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학교에 갈까?
김재현
2013년 11월 7일, 전국의 고3 수험생들이 수능 시험을 봤다. 전날부터 학교에서는 시험 준비로 분주했고 시험 당일에는 경찰차까지 등장해 시험장을 지켰다. 시험 시간에 늦은 수험생을 경찰 오토바이가 태워주고 시험장에 오다 사고가 난 학생은 병원에 입원한 채로 수능 시험을 치렀다. 많은 수험생들에게 12년간의 노력이 끝을 맺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 대학 입시 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회원인 일곱 명의 청소년들이 수능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와 기자회견을 했다. “시험과 경쟁을 위한 교육과 학생들에게 정답을 외울 것만을 강요하는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은 자유롭고 주체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대학 입시를 거부한 것이다.
대학 입시는 이제 나에게도 코앞의 문제가 되었다. 나도 이런 입시 제도에 불만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 학교에 다니고 있고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하고 있다. 의문이 들었다. 왜 학교에 갈까?
대학입시와 학벌의 현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어떤 영상을 보여주신 적이 있다. 주제는 ‘우리는 공부를 왜 할까?’였다. 강연자가 나타나더니 “무조건 서울대 가라! 서울대 가면 인생이 달라진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강연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하고 대기업에 취직하여 많은 돈을 벌고 싶어한다. 하지만 지원자가 많은 대기업에서는 원서를 모두 검토하고 지원자를 일일이 다 만나볼 수가 없다. 시간과 인력이 많이 들고 그게 곧 돈이 되기 때문이다. 이윤 창출을 최대 목표로 하는 기업에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1차적으로 거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때 어떤 방법을 사용해 걸러낼까? 출신 대학교를 보고 걸러낸다. 수십만 명의 지원자가 모이는 마이크로소프트사 같은 세계적인 기업에서는 더더욱 대학을 보고 지원자를 추려낸 뒤에 뽑는 것이다. 설령 자기가 사업을 하고 싶어도, 다른 어떤 일을 하고 싶어도,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참신한 아이디어보다는 대학의 인맥 네트워크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
나는 동영상을 보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었고 화가 났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강연자의 말도 이런 일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더 답답했고 화가 났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느끼기에도 ‘수능 대박’을 기원하는 현수막이나 ‘수능 만점’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어디를 가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붙어 있었고,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그 사람들의 삶이나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달라지는 것 같다. 정말 우리는 이런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것일까?
학교에서의 공부란
나는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정규수업부터 보충수업·야자(야간자율학습)·심자(심야자율학습)까지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한다. 수업을 듣다 보면 학생들의 사고를 넓혀주고 성장시켜야 할 수업이 오히려 학생들의 생각을 죽이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국어 교과서는 분명히 시나 소설의 해석은 타당한 근거만 있다면 자유롭게 하면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해석을 보여줌으로써 그런 상상력을 없애버린다. 사회나 과학, 역사 수업에서도 선생님들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이런 공부들을 왜 해야 하고 이런 공부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제쳐두고 시험에 출제될 내용들만 정리해서 외우도록 하고 있다. 시험을 잘 치기 위한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지금까지 그런 학교에서 그런 선생님들과 살아온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그걸 받아들였다. 학생들이 더 쉽게 외우고 더 쉽게 문제에 적용할 수 있게 해주는 선생님이 학생들 사이에서는 잘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불리고 있다. 학교나 수업이 이미 학생들의 실력을 기르고 성장시키는 곳보다는 대학 입시를 위한, 시험을 잘 치기 위한 전략적인 곳으로 바뀌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교사, 학부모, 학원들은 학생들을 끝없는 경쟁 속으로 내몰기만 하고 있고, 더 효율적인 공부법을 연구해서 알려준다는 기업까지 등장했다.
『외면하지 않을 권리』(한다솜 외, 교육공동체 벗, 2012)의 「미래에 대한 불안의 끈을 놓다」의 필자 김해솔 씨는 학교 공부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고개를 숙이고, 숨을 죽이고, 순응하고, 의심하지 말고, 듣는 그대로 암기. 자신이 주체적인 인간임을 부정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현재의 교육체제에 오늘이나 지금은 없다. 오직 더 나은, 아니, 더 나을지 아닐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 참아내야 할 고통밖에 없다.”
내가 매주 토요일마다 ‘강냉이’ 공부를 2년 동안 해온 것도 ‘강냉이’ 공부가 학교 수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재미있기 때문이다. 수업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9년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알 수 없는 감동과 뿌듯함을 느끼고, 뭔가 나 자신이 한층 더 성장한 느낌이 들었다. 학교 수업은 왜 그러지 못할까? 김해솔 씨 말대로 정말 서로 물고 뜯고 싸워야 하는 이런 경쟁 사회가 윗사람들, 사회적으로 상위에 있는 사람들 입맛에 잘 맞기 때문일까?
나의 고민
학교를 그만두고 홈스쿨링을 한다는 사람들도 접해봤고 ‘투명가방끈들의 모임’처럼 대학 입시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소식도 들으면서 나는 나름대로의 고민을 했다. 먼저 “내가 지금 왜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라는 생각을 했다. 답은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였다. 없는 것만 못한 이유였다. 이전까지는 제대로 생각도 해보지 않은 질문이었는데, 이런 결론이 내려지니 허무했다. 이때까지 내가 이렇게 내 삶을 대충 살아왔나 하는 자책을 하게 되었다.
나는 2010년 겨울에 산청 간디학교의 계절학교에 참가했다. 산청 간디학교는 정부의 인가를 받은 대안 고등학교다. 간디학교의 선생님은 간디학교가 어떻게 운영되고 학생들이 수업은 어떻게 하는지 소개해주셨다. 정부의 인가를 받기 위해 수업 일수나 과목은 자율적으로 하지 못했지만, 수업은 학생들 위주로 되어 있었다. 평범한 학교와는 달리 시험이 목적이 아닌 수업을 했다. 학생들의 삶에 있어서 ‘의미가 있는 배움’이 수업의 목적이었고, 학생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토론이 주가 되었다. 설명과 함께 사진도 보여주셨는데 모든 수업이 즐거워 보였다. 우리 학교 수업도 저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수업시간에 잠을 자거나 핸드폰을 만지는 일은 상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기숙사 생활이나 여러 활동을 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에서 학생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워 보였다. 미래에 대한 소모적인 불안이나 근심은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보고 설명을 들으면서 “간디학교에 오면 정말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나도 간디학교 학생들처럼 살아보고 싶었고 계절학교에 함께 온 친구들도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 나는 간디학교를 선택하지 않았다. 실제로 계절학교에 함께 갔던 친구들 중 간디학교에 입학한 친구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많아 봐야 열 명일 것이다. 많은 친구들이 간디학교 학생들의 삶을 원하지만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선 내가 간디학교에 가지 않은 이유는 무리에서 낙오되는 느낌, “일반 학교를 졸업하지 않으면 혹시 뭔가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고민을 했지만 성격 탓인지 과감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경솔한 판단일 수 있지만, 간디학교를 선택하지 않은 많은 친구들도 나와 비슷하게 미래에 대한 불안감, 일반 고등학교를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위의 분위기, 고등학교에 대한 고민조차도 무색하게 만드는 그런 분위기에 휩쓸렸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일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꿈을 꾸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같은 말은 너무 많이 들었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입시지옥·무한경쟁 같은 말들이 안 좋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또한 삶의 질과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대안학교를 졸업하느냐 일반학교를 졸업하느냐, 대학을 가느냐 마느냐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내 생활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왜 학교에 갈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학교에 갈까? 친구 스무 명에게 “왜 학교에 다녀?”라고 물어봤다. 거기에 대한 답변이었다(지어낸 거 아님).
“몰라.”(2명)
“마음의 양식을 쌓기 위해서지.”(1명)
“행복해지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 공부이기 때문이야.”(1명)
“부모님이 가라고 해서.”(1명)
“다양한 경험을 해보기 위해서 다녀.”(1명)
“대학 가려고 다니지.”(12명)
“예의와 단체 생활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야.”(1명)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 다니지.”(1명)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은 것 같은 답변도 있고, 충분히 그럴 것 같은 답변도 있는 것 같다. 예상했던 대로 ‘대학에 가려고’ 학교를 다닌다는 답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현실의 학벌주의가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놀라웠던 것은 공부를 곧잘 하는 친구가 “모른다”고 대답했을 때였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꿈을 향한 목표나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학교가 우리를 아무 생각 없이 공부하도록 만드는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부모님의 권유 때문에 학교에 다닌다는 친구도 있었다.
공감하기 어려운 답변들도 있었다. 학교보다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곳은 훨씬 더 많을 것 같았다. 행복해지는 가장 쉬운 방법인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고, 마음의 양식을 쌓는 곳이란 말은 전혀 동의 할 수 없다. 학교 수업이 마음의 양식을 쌓아준다니 웃음이 나올 뻔했다.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답변도 있었다. 사회 생활을 배우거나 친구들을 만나는 데는 학교만 한 곳도 잘 없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학교에 가는 이유를 모르겠다. 현실적으로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하긴 하지만 이게 맞는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겠고, 지금 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더 이상 이런 교육이 유지돼서는 안 된다는 것. 우리나라의 학교가 달라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학교는 공부를 독점해서는 안 되고 학생들이 진정한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진정한 공부
그렇다면 진정한 공부란 무엇일까? 나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공부는 돈과 지위를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공부의 즐거움은커녕 하면 할수록 스트레스만 커지기 때문이다. 갓난아기의 무궁무진한 호기심은 학교 공부를 만나면서 사라지거나 학교 공부에 맞게 바뀌어버린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콩도르세는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호모 쿵푸스』(고미숙, 그린비, 2007)의 저자 고미숙 씨는 공부를 이렇게 말했다.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구성하는 것, 삶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다. 더 간단히 말하면,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비로소 공부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분들의 말을 들으니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이 ‘공부’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고민 끝에 지금 내가 생각하는 공부는, 스스로 궁금한 것을 찾아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궁극적으로 공부를 함으로써 내 삶을 바꾸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 탐구하고 싶은 것이 있고 자기 스스로가 그것을 끝까지 붙들고 해내는 것,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노력하여 그 궁금증을 푸는 것, 이런 것들을 해낸다면 삶이 바뀌지 않을까? 분명히 바뀔 것이다. 학교는 학생들이 이런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아니, 최소한 못 하도록 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입시지옥, 무한 경쟁이란 말들이 사라져야만 할 것이다. 언제쯤 우리가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을까? 그날이 기다려진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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