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셰퍼드 씨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백두대간 위에서였다.
2009년 가을이었다. 백두대간 산행 중 소백산을 지나 백두대간 상의 몇 안 되는 생명수가 있는 고치령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선달산을 향해 북상하는데, 저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불쑥 사람이 나타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인이 아니고 외국인이었다.
그는 우리와 비슷한 크기의 배낭을 메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며 환한 얼굴로 우리를 반겼다. 물론 우리도 반가웠다. 백두대간 상에서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가 않은데, 더구나 외국 사람을 만났으니 얼마나 신기하고 반가웠겠는가.
우리는 배낭을 멘 채로 서서 한동안 손짓 몸짓으로 얘기를 나눴다. 대충 알아듣기로 자기는 뉴질랜드 사람으로 우리나라 산이 너무 좋아서 산행 중이고, 백두대간은 물론 호남정맥과 낙남정맥도 이미 종주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워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외국인이 우리의 백두대간과 정맥들을 답파했다는 게 놀라웠다. 내가 지리산에서 오는 중이라고 하니 자기는 지금 지리산으로 가고 있고, 화엄사에서 친구를 만나 템플스테이를 한다는 것 같았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많은 이야기는 할 수 없었지만 자기는 한국에 와서 주로 산행을 하지만 절 사진과 굿 하는 장면을 많이 찍는다고 하는 것 같았다. 명함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남쪽을 향해서, 나는 북쪽을 향해서 각자 백두대간 길을 가기 위해 헤어졌다.
백두대간 산행을 끝내고 돌아와 원고를 준비하다가 그가 생각났다. 명함의 정보를 가지고 인터넷을 살펴보니 그에 대한 소개가 나왔다. 그가 최근 백두대간 영어 가이드북을 출간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참 고맙고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리고는 까마득히 잊고 지냈는데, 2012년 겨울인가, 산림청에서 주관한 이화령 복원 완공식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이화령은 일제가 한반도에 신작로를 낸다는 명분으로 백두대간을 끊어 도로를 개설했던 곳인데, 산림청에서 이 고개에 터널을 조성한 뒤 그 위를 흙으로 다지고 나무를 심어 백두대간을 다시 되살려낸 것이었다. 그 준공식에 나와 셰퍼드 씨가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알고보니 셰퍼드 씨는 이미 북쪽 백두대간 몇몇 봉우리를 다녀온 터였다. 그리고 이번 이화령 행사장에는 그가 북쪽에서 찍어온 사진도 전시하고 있었다. 내가 지리산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동안 그는 벌써 북녘의 백두대간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사이에 아예 삶터를 한국으로 옮겼다고 했다. 그야말로 한국에, 아니 백두대간에 푹 빠진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2000년에 한국에 들어와 대구에서 영어강사를 1년 했다고 한다. 타고난 떠돌이 기질이 있었을까? 외국 여기저기 다니며 다양한 일을 하다가 본국에서 외교원 경호 일을 했다. 그러다 2006년 한국의 국립공원을 걸어볼 생각으로 들어왔는데, 우연한 기회에 백두대간을 알게 되었고 친구와 즉시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장마를 만나 매일 비에 젖어야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중단하고 이듬해인 2007년에 다시 들어와 종주를 마무리하고 백두대간 영어 가이드북을 출판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2009년에 장기휴가를 내고 다시 들어와 낙남정맥과 호남정맥을 걸었고, 이후 백두대간 상에서 나와 마주쳤던 것 같았다. 그리고는 2010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예 한국으로 이주를 해서 사진작가로, 그리고 산악 가이드로 직업을 바꿨다.
백두대간을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그 또한 향로봉에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걸어온 것처럼 저 북쪽 위로 뻗어나간 능선을 계속 걷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은 불가능하고 외국인이어서 가능한, 북녘 백두대간 산행을 마음먹었다.
그렇게 여러 루트를 통해 북쪽으로 갈 궁리를 하다가 조선뉴질랜드 친선협회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주선으로 2011년 5월 평양에서 당국자들과 논의를 한 후 그 해 10월에 다시 가서 한 달 간 백두대간 몇몇 봉우리를 현지 가이드와 함께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산행으로 그는 통일된 한국에 대한 염원을 처음으로 가졌다고 한다. 한 달 동안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산을 오르며 우정이 싹텄고, 자연스럽게 “남한도 북한도 아닌 그저 코리아가 있다”는 깨달음을 가졌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는 우리나라의 모든 것에 대한 공부를 했던 것 같다. 지리, 역사, 문화, 음식, 날씨, 각 지역의 특색, 신화까지. 그리고 2012년에 다시 북으로 들어가서 6주 동안 더 많은 백두대간 봉우리를 오를 수 있었고, 북한의 아름다운 속살과 순박한 사람들을 만나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산행 이후 한국의 분단에 대해 더 깊이 공부를 했고, 백두대간을 통일의 상징으로 이용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2017년에 북쪽 백두대간의 더 많은 산을 올랐다. 그때 그는 세상에 이만한 미개척의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데 대해 깊이 감동했다고 한다.
2018년과 2019년에는 소수의 외국인들을 상대로 백두고원을 가이드 했다. 그리고 『북한의 백두대간 : 산과 마을과 사람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처음에는 이 책에서 남과 북의 백두대간 둘 다를 다루고 싶었지만, 지면의 한계도 있는데다 남한의 백두대간 자료집이나 사진집은 이미 많아서 북쪽의 백두대간과 사람을 더 많은 남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북쪽만 다뤘다고 한다.
나는 그의 책을 보며 놀랐다. 우리나라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어 보였다. 어떤 부분은 전문가만 알 수 있는 것까지 세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이제 기회 있을 때마다 “평화통일”, “백두에서 한라까지”를 구호처럼 외치고 다닌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멋진 백두대간이 국제 트레일로 되지 못한 것을 너무나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이미 오래 전에 국제 트레일로 만들어서 외국인에게 개방했을 거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최근 그와 내가 주축이 되어서 백두대간 관련 일을 좀 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백두대간 관련 사단법인 설립이 그것이다. 특히 그는 북쪽으로 갈 수 있는 우리 중 유일한 사람이니 더 많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 일에 우리보다 오히려 더 열성적이고 더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얼마 전 소백산 눈 산행을 함께 갔는데, 그의 검소함에 놀랐다. 연화봉 산장에 물이 얼어서 식수를 사야 했는데, 그는 한사코 마시는 물만 사고 조리하는 물은 눈을 녹이자고 했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했다. 나보다 더 하다.
또 한 가지 놀란 건 주변의 산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산까지 다 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도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그에 비하면 어림도 없었다. 나는 백두대간의 산들만 비교적 잘 알고 있는데, 그는 백두대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산을 머릿속에 넣어놓고 있었다. 산뿐만 아니라 도시나 산 밑의 동네 지리 또는 맛집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 수 있느냐, 당신은 천재냐 물으면, 그는 그것은 자기의 일이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말한다. 탁월한 감각이었다. 그는 또 유머에 능하고 속어도 곧잘 써서 사람을 웃기는 재주까지 있는 사람이다.
언젠가 한 강연장에서 그와 대담을 한 적이 있다.
얘기를 하던 중에 내가, 로저 씨 당신이 아무리 우리나라를 잘 알고 이해를 한다 해도 우리 민족이 아닌데 어떻게 한국인의 내밀한 느낌을 속속들이 다 이해할 수 있겠냐고 비틀었다. 로저 씨는 다 아는 건 아니라고 겸손하게 대답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 질문은 어쩌면 내가 못 가본 북쪽의 산들을 그가 다녀온 것에 대해 배가 아파서 나온 질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속 좁은 질문이었다. 그는 어쩌면 우리보다 더 한민족 같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때 했던 말을 취소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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