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시대의 역진에 맞서다
이번 기회를 놓쳤다면 펠턴은 예방주사도 맞지 못하고 아시아의 전쟁터로 들어갈 뻔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당신이 살아 돌아오길 원해요.” 걱정스럽게 말하던 국제민주여성연맹 영국 지부장 몰리 키스Molly Keith의 애잔한 눈빛이 떠올랐다. 펠턴은 병원 문 닫는 시간에 맞추어 가까스로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의사는 전형적인 미국 억양의 중년 남성이었다.
흰색 재킷을 입은 의사는 펠턴에게 콜레라와 장티푸스·파라티푸스 백신을 접종하면서 무심히 물었다.
“어디로 가시나요?”
“중국으로 가요.”
미국인에게 북한으로 간다고 말하는 것은 눈치 없는 행동일 수 있었다. 또한 중국으로 간다는 대답은 거짓말도 아니었다. 어차피 중국을 경유하여 육로를 통해 북한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의사는 살짝 놀라는 눈빛과 함께 여행의 목적에 대해 물었고, 펠턴은 다른 여성 대표들과 함께 그곳의 실상을 조사하러 간다고 말했다.
“중국이라…… 이런 시국에 중국을 가신다니, 정말 용감한 여성인 것 같군요.”
펠턴은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 또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수많은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영웅”heroine으로 간주되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었다.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죠.”
“정말 그렇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죠.”
의사는 2차 접종을 위한 주사 앰플을 조심스레 몇겹의 티슈에 싸서 펠턴에게 건네주었다. 2차 접종은 북한으로 가는 도중에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2차 접종 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한 후, 그녀의 용기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펠턴은 이 친절한 의사에게 여행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 모두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진실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세상에 더 있으면 좋겠군요.” 그의 친절한 눈에 근심이 스쳤다.
이날 저녁 프리다Freda 또한 펠턴 앞에 놓인 위험과 고통에 대해 한번 더 상기시켜주었다. 펠턴은 3일 후면 영국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제여맹 관계자들은 그녀의 북한행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국제여맹은 펠턴에게 초청장을 보내 북한행에 대해 타진하긴 했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 여행을 취소시킬 의향이 있었다. 그 정도로 북한행은 위험한 선택이었다. 펠턴은 그곳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었고, 귀국 후 그녀의 자랑스러운 경력과 명예를 순식간에 손상시킬 수도 있었다. 심지어 귀국 후 반역죄로 처형될 수도 있었다.
프리다는 이 모든 위험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위험들에 대해 한번 더 진지하게 논의할 것을 요구했다.
“스티버니지는요?” 프리다는 따지듯이 물었다.
모니카 펠턴은 스티버니지 개발공사의 총재로 재직했던 약 1년 반 동안 그녀의 거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이곳에 쏟아부었다. 그녀는 당시 1500파운드의 연봉을 받고 있었는데, 이는 노동자들의 평균임금과 비교하면 상당한 거금의 수입이었다. 1948년 영국 여성 공장노동자들의 평균 주급은 약 3.7파운드74실링 6펜스에 불과했다. 펠턴의 주급 약 28.8파운드는 같은 시기 여성노동자들의 7.8배, 남성노동자들의 4배 정도에 해당되었다. 전쟁 직후 영국 노동자들의 수입이 대부분 엇비슷해졌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당시 신문에서 펠턴의 막대한 임금에 대해 거론하는 것이 괴이한 일만은 아니었다. 요컨대 펠턴의 북한행은 자신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의 1950년대 영국사회에서 엄청난 헌신과 투쟁의 결과로 획득한 높은 수입의 직장과 명예까지 한순간에 날려버릴 만한 위험한 선택일 수 있었던 것이다.
“제가 한국에 갔다는 이유로 해고된다면 정말 유감일 거예요. 그러나 제가 감당해야만 하는 위험인걸요.” 그녀는 전쟁 중인 한국으로 가는 것이 스티버니지 개발공사 총재로서의 자신의 직분과 무관하지 않다고 확신했다. 펠턴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1945년에 스티버니지는 새롭고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우리의 희망의 일부분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희망은 벌써 사라져가고 있죠. 확신컨대 이제 스티버니지의 운명은 세계의 운명에 기대어 있음에 틀림없어요.’
스티버니지가 새로운 세계를 향한 영국인들의 ‘희망의 일부분’이었고, 이제 스티버니지의 운명이 ‘세계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펠턴의 인식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스티버니지는 제2차세계대전 직후 영국정부에 의해 추진된 개혁적 주택정책을 상징했던 최초의 뉴타운이었다. 전쟁 직후의 영국은 신자유주의의 최전선에 서 있는 지금의 영국과는 완전히 다른 국가였다. 1945년 노동당은 영국 역사 최초로 단독으로 집권당이 되었고, 범국민적 지지 아래 사회주의적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보수당조차 사회보장제도의 전면적 확대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국유화 법안과 복지개혁안이 1948년 이전에 일제히 입법되었고, 10여개의 대규모 산업이 국가의 소유가 되었다.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스티버니지 뉴타운 개발사업 또한 이 같은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런데 스티버니지 개발계획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추진된 막대한 국방비 증액에 의해 그 실행 과정에서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영국 노동자들은 자신 앞에 펼쳐졌던 장밋빛 미래가 빠르게 퇴색되어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냉전과 한국전쟁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화의 파고가 영국의 정치와 노동자들의 일상을 격렬하게 뒤흔들기 시작했다. 펠턴의 한국행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영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해 좀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영국에 있어서 2차세계대전은 민중people의 전쟁이었다. 노동계급의 사회문화사를 연구한 셀리나 토드Selina Todd에 의하면, 영국 노동계급이 ‘민중’이 되어 그들의 이익과 영국의 이익이 동의어가 된 것은 2차세계대전 이후였다. 노동계급은 대체로 광부·부두노동자·철강노동자·가내하인 등과 같은 육체노동자와 그들의 가족, 혹은 타자수·비서·사환·배달원과 같은 낮은 지위의 사무직 노동자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1950년까지 영국인의 4분의 3 이상이었다.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총력전의 형식으로 진행된 2차대전의 승리를 위해 노동계급의 지원이 절실했다. 이에 처칠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일자리, 생활임금노동자의 최저생활 보장을 위한 기본임금, 유사시의 보호 등을 약속했고, 노동자들은 전쟁 중에 파업하지 않겠다는 협약에 동의해주었다. 실제 전쟁기의 막대한 노동력과 군수품에 대한 수요는 역사상 처음으로 영국에서 완전고용을 창출했고, 노동자들은 이를 이용해 단체협상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전쟁 중에 복지 제공과 완전고용에 대한 지지는 전면적으로 확장되었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서 국가 개입에 대한 믿음이 공고해졌다. 사람들은 일터와 집에서 더 나은 보수와 복지를 받을 권리를 확신했다.
정치적으로는 노동계급을 대변했던 노동당의 정치·사회적 위상이 대폭 강화될 수 있었다. 노동당은 1900년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단체들이 그들의 대표를 의회에 진출시키기 위해 조직한 노동대표위원회Labor Representative Committee로부터 비롯된 정당이었다. 1906년 총선에서 29명의 위원을 배출하면서 정당으로서의 노동당이 탄생했고, 이후 노동조합, 협동조합, 사회주의자 협회 등을 정치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2차세계대전 시기 처칠은 노동계급을 전시 군사활동에 동원하기 위해 노동당에게 정치적 지분의 상당 부분을 양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노동당은 영국사회의 전면적 개편으로 노동계급 동원에 대한 보상을 얻어내고자 했다.
실제 전쟁기 노동당은 정국 운영에서 처칠의 보수당과 거의 대등한 위상으로까지 올라설 수 있었다. 내각의 내각으로 불린 전쟁내각war cabinet의 다섯명 구성원 중에 노동당원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R. Attlee와 아서 그린우드Arthur Greenwood가 부총리와 무임소장관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운수노조위원장 어니스트 베빈Ernest Bevin이 노동장관에, 허버트 모리슨Herbert Morrison이 군수부장관에, 그리고 휴 돌턴Hugh Dalton이 경제복지부장관에 임명되었다. 노동당 평생 당원이었던 모니카 펠턴이 보급품위원회 위원장과 군수부의 주요 보직을 역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와 같은 전시의 특수한 상황이 작용했던 것이다. 이 같은 전쟁기 노동당 지도부의 ‘통치경험’은 전쟁 이후 정권을 독차지하게 된 애틀리 노동당 정부의 전면적 개혁정책 추진의 주요 배경이 될 수 있었다.
전쟁 승리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던 처칠 정부가 외교와 군사문제에 집중할 때, 노동당은 ‘국내문제’에 대한 주요 책임과 역할을 떠맡았다. 유럽 전역에서 독일이 전황을 유리하게 전개해나갈 때, 처칠 정부는 다급한 상황 속에서 영국인의 ‘공동체의식’과 ‘사회개조’의 필요성을 환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질서에 대한 희구가 광범하게 유통되었고, 토인비A. J. Toynbee, 케인즈J. M. Keynes와 같은 지식인들이 그 같은 기대에 진보적 열정을 불어넣었다. 전쟁 승리는 반드시 진보와 동행해야 할 것이었다. 그 같은 진보와의 동행은 『타임즈』The Times 기사의 설명에 의하면, “수백만의 보통사람들이 전쟁 중이나 전쟁 후에 우리의 적보다 더 나은 것을 얻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한 정책이었다.
영국정부는 전쟁기 영국 민중들에게 이 같은 기대와 확신을 주기에 충분한 현재적 조치와 미래에 대한 약속을 이어갔다. 정부는 전장에 나간 군인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한 소득 보장과 식료품 공급 등의 조치에 만전을 기했고, 전후 국가적 사회보장 서비스에 대한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전후 사회보장에 관한 윌리엄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의 저 유명한 「베버리지 보고서」1942이다. 이 보고서는 유명한 구호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앞세우면서 영국 국민들에게 전면적 복지 제공을 약속하고 있었다. 보고서는 전쟁기 물자부족으로 인한 영국민의 결핍want, 질병disease, 무지ignorance, 불결squalor, 태만idleness을 5대 거악으로 지적하면서, 가족수당, 학교급식제도 확대, 식료품 보조 확대, 높은 수준의 누진세 제도 도입 등을 강조했다. 이 같은 전후 사회보장에 대한 대대적 약속은 1945년 선거에서 승리한 애틀리 노동당 정부가 당대 서구에서 가장 선진적인 개혁 입법을 도입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했다.
유럽의 전쟁은 1945년 5월에 끝났고, 두달 후 영국에서는 총선이 치러졌다. 결과는 노동당의 압승이었다. 1900년 창당 이후 한번도 다수당으로서 단독 집권해보지 못했던 노동당은 보수당을 압도적 의석차393:213로 누르고 역사상 최초로 다수집권당이 되었다.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과 기대를 업고 출범한 노동당 정부는 이제 과감하게 ‘사회주의 정책’을 실현할 엄청난 역사적 기회를 부여받게 되었다. 실제 선거 당시 노동당은 “사회주의 영국의 건설이야말로 노동당의 궁극적 목표”라는 선언을 선거강령의 제일 전면에 배치하고 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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