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힘
대화는 어떠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까? 루엘 하우Ruel L. Howe는 《대화의 기적The Miracle of Dialogue》을 통해 상당히 인상적인 주장을 제시한다. 제목 그대로 대화는 기적을 창출한다. 우선 대화는 상호적이다 . 서로가 서로를 향해 지속적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서로가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며 자신의 진리를 상대의 진리에 맞대응하는 것을 일컬어 대화라고 한다. 이것은 존재를 바꾸는 방식의 대화다. 대화를 통해 서로의 지평을 하나로 융합하게 되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과 각자의 전망이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새로운 무엇을 빚어 내는 것이다.
이는 물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대화와는 상당히 다르다. 우리는 일상적 소재를 중심으로 대화를 나눈다.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며, 서로의 감정을 교류한다. 또한 이를 통해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일반적인 대화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것은 기존의 관성을 따라 진행되며, 따라서 존재의 변화를 초래하지 않는다. 설혹 변화를 촉구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변화가 아니라 상대의 변화를 지향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주장을 견지한 채로 상대의 주장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대화 이전과 이후에 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반면 루엘 하우가 보여 주는 바에 따르면, 대화를 통해 내가 변화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마르틴 부버의 사상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저자에 따르면, 《인간과 인간 사이Between Man and Man》 중의 교육 편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본다면, 《나와 너》에서 말한 다음의 관점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이것이 바로 그의 대화 철학의 근간에 놓여 있다. ‘나와 그것’ 중심의 관계 맺음에서 ‘나와 너’ 중심의 관계 맺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와 그것’의 관점에 입각한 대화와 ‘나와 너’의 관점에 입각한 대화는 다를 수밖에 없다. 전자가 앞서 말한 평범한 방식의 대화라면, 후자는 바로 변혁을 유발하고 기적을 초래하는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주체를 개방하는 방식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 나의 한계와 더불어 내 견해의 잠정성을 용인해야 한다. 진리는 아집이 도사리는 곳에 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향하여 열려야 한다. 주체와 타자와의 경계선이 고착된다면, 진리가 이 경계를 넘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그 경계가 흔들릴 때에 임하게 된다. 루엘 하우는 대화가 진리 탐구에도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대화는 자기 확신을 견지함과 더불어 상대의 확신을 존중하며 경청한다. 이로부터 양자의 지평 융합이 일어나서 새로운 이해를 도출하며, 양자를 새로운 경지에서 하나 되게 한다. 최소한 자신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독백과 대화를 나름의 이상형으로 비교해도 무방할 것이다. 독백은 편견을 조장하며, 아집에 고착시킨다. 내 생각에서 비롯된 말을 끝없이 되뇔 뿐이라면, 청자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반면 대화는 통찰을 촉발하며, 진리에 개방시킨다.
대화의 부적절한 출발점
그렇다면 이러한 대화는 무엇으로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일단 관계 형성을 위한 기교 또한 대화의 출발점으로서는 덧없는 것이다.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사랑의 기술》이 바로 이 점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원제는 Art of Loving이다. 이 책에서 프롬이 말하는 기술은 정확히 말한다면 기예로 번역해야 옳다. 기예의 습득 속에서 이론과 실천, 그리고 헌신이 하나가 된다. 또한 그가 말하는 사랑은 단지 매혹적 애정에 국한되지 않고, 신에 대한 경외와 친구와의 우정 등을 포괄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사랑의 기술》에서 프롬은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의 《인간관계론》으로 대표되는 인간관계 형성을 조작하는 세속적 기술에 대해 처세술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사랑의 기술》의 1장 초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남녀가 공용하는 또 한 가지 매력 전술은 유쾌한 태도와 흥미 있는 대화술을 익히고 유능하고 겸손하고 둥글둥글하게 처신하는 것이다. 사랑스러워지는 여러 방법은 성공하기 위해, 곧 벗을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갖기 위해 우리가 사랑하는 방법과 같다.”
통상 《인간관계론》으로 번역되는 카네기의 대표작의 원제가 How to Win Friends & Influence People이며, 내용 또한 제목 그대로 친구를 얻고 이웃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 매뉴얼이다. 프롬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표면적(피상적)인 매력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유형의 자기계발서에서 소개하는 기술은 무엇보다 인간을 조작의 대상으로 본다. 인간에 대한 관점이 제한적이기에 그 효과가 한정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인간의 표층을 건드릴 뿐 심층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
근자에 주목받은 자기계발서 가운데 켄 블랜차드가 타드 라시나크, 처크 톰킨스, 짐 발라드 등과 공동 집필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21세기북스)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인간 조작의 주요 기술로 칭찬을 제안한다. 여기에도 물론 인간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단순 훈육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물론 이것으로 인간의 변화가 제대로 일어날 리 없다. 이에 블랜차드는 마가렛 맥브라이드와의 공저로 다시 《진실한 사과는 우리를 춤추게 한다》(21세기북스)를 펴냈다.
최근에는 이보다 훨씬 정교한 기술들이 시중에 공개되고 있다. 이를테면 점술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사이비 독심술인 ‘콜드리딩 ’이나 영업자들이 많이 구사하는 세련된 모방술인 ‘NLP’를 들 수 있겠다. 단순한 매뉴얼에 따른 칭찬이나 사과보다 사이비 독심술이나 의도적 모방을 통한 심리 조작이 훨씬 더 효과가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교로 진실한 우정을 맺고 서로의 삶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통찰을 빚어 내는 대화를 할 수는 없다. 피상적 정념과 기교로는 인간의 심층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습득한 기교 대신 나 자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나 이 역시 좋은 출발점이라 할 수 없다. 생각 자체만으로는 자기 틀을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생각에서 출발한다면, 그 자체의 회로를 따라 순환하게 될 뿐이다.“ 문제는, 자기-생각이라는 게 워낙 타인을 배제하는 속성에 젖어있다는 것이다. 실은 생각이 적어서 공부가 모자란 것이 아니다. 실없이 생각이 많은 데다 결국 그 생각의 틀 자체가 완고한 테두리를 이루는 게 오히려 결정적인 문제다.” 애초에 생각은 자기중심적이어서 타자와 맞부딪히기 전까지는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타자를 배려하는 정중한 예의는 어떤가? 실은 이것으로도 부족하다. 합리적 동의에 장식으로 정중한 예의를 얹어도 간격을 메울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합리와 예의가 오히려 마음의 자연스런 분출을 가로막을 수 있다. 서동진(계원예술대학 교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철학자가 한 말이다. ‘이 세상에서 진짜 이웃은 내게 서슴없이 욕설을 퍼붓는 이웃이다.’ 곰곰이 생각하면 진짜 그럴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너무 많은 가짜 이웃들에게 에워싸여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결국 답은 우리의 가슴속에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면 된다. 각자의 생각이 다를지언정 마음은 마음과 통한다. 따라서 나의 마음으로 너의 마음에 말을 건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심층은 심층과 통한다. 표층의 뚜렷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심층에서는 서로 통하게 마련이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너의 마음 깊은 곳을 향해 말을 건네는 것이다. 나의 진심은 너의 진심에 가닿을 수 있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은 《예언자The Prophet》의 “대화에 관하여” 편을 통해 알무스타파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가 길가에서 혹은 시장에서 친구를 만나거든 그대 안에 있는 영혼이 그대의 입술을 움직이고 그대의 혀를 놀리게 하라. 그대의 목소리 안에 있는 참된 목소리가 친구의 귀 안의 참된 귀에 말을 건네게 하라. 포도주의 맛을 잊을 수 없듯이 그대 마음의 참된 진리를 친구의 영혼이 붙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포도주의 색깔이 잊히고, 그 잔도 더 이상 기억나지 않을 때에도.
서동진이 말하는 ‘가짜 이웃’은 마음을 나누지 않는 이웃들을 가리킨다. 진정한 교류는 거짓 예의를 벗어 버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서로에게 다가갈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거짓 예의를 벗어버리고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사이라고 하여 서로에게 욕을 퍼부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피부색이 다른 두 친구가 서로 “어이 깜씨!”, “왜, 흰둥아!”라고 할 때, 우리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농담 이면에 흐르는 깊은 영혼의 교감을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우리에게는 피부색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기에 다른 맥락에서 이를 찾아봐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에게는 피부색보다 지역색이 더 큰 문제가 된다. 호남인은 한국의 흑인이나 유대인에 다름 아니다. 돌려 말한다면, 흑인은 미국의 호남인일 것이고, 유대인이야말로 유럽의 호남인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남과 호남이, 보수와 진보가 서로를 허물없이 대할 수 있을 정도라면, 그들 사이의 대화는 분명 기적을 빚어낼 것이다. 혹은 성정체성 문제는 어떤가?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사이에 어색한 예의 따위는 걷어치우고 진솔하고 소탈하게 서로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런 맥락에서 나는 서동진의 다음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내가 동성애자라고 주변에 알린 뒤 어느 날 친한 이성애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가 하는 일을 좀 거들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내가 바쁜 일이 많아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하자, 그 친구가 이렇게 대꾸했다. “야, 인마, 한 번 줄게.” 나는 이 말을 듣고 그 친구가 진짜 내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는 소수자로서의 동성애자가 이렀느니 저렀느니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면서도 정작 동성애자를 둘러싼 혐오의 원천인 동성애적 성행동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굳어지는 그 거짓 이웃과 달랐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거짓 이웃과 대비되는 진짜 친구를 보게 된다. 진짜와 가짜는 마음을 둘러싼 형용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요새 유행하는 진정성 논의를 떠올리게 된다. 시대가 하 수상하여 속물성이 넘치다 보니 오히려 진정성을 강조하게 된 것일 게다. 이 진정성은 영어 단어로는 authority 에 상응한다. 이것은 author에서 연원한 단어다. 그러니까 진정성이란 다른 무엇으로 교체할 수 없는 오직 나에게 속하는 그 무엇을 가리킨다. 나의 진심으로 다가와주는 이가 바로 나의 진짜 친구인 것이다.
나의 진심이라 함은 나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거짓 이웃과 구별되는 참된 친구는 자기만의 서사, 자기만의 비밀, 자기만의 고통, 자기만의 기쁨 같은 것들을 통해 형성된 자신의 고유한 그 무엇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애초에 “참된 대화, 다른 사람과 인간적으로 접촉하는 순간”은 진솔하게 나를 드러내는 것, 이를테면 “어떤 비밀을 고백함”으로 가능하다. 내가 먼저 나를 둘러싼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말로 풀어도 무방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참된 친구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다.
이걸 달리 말해 보자. 우선 나 자신의 내면세계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밖으로 멀리 뻗어갈 수 있다. 내가 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방법들이 그대로 필요하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는 좋은 방법이 바로 4장에서 언급한, 위대한 고전의 암송이다. 당연히 이것은 내가 고전을 읽는 경험에서 고전이 나를 읽는 경험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도한다. 이를 통해 나의 영혼이 나 자신에게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고전의 구절들이 물리적으로 나의 귀를 사로잡고, 그 가르침이 심리적으로 나의 마음을 붙잡아야 한다.
또한 그러한 독서와 암송을 통해 촉발된 사유와 명상을 통해 나의 내면에서 나 자신을 만나야 한다(5장에서 다루었다). 나의 생각을 위대한 가르침으로 채워야 하고, 또한 그런 위대한 가르침을 통해 나 자신을 비추어 읽어야 한다. 독서가 암송으로 연장되듯이 사색이 묵상으로 연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에 대한깊은 사색이 자아에 대한 깊은 성찰로 전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 단계가 충족될 때 내가 나의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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