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과 사회
앞서 서론에 해당하는 글에서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이란 말을 소개했다. 물론 사회적 요인 이외에도 많은 원인들이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유전이나 타고난 체질은 물론이고, 병을 일으키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호르몬이나 근육 같은 신체 변화 역시 중요하다. 이들을 ‘생물학적 결정 요인’이라 한다.
그러나 사회적 요인과 생물학적 요인을 나누는 구분은 때로 무의미하다. 두 가지 요인은 흔히 겹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결핵은 분명 결핵균이 있어야 시작된다. 벤젠과 같은 발암 물질이 몸 안에 들어와야 백혈병이 생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왜 결핵균에 노출되었는지 그리고 벤젠은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많은 질병과 손상에는 사회적 요인과 생물학적 요인이 같이 작용한다.
사회적 결정 요인은 다시 여러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어 소득과 사회적 스트레스는 차원도 성격도 다르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전제로 한다면, 다양한 사회적 결정 요인 중에서도 ‘원인의 원인’, 즉 근본 원인이 중요하다. 계급이나 사회경제적 지위가 그런 것에 속한다.
계급과 사회경제적 지위는 추상적이다. 계급이 반영된 것이면서 동시에 현실에서 구체화된 가장 중요한 사회적 결정 요인으로 빈곤과 노동을 꼽고 싶다. 계급과 지위의 결과이자 다른 측면이기도 하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분석 변수이면서 아울러 실천의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전체 논의를 가난과 노동에서 시작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 요인의 실체는 가난과 노동이라는 말로 포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그리고 그것이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은 중층적이고 다차원적이다. 더위나 환경 변화처럼 물리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경제 위기와 같은 사회변동도 있다. 또 불평등이 발현되는 주체 역시 지역, 어린이, 여성 등 다양하다.
사회적 요인은 겉으로 보기에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한편으로 통합적이고 구조적이기도 하다. 건강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다양한 과정을 거치지만, 결국 그 경로 전체는 사회적 결정 요인의 특징에 따라 정해진다. 이제 생활과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이들 요인을 새로운 눈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건강은 얼마나 사회적인가
건강이 얼마나 사회적인가 따지기 전에 건강과 보건의료(또는 보건의료 서비스)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해야 하겠다. 보건의료는 건강을 보호하거나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건강 증진, 예방, 치료, 질병 관리, 재활, 보호 등을 의미한다. 특히 보건의료 전문직 혹은 그와 관련된 인력이 시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보건의료는 건강을 산출하는 데 기여하는 한 가지 요인일 뿐이다.
한 가지 원인이 병을 일으킨다는 것은 결핵균을 발견한 코흐가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한 가지 요인으로 건강과 질병 발생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건강과 질병을 결정하는 것은 단일한 요인만도 외부적 요인만도 아니라는 주장이 대세다. 특히 만성질환이 건강 문제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20세기 후반기 이후부터는 ‘다多요인설’이 질병 발생을 설명하는 주된 이론이 되었다.
여기서는 주로 사회적 요인을 다룰 참이지만, 생물학적 요인이 건강과 질병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확실하다. 아직도 중요한 건강 문제인 전염병을 생각하면 된다. 사회적 요인이나 환경이 같이 작용하지만, 외부의 미생물과 침입을 받는 쪽(사람)의 면역력을 포함해 생물학적 요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생물학적 요인이 중요하다는 것은 개인의 건강이나 질병 경험, 또는 회복 경험 때문에 설득력이 강하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더욱 그렇다. 구체적인 건강과 질병 현상을 두고 행태(예를 들어 흡연, 운동, 음주 등)나 사회적 요인, 정신적 요인 등으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슷하게 담배를 피웠는데도 어떤 사람은 폐암에 걸리고 다른 사람은 장수한다. 각 개인에게는 생물학적인 설명(예를 들어 유전자나 면역력)이 훨씬 설득력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요인의 중요성이나 기여도는 과장되어 있는 것이 확실하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 의대 교수인 보츠Walter Bortz가 추정한 결과로는 가장 대표적인 생물학적 요인인 유전도 인간 수명의 15~20퍼센트 정도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생물학적 요인은 다른 요인들과 합해지거나 다른 요인들을 통해서 영향을 미친다.
생물학적 요인과 대비되는 것이 사회적 요인이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 위원회’는 2008년 펴낸 최종 보고서에서 사회적 결정 요인을 ‘총체적’ 시각에서 정의했다. 위원회는 “빈곤층의 낮은 건강 수준, 국가 내에서 나타나는 건강의 사회적 격차, 현저한 국가 간의 건강 불평등은 국가적·국제적으로 존재하는 권력, 소득, 물자, 서비스의 불평등한 분포 때문에 생긴다”고 설명한다.
권력과 소득, 물자 등의 불평등한 분포는 사람이 살아가는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환경, 즉 의료, 학교, 교육 등에 대한 접근과 노동, 여가, 가정, 거주 지역의 조건에 불공정성을 초래한다. 이런 식으로 규정하면 건강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 요인들이 모두 망라된다. 세계보건기구의 정의는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국가적·국제적 요인, 즉 주로 거시 요인에 초점을 두었다.
이에 비해 좀 더 미시적 차원에서 사회적 결정 요인을 규정할 수도 있다. 영국 런던 대학의 브루너Eric Brunner와 마멋Michael Marmot 교수 팀이 설명한 것을 보자. 두 사람은 질병이라는 최종적인 결과는 생물학적 현상이지만 이것이 사회적 맥락 속에 있다고 본다. 사회구조가 질병과 사망, 안녕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 작용은 물질적 요인, 사회 환경, 노동환경이라는 세 가지 경로를 통한다. 그중 물질적 요인은 직접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이에 비해 사회 환경은 개인의 행동과 습관을 통해, 그리고 노동환경은 심리적 요인을 통해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 환경과 노동환경은 중간에 심리, 행태 요인을 거치는 것이 특징이다.
어느 쪽을 보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요인은 소득, 교육, 직업적 지위 등이다. 많은 조사와 분석, 연구가 일관되게 이들 변수와 건강의 관련성을 증명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2000년 이후 많은 증거가 모였다.
우선, 소득과 건강의 관계는 명확하다. 비교적 최근의 예를 보더라도, 1998년 경제 위기 이후 소득 감소와 불평등 악화가 건강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경제 위기가 없을 때도 마찬가지다. 울산대 강영호 교수팀의 연구?에 기초하면, 가구 소득을 다섯 단계로 나눌 때 최저 소득 가구에 속하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최고 소득 가구에 비해 1.56배 더 높다. 다른 조건을 같게 하고도 소득수준과 사망률은 정확하게 반비례한다.
건강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핵심 요인은 교육이다. 앞에서 인용한 연구에서는 교육 수준의 차이에 따른 건강 격차가 소득보다 더 뚜렷하다.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에 비해 무학인 사람의 사망률이 2.47배나 더 높다. 교육은 소득수준을 결정하고 소득은 다시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교육이 소득을 통해 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교육은 소득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직접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중요하다. 교육은 인지 기능을 향상시키고 인지적 요소는 건강 행태와 생활 습관에 영향을 미친다. 교육이 인지 기능을 통해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같은 소득에서도 교육 수준이 높을 경우 건강 수준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는 이런 경로를 통한 것이다. 소득수준에 비해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은 인도 케랄라 주에서 영아 사망률이 매우 낮다는 사실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하다.
소득이나 교육에 비하면 다소 미시적이지만, 노동과 작업환경도 중요한 사회적 요인이다. 이 가운데에 비정규직의 문제는 충분히 잘 알려져 있다. 흔히 물질적 조건이 불리하다는 것을 문제 삼지만, 소득이 같은 경우에도 비정규직의 건강이 더 나쁘다. 신체적 건강은 물론이고 정신적·심리적 건강도 악영향을 받는 것이 보통이다.
작업환경과 노동조건도 건강과 건강 불평등을 설명하는 데에 빼놓을 수 없다. 전통적인 건강 위험 요인인 장시간 노동이나 불안전한 작업환경은 당연하다. 아울러 변화된 노동과정으로 인한 사회심리적 스트레스도 건강 불평등을 초래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정책으로 연결될 때는 전통적인 위험 요인을 개선하는 것과 함께 새로운 요인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사회심리적 스트레스는 노동조직 및 노동과정과 직접 연관된다. 미시적인 접근뿐만 아니라 노동과정에 대한 참여 혹은 민주화라는 근본적 문제를 동시에 제기한다.
이 밖에 주거 조건, 지역사회의 특성, 환경적 요인 등이 건강과 건강 불평등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다. 최근 외국에서 수행된 많은 연구들이 이런 요인 역시 건강을 결정하고 건강 불평등을 만드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조금 혼란스러운 것이 보건의료 서비스다. 보건의료는 생물학적 요인에 직접 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회적 요인은 아닌 것처럼 보기 쉽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가 규정한 것에 기초하면 보건의료 서비스도 건강과 건강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요인에 들어간다. 보건의료 서비스가 제도와 정책의 결과물이므로 사회적 요인으로 분류한 것이다.
보건의료 서비스가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확실한 점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의학의 역할』The Role of Medicine : Dream, Mirage Or Nemesis?을 쓴 영국의 사회의학자인 토머스 매큐언Thomas McKeown(1912~88)이 연구한 결과는 의료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유럽에서 현대 의학이 확립되기 이전에 이루어진 건강 수준 향상의 대부분이 의료 때문이 아니라 영양 공급이 증가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건의료 서비스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건강과 형평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근에는 효과가 입증된 보건의료 서비스가 건강 수준 향상에 직접 기여한다는 주장이 많다. 신생아 중환자의 치료, 심장병 수술 등이 사람들의 생명을 연장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보건의료 서비스가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경로는 몇 가지로 나누어진다. 우선 경제적 요소를 포함한 다양한 접근성이 영향을 미친다. 보건의료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데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으면 건강 수준이 악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여기에는 보건의료 이외의 사회적 결정 요인이 다시 원인으로 작용한다. 실업과 소득 감소, 부담 능력을 넘는 의료비 지출 등이 그것이다. 또한 시설이나 인력과 같은 보건의료 자원이 제대로 없는 것도 접근성에 영향을 준다.
접근성 수준이 같아도 보건의료의 질적 수준이 다른 것이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004년 미국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에는 일차 진료의 질적 수준이 인종에 따라 달라진다는 논문이 실렸다. 일차 진료를 담당하는 의사들에게 설문 조사를 한 결과, 환자에게 양질의 의료를 제공하지 못했다고 응답한 비율이 백인 환자에서는 19퍼센트였던 반면 흑인 환자에서는 28퍼센트에 이르렀다. 인종(이 역시 사회경제적 요인이다)이라는 요인 때문에 건강이 달라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건강과 질병 현상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그러나 생물학적 요인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이 여전히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다 이제 사회적 관점을 보태야 한다. 미생물의 침입을 막고 유전적 결함을 고치는 것으로는 충분지 않다. 소득과 교육, 노동과 주거가 모두 개입과 변화의 대상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