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아직은 아닌, 이제 더는 아닌, 아직은 아닌
- 프랜시스 멀헌(『뉴레프트리뷰』 부편집인 겸 편집위원)
1960년대 말, 『뉴레프트리뷰』는 인터뷰 형식을 잡지 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인터뷰 가운데 첫 번째는 1968년 말에 죄르지 루카치와 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루카치가 헝가리에서 미묘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이 인터뷰는 발표되지 않았다. 처음 지면에 등장한 인터뷰의 주인공은 각각 언어학과 철학 분야에서 탁월한 인물이면서 대조적인 스타일로 좌파의 독립적인 지적 참여의 본보기를 보여주던 노엄 촘스키와 장-폴 사르트르였다. 그 뒤 3년 동안 다섯 편의 인터뷰가 지면에 등장했다. 그중에는 이르시 펠리칸과 헤다 코르쉬의 인터뷰도 있었고, 불가피하게 지연된 루카치 인터뷰도 게재되었다. 이처럼 인터뷰가 집중적으로 분출하면서 인터뷰 형식은 『뉴레프트리뷰』의 중요한 한 축으로 확립되었다. 인터뷰 대상자들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인터뷰를 『상황Situations』의 한 권에 재수록했으며, 루초 콜레티 인터뷰는 그의 저작에 대한 관심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는 기폭제가 되었다. 『뉴레프트리뷰』의 또 다른 인터뷰 기획은 그 규모가 확대되면서 결국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정치와 문학』이라는 두툼한 책으로 나왔다. 새 천년이 되고 1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뉴레프트리뷰』에는 거의 100편에 가까운 인터뷰가 실렸는데, 그중 대다수가 편집위원들이 의뢰하고 수행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인터뷰 모음집에 수록된 내용은 대부분 여기에서 가져왔다.
인터뷰의 커다란 장점은 기동성과 광범위함에 있다. 보통 대화로 시작해서 인쇄물로 귀결되는 인터뷰 생산 과정은 언뜻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인터뷰에서 발생하는 즉흥성과 발언 속도는 글 수정과 보완을 통해 양 당사자가 통제할 수 있는 여지와 결합된다. 사실 이 과정에서 많은 구성 작업이 이루어진다. 소설과 같이 최소한의 의미에서만 유일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인터뷰에서는, 대화의 양극 사이에서 말과 글로 나타나는 온갖 다양한 변화(설명과 이야기, 유도 질문뿐만 아니라 각자의 주장이 오가는 설전, 감탄사, 일화, 여담까지도)가 가능하며, 일반적인 논문 형식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영화의 점프컷처럼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은근슬쩍 넘어가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제대로 된 논문의 목적에 부합하면서, 비교적 편한 목소리로 1인극과 같이 주장이나 이야기를 펼쳐 보이기도 한다. 이 책에 재수록한 인터뷰 가운데 몇몇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이야기 소재에 관한 광범위하고 질서정연한 역사적 설명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차이는 뚜렷하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인터뷰는 무엇보다도 일종의 초상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터뷰라는 양식에서는 조심스러운 방식으로나마 사상이 생각으로 바뀐다. 즉 과정으로서의 성격이 다시 활기를 얻는다. 개념들이 여러 전기적 장면의 무결 속에서 형태와 효과를 찾게 되고, 역사의 구조가 실제 삶을 통해 얻은 회고록의 해석 속에서 다시 굴절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념과 정치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춘다고 해도, 단순히 형식적으로 대화하는 체하는 시늉을 넘어서는 한, 인터뷰는 분명하게 자서전과 회고록의 색채를 띤다. 이런 여러 인터뷰의 시간적 복합성은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각각의 인터뷰를 하나씩 읽어보면 더할 나위 없이 간단하다. 어떤 주어진 시점에서 짜 맞춰진 회상과 발언과 기대의 특정한 조합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제시한 순서대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합류하는 식으로 읽으면, 인터뷰마다에 담긴 함의가 더욱 증폭되어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특히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각 개인의 역사가 서로 공유하는 연대기적 시간을 가로지르고,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서로의 설명이 갈라지며, 앞선 세대가 품었던 기대와 젊은 세대의 회고가 어정쩡하게 공존한다. 그리고 이제 어찌 됐든 시간이 흘러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특권을 지닌 독자는 이 사람들의 기대와 회고를 확인하게 된다. 특정 개인과 무관한 정치와 이론의 어려운 문제들이라 할지라도 이 과정에서는 객관성이 떨어지거나 감당하기 힘든 질문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복합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평가의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개인적인 것이 공적인 모순의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터뷰에서는 이런 문제들도 다르게 들리며, 집단적인 역사적 경험의 여러 순간들마다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이 인터뷰 모음집에서 말을 하는 열여섯 명은 모두 좌파의 서로 다른 세대에 걸쳐 있으며, 각기 다른 사고와 실천의 계보에 속한다. 루카치와 칼 코르쉬, 헤다 코르쉬 부부는 ‘벨 에포크’를 구가하던 유럽에서 성장했으며, 각각 헝가리와 독일의 공산당을 창건한 세대의 일원이다. 이 사람들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벌어진 혁명적 격변에 참여했다. 칼 코르쉬와 루카치는 공산당 정부에서 공직을 맡았고, 세 사람 모두 이후에 코민테른 정통파와 충돌했다. 훨씬 젊은 세대에게는 2차 세계대전의 서막과 결과가 중요한 공통된 준거점이다. 이르시 펠리칸(체코슬로바키아), 도로시 톰슨(영국), 루치아나 카스텔리나와 루초 콜레티(둘 다 이탈리아) 등은 1939년에서 1950년 사이에 자기 나라의 공산당에 들어갔다. 스탈린이 공식적인 공산주의 운동에 지배권을 뻗치던 시기였다. 에르네스트 만델(벨기에)과 아돌포 힐리(아르헨티나)는 각각 전쟁 직전과 얼마 뒤에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제4인터내셔널에 합류했다. 펠리칸과 만델은 레지스탕스 투사였다. 톰슨은 유럽이 해방된 뒤에 유고슬라비아에서 노동 자원봉사를 했다. K. 다모다란(인도)은 두 집단과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으며, 연령대로는 중간에 자리한다. 1930년대 말에 케랄라Kerala 주에서 공산당을 공동 창건했을 때, 그는 두 집단보다 스무 살 아래거나 위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노엄 촘스키(미국)는 연령대로는 비슷하지만 정치적-지적 형성에서는 다른 부류이다. 스스로 밝히는 것처럼 촘스키는 마르크스주의-무정부주의자이며, 또한 ‘유격대franc tireur’ 전통, 곧 당의 덕을 입거나 제약을 받지 않은 채 독립적인 인식을 통해 당대의 투쟁에 개입하는 지식인 전통에 속한다. 이런 점에서 촘스키의 동료로는 사르트르(프랑스)와 데이비드 하비(영국)를 꼽을 수 있다. 사르트르는 거의 동년배인 다모다란과 더불어 자기 세대의 별종이며, 하비는 서로 다른 스타일로 대륙을 가로지른 ‘유격대’인 조반니 아리기(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한참 나중인 1930년대 중반에 태어났다. 세대를 가로지른 이 집단이 좌파와 손을 잡게 된 매개물은 공산주의보다는 마르크스주의다. 그리고 20년의 간극을 거친 뒤 또 다른 세대 집단이 뒤를 잇는다. 1950년대에 태어나 20세기 후반에 형성된 집단이다. 주앙 페드루 스테딜레(브라질), 아사다 아키라(일본), 왕후이(중국) 등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상황에서 활동했으며 따라서 뚜렷하게 다른 역할을 맡았다. 오늘날 이 사람들을 아우르는 공통분모는 어떻게 보든 간에 부정적이다. 고삐 풀린 자본이 지구를 가로지르는 시기에 역사적 공산주의라는 대안은 제풀에 소진되거나 강령적 안티테제programmatic antithesis로 변신해버린 채 자본주의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고 있다.
이 열여섯 명이 한데 뒤섞인 상황은 눈길을 사로잡는 집단 초상화를 이룬다. 대다수가 상당한 학문 연구 경험이 있는 각기 다른 종류의 지식인들이 모인 그림이다. 대부분은 훈련받은 전문가인데,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담론에 곧바로 뛰어들 수 있는 분야에 속한다(언어, 문학, 철학, 사회 이론). 몇몇은 자신이 속한 당이나 운동에서 조직가이자 지도자, 저술가로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이 책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지적 헌신과 정치적 헌신 사이의 관계는 다양하기 때문에 강단 사회주의나 당파성에 따른 정신적 대가에 관한 일반적인 편견은 설득력을 잃는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학문에 전념한다고 해서 항상 안전하거나 높이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독자가 어림짐작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비밀 활동, 투옥, 추방, 망명 등의 일화가 빈번하게 벌어지며, 이는 때로 예기치 못한 지적·정치적 성과를 보상으로 안겨주기도 한다. 그람시의 고전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이 사람들은 ‘전통적’ 지식인(주어진 문화의 사회관계 속 각자의 자리에서 발언하는, 사전에 정해진 통상적인 정치적 중재를 전혀 거치지 않고 내면화된 윤리의 요구에 부응하는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자신이 대변하고자 하는 계급과 집단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런 계급과 집단 내부로부터 발언하는 지식인)의 범위 전체를 아우른다.
사르트르는 당대에 전자의 지식인, 곧 예언자적인 방식을 보여준 탁월한 대표자였으며, 1960년대에 그가 내놓은 정치 저술 가운데 이런 종류의 지식인을 위한 강령적 변호론이 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불과 몇 년 뒤에 베트남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촘스키는 ‘지식인의 책임’에 관한 책을 출간했다. 1970년대로 접어드는 무렵에 아리기와 그의 동료 사상가들은 전투적인 노동자 편에서 직접 복무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가진 전문적 지식을 그람시그룹Gruppo Gramsci이라는 논의의 장에서 펼쳤다. 또 오늘날 하비가 보기에, 비판적 지식을 강의실에서 투쟁의 전선으로 보내는 것은 직접적으로 중개를 거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실천을 정치에서 펼치는 일이다. 아사다와 왕후이 역시 학자이자 언론인으로서 각자의 나라에서 지성계의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인 ‘유기적’ 유형의 정확한 범위가 어떠한지는 지금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지만, 아무리 엄격하게 적용하더라도 브라질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오늘날 ‘땅 없는 농업 노동자 운동Movimento dos Trabalhadores Rurais Sem Terra’의 핵심 지도자로 활약하는 스테딜레 같은 지식인은 여기에 포함된다. 그람시를 다른 방식으로 읽어서 레닌의 사상에서 이어지는 통로를 다시 열어보면, 유기적인 것은 집합적 지식인으로서 당 개념과 연결되며 전략적으로 필수적인 토양으로서, 정치적 종합을 이루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문화적 분업을 초월하게 된다. 당은 조직된 투사인 지식인의 이상적인 공간으로서, 열여섯 명 중 절반 이상이 이런저런 형태로 몸을 담은 활동 영역이었으며, 당과 관련된 역사적 경험에 대해 단순한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다. 투사/지식인에서 ‘지도부’를 거쳐 관료로 변신하는 모습은 흔해 빠진 이야기 주제이므로, 잠시 숨을 고르면서 그 반대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평생 관리로 일한 사람이 사회적 위기의 압력 속에서 자신의 독립적 사고와 행동이 지닌 힘을 깨닫는다거나, 스탈린에 열광하던 지식인이 만년에 이르러 젊은 신앙주의자였던 자신의 과거 모습을 조용히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경우 말이다. 인도의 지식인 지도자 전통에 관한 다모다란의 성찰이나, 일본 공산주의 담론에서 개인적 고난이 카리스마적 힘을 발휘하는 데 관한 아사다의 회고를 보면, 정치 조직에서 어떻게 권위 관계가 형성되는지에 관한 생각은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특별한 극적인 장면 없이 당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복잡한 역할을 수행한 경우도 있다.
20세기 후반 역사적 공산주의에 닥친 위기 중 하나는 사회 투쟁을 정치적으로 중재하는 기관으로서 당 형태가 부인된 점이었다. 아리기가 보기에, 이탈리아공산당PCI 및 당과 제휴한 노동조합들에 대해서 그들의 구성과 실천이라는 차원에서만 반대할 게 아니라, 그들을 지양하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주체인 스스로 중재하는 ‘자율적인’ 노동자로 대체해야 했다. 이런 점에서 독립적 지식인으로서 아리기가 한 개입은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 개념을 일정하게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아사다, 그리고 특히 왕후이가 보기에 탈공산주의라는 조건은 어떻게 정의되더라도 논쟁적인 선택지라기보다는 그 의미를 여전히 밝혀내야 하는 역사적인 기정사실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역사의 포물선을 완성한다. 100년의 시간과 5대륙, 20여 개 나라를 아우르는 열여섯 명의 증언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산주의가 20세기 초에 처음 등장한 때부터 1990년대에 해체될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진 기록을 구성한다. 루카치는 반세기 넘도록 유지한 당원의 자격으로 발언하고, 코르쉬 부부는 지식인의 삶에 대한 구속의 끈을 조인 코민테른의 초창기 희생자이다. 펠리칸과 다모다란은 2차 세계대전 전야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자기 나라 당의 역사를 재구성하며, 아사다는 전후戰後 일본에서의 공산주의와 신좌파의 역사와 문화를 재구성한다. 콜레티와 카스텔리나는 이탈리아가 전후 40년 동안 겪은 경험을 평가하고, 사르트르와 촘스키는 급진 좌파에 대한 과거 공산당의 영향력이 쇠퇴하던 시점인 1960년대의 투쟁에 참여한 독립적 지식인으로서 발언하며, 왕후이는 중국의 역사적 변형 이후에 대항 정치가 갖는 잠재력과 난점을 탐구한다.
한 권의 책으로 누적된 이 인터뷰들은 어떤 운동의 역사와 더 나아가 이 운동에 의해 많은 부분이 규정된 다음과 같은 일반적 역사에 관한 비판적 증언이다. 1차 세계대전Great War에서 옛 제국들의 공동 몰락, 베르사유조약, 러시아혁명, 파시즘의 발흥. 2차 세계대전과 그 결과로 이어진 동유럽과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블록의 극적인 팽창, 인도 독립에서 시작해서 1970년대까지 계속된 반식민 혁명의 급증과 자본주의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미국의 등장. 서구 자본주의의 전후 장기 호황과 그 결과로 남은 대단히 불명료한 문화적 유산, 1970년대 해방 운동과 20세기의 마지막 몇십 년 동안 세계 전역을 휩쓴 신자유주의 둘 다에 연료를 공급한 거대한 탈승화desublimation 그리고 세계화와 금융 위기라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자본주의 질서의 개조. 마르크스주의 좌파와 노동 운동의 경우에 이 역사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아우른다. 1914~1918년 제2인터내셔널의 해체와 중부 유럽에서 혁명의 파고가 높아지는 가운데 이루어진 제3인터내셔널의 창건. 파시즘에 맞선 투쟁, 소련 스탈린 치하에서 이 투쟁과 동시에 이루어진 당 독재의 공고화와 트로츠키의 추방 및 그 결과물인 제4인터내셔널의 창설. 2차 세계대전, 히틀러Adolf Hitler의 소련 침공, 나치를 패배시키고 발트 해부터 아드리아 해에 이르는 공산주의 정권을 탄생시킨 붉은군대Red Army의 결정적인 역할, 유고슬라비아, 중국, 베트남, 북한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혁명. 인도 독립과 유럽 식민 제국의 점진적인 해체. 스탈린주의의 위기와 동구권 전역에서 발발한 노동자 봉기,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의 고발, 붉은군대의 헝가리 침공. 1956년 이후 서구 공산당의 출혈에 가까운 손실과 서구 신좌파 경향의 등장. 쿠바혁명. 공산주의 세계 대부분을 갈라놓은 중소中蘇 분열. 프라하의 봄과 바르샤바조약기구의 군사 개입. ‘1968’의 거대한 개막, 동남아시아에서 수세에 처하고 국내와 유럽, 일본에서는 반전 운동에 포위된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여러 나라 노동계급의 반란, 여성 해방 운동을 필두로 한 새로운 사회 운동의 부상. 남유럽 독재 정권들의 붕괴와 포르투갈혁명. 칠레의 군사 쿠데타와 남아메리카 전역의 반동적 독재의 확산. 유로코뮤니즘의 부상과 빠른 쇠퇴.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1989년 혁명을 향한 운동. 소련, 동구권, 공산주의 운동의 해체. 그리고 자본과 그 결과물인 사회 위기와 전쟁에 맞선 저항의 계속적인 움직임, 자본주의가 세계 전역에 거침없이 뻗어나감에 따라 어렴풋하게 나타난 ‘운동들의 운동’의 가능성.
루카치는 공산주의 정당도 없고 가까운 장래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기대도 보이지 않던 세계에서 성인으로 자라났다. 훗날 루카치가 말한 것처럼 ‘이제 더는 아니지만No Longer’ ‘아직은 아닌Not Yet’ 공간에 멈춰 선 세계였다. 최근의 세계는 몇몇 주요한 면에서 그다지 다르지 않지만, 당과 혁명 그리고 이 둘의 내부와 주변에서 지지와 반대의 깃발 아래 벌어진 무수한 투쟁을 아우르는 한 세기에 걸친 경험을 했다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마치 루카치의 시간적 형상이 역전되어, 지난 100년 동안 좌파를 지배한 중요한 이야기가 ‘아직은 아닌’에서 출발해 ‘이제 더는 아닌’에 도착한 여행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을 최후의 말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이르다. 오늘날, 세계 구석구석에서 자본에 맞선 갖가지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싸움을 떠받치는 것은 특히 자기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 자체의 악마적 에너지와 자본이 자신의 지정학적 존재 조건을 수호하기 위해 행사하는 폭력이다. 이 투쟁들의 형태는 다양하며, (투쟁의 주체와 수단, 조건과 목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어떤 금기에서도 자유롭다는 점에서 좌파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점에서도 우리는 어쩌면 1948년이나 1974년보다 1910년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이 논쟁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는 지난 세기의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의 여러 전통을 계승한 이들이 있으며, 그들에게서 역사적 특권을 기대하는 게 어리석은 만큼이나 그들이 가진 사상 체계나 실제 경험을 무시하는 것은 성급한 일일 것이다. 루카치는 오랫동안 신중한 처신을 한 뒤에 노동자 민주주의라는 고전적인 혁명의 주제를 거듭 주장한다. 라틴아메리카 민중 운동과 협력한 오랜 역사를 지닌 트로츠키주의자 힐리는 민중 투쟁에서 샘솟는 열망과 이 열망의 방향을 이끈 관습적인 계보에 관해 숙고한다. 한편 스테딜레는 브라질에서의 땅 없는 농업 노동자 운동의 경험을 곱씹으면서 교육, 즉 ‘운동을 위한 이론적 훈련’에 대한 고전적인 강조를 쇄신할 것을 호소한다. 왕후이는 반자본주의 정치에 역사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 도래한 현실에서, 자신이 옹호하는 입장을 ‘신좌파’라고 명명하는 게 과연 적절한지 질문을 던진다. 다른 한편 아리기는 여러 세기와 대륙에 걸친 자본주의 시대와 프롤레타리아화 형태가 엄연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지금, 자본주의를 넘어선 실현 가능한 좋은 사회를 가리키기 위해 새로운 명칭을 찾을 때가 아니냐고 묻는다. 이런 질문들은 기력을 다했다는 징후가 아니다. 지금은 몇 시일까? 확실히 이제 더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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