 얻은 허리디스크에, 무리한 도보여행으로 인한 극심한 무릎 부상까지 더해져서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게 된 것이었다. 2015년이었고 나는 서른일곱이었다. 허리에서 시작된 통증은 온몸으로 퍼져서 손가락, 발가락, 턱관절까지 아파왔다. 나의 몸이 낯설고 낯선 몸이 두려웠다. 이런 몸으로 아무것도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뭔가 실패한 느낌이었다. 무기력하고 막막하고 우울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그렇게 여름을 다 보내고 가을로 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 종일 집안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괴로움에 몸을 비틀다 해질녘에 되자 도저히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 힘껏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30분을 걸어 한강 선유도공원에 도착했다. 마침 달빛무도회라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20대의 청년들이 팀을 이루어 댄스 경연을 벌이는 중이었는데 어떤 팀은 뮤지컬, 어떤 팀은 마임, 어떤 팀은 현대 무용 같은 것을 했다. 자유로우면서도 절도있고 여럿이 함께 하나로 움직이는 그들의 몸짓을 경탄하며 바라보았다. 떨림이나 실수조차 아름다웠다. 그들끼리 주고받는 눈빛과 미소가 너무 예쁘고 행복해 보여서 보고 있는 내 가슴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웃고 있었고 웃는 내가 좋아서 또 한 번 웃으며 생각했다.
‘와… 어떻게 인간들한테서 저렇게 빛이 날 수가 있지! 연습하느라 고생이 참 많았겠다. 저렇게 호흡이 잘 맞아보여도 뒤에선 엄청 싸웠겠지? 그래도 좋았을 거야. 부모들은 쟤들이 춤추는 거 무지 싫어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못 말렸겠지. 저렇게 좋은 걸 어떻게 말려!’
아마도 그 순간 나는 유체이탈 하듯 나의 몸으로부터 빠져나와 지난 시절 노들야학 사람들 속에 있던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던 나는 동시에 이런 느낌에 휩싸였다.
‘다시는 저렇게 살 수 없겠구나.’
내가 여기까지 타고 왔던 기차가 나를 내려놓고 저만치 떠나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 낯선 역에 앉아 있었고 떠나는 기차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그것을 타고 여기까지 왔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에 타고 있었을 땐 내가 무엇을 타고 있는지도 몰랐던 그 기차가, 말하자면 청춘이었을 거다.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불처럼 청춘이 내 앞에서 눈부시게 빛나다가 순식간에 끝나버렸던 그 순간 오래전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야학을 하는 게 너무 싫었던 아버지와 야학이 너무 좋았던 나는 오랫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세상물정을 모른다고 생각했고 나는 아버지가 속물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뱉은 말은 서로를 비켜가며 각자의 인생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겼는데, 왜인지 그날 아버지의 말은 내 가슴에 정확히 꽂혔다.
“청춘이 너를 한정없이 기다려주는 게 아니다. 청춘이 끝나면 너는 후회할 거다. 후회해도 소용없어. 그건 돌아오는 게 아니거든.”
아버지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선택한 삶이 나의 열정이 끝났을 때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것일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날이 바로 아버지가 말했던 그 순간이었다. 청춘의 대부분을 보냈던 노들야학을 그만둔 나는 사막 한가운데 홀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가진 것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극심한 부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아… 이렇게 끝나는 거였구나.’
생각보다 그런 순간이 빨리 와서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어쩐지 전혀 후회스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가슴이 점점 벅차올라서 눈물이 조금 날 것 같았다. 관객이 되어 바라본 내 청춘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노들이 아니었다면 절대 보지 못했을 것들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을 한 권의 책으로 기록했다. 책을 쓰던 1년의 시간은 남아 있는 애정과 미움을 모두 태워서 충만히 반성하고 후회하는 과정이었다.
글쓰기는 사랑했던 것들을 불멸화하려는 노력이라고 했는데, 나의 글쓰기가 정말로 그랬던 것이다. 나는 떠나는 그 기차를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었다. 몇 번째 칸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어는 정류장에서 누가 타고 내렸는지, 그것이 우리의 방향을 어떻게 조금씩 바꿔 놓았는지에 대해 밤새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내가 쓴 한 시절 우리의 역사는 내 몸에 고스란히 새겨져서 나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 있었다. 그 시절이 나로부터 영원히 떠나가고 있었지만 전혀 아깝지도, 미련이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허물을 벗고 빠져나오듯 후련했다. 이제 다른 기차를 타야 하는 것이다. 어떤 기차를 타야 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똑같은 기차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더 이상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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