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정의와 평화로 가는 길
01
닮은꼴
삐라 찾기
지금까지 삐라를 곁들여 가며 한국 전쟁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사람들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삐라는 무엇일까요? 왜 삐라를 만들었을까요? 또 지금 왜 굳이 60년도 더 지난 낡은 종이 쪼가리 삐라를 꺼내 한국 전쟁을 살펴보았을까요?
삐라는 선전의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예요. 선전은 어떤 생각이나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과정으로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행위잖아요. 그러니까 삐라는 어떤 주장을 다른 이에게 알리려는 목적으로 만든 인쇄된 종이 낱장이에요. 한국 전쟁 때는 미 극동군 사령부, 미 8군 사령부, 국방부 정훈국, 북한군, 중국군, 그리고 빨치산들까지 삐라를 만들어 뿌렸답니다. 전쟁 때 뿌려진 삐라의 목적은 분명하죠. 전선에 뿌려진 삐라는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거나, 자기편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내용이겠죠. 자신들의 세계관, 이데올로기를 담기도 했어요. 그래서 삐라를 만들고 뿌리는 행위는 심리전의 한 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전쟁 때의 삐라를 지금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삐라에는 지금 우리 사회를 휘감고 있는 생각, 이데올로기들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생각들이냐고요?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읽으면서 그것이 지금 내가 품고 있는 생각은 아닌지,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한테서 들은 이야기들은 아닌지, TV나 신문에 매일같이 나오는 말들은 아닌지 생각해 보세요.
백성들은 곤궁에 빠져 있는데
리승만 역도들은 환락에 취하고 있다. _ 앞면 글
리승만 매국 역도들은 여러분에게 농지 개혁에 의하여 땅을 분배하야 모두가 다 잘살게 한다고 큰소리쳤다. 이 얼마나 듣기 좋은 약속인가. (…)
그러나 실제에 있어 리승만 역도들이 이 약속을 지킨 법은 없다.
보라! 오늘날 남조선에서는 리승만 도당이 무시무시한 세금을 백성들에게 빨아내며 먹을 것이 없어 허덕이는 사람에게서도 공출을 강요하고 있지 않는가. 이 모든 공출이야말로 괴뢰군의 무기와 식량과 의약품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 그러나 괴뢰군 장병들은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의 영양분 없는 음식과 무기 등의 부족은 이 사실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그러면 백성들이 굶주려 가며 바친 세금과 곡식은 다 어데로 간단 말인가?
이에 대한 명백한 대답은 이것이다. (…)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리승만 역도들만 부정한 수단으로 잘 먹고 잘살고 있는 것이다.
리승만 역도들을 타도하라! 미국 침략자들을 몰아내라! _ 뒷면 글
그림 54 |
그림 55 |
한국 전쟁 동안 양쪽은 정말 많은 삐라를 뿌렸어요. 양쪽의 삐라 가운데 엇비슷한 구도와 문구를 가진 삐라도 있고, 단어 몇 개만을 빼고는 판박이에 가까운 닮은꼴 삐라도 여러 종류 있습니다. <그림 54>와 <그림 55> 그리고 <그림 56>과 <그림 57>은 각각 북한군과 미군이 만들어 뿌린 삐라로 ‘공산당 관리’가 ‘이승만 역도’로, ‘김일성 괴뢰군 장병들’이 ‘이승만 괴뢰군 장병들’로, ‘토지 개혁’이 ‘농지 개혁’으로 바뀌었을 뿐 그림의 구도, 색깔 그리고 뒷면의 내용도 모두 같아요.
<그림 54>와 <그림 55> 오른쪽에는 죽 한 그릇을 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어두운 색의 배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고픈 고통이 느껴지네요. 그러나 그림 왼쪽에는 잘 차려입은 남자가 여성들의 시중을 받고 있는데 그이의 손에는 양주잔이 들려 있고 상 위에는 양주병과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어요. 오른쪽의 어두운 색조와 다르게 화려함을 강조하려는 듯 붉게 칠해져 있죠.
뒷면의 내용은 농지 개혁(또는 토지 개혁)을 실시했는데도 무거운 세금을 거둬들여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입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그리고 ‘병사들에게 무기, 식량, 약품을 공급하려 공출한 것들로 관리들만이 잘 먹고 잘 입는다’고 비난을 퍼붓고 있습니다.
그림 56 |
그림 57 |
<그림 56>은 원래 북한에서 미군과 한국군을 상대로 만든 안전 보장 증명서예요. 미군은 이를 <그림 57>처럼 유엔 안전 증명서로 바꾸어서 사용했습니다. 그 까닭은 북한군 병사들이 의심받지 않고 몸에 지닐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림 58 |
공산 두목들이 여러분을 침략 전쟁에 몰아넣지 않었드면 통일된 자유 한국에서 여러분은 이와 같이 화평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림 58)
미군이 만들어 뿌린 <그림 58> 속에서 농사를 짓던 한 남자가 부인과 자식들이 가져온 새참을 먹으려 걸어 나오고 있고, 그 근처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환하게 웃고 있어요. 그러나 삐라에는 ‘공산 두목들이 침략 전쟁에 몰아넣지 않았다면 화평했을 것’이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곧 그림 속 평화는 ‘공산군이 침략하지 않았다면’ 가능했을 상황이며, 현실에는 없는 행복이지요.
그림 59 |
북한이 만든 <그림 59> 또한 아이를 안은 여성과 논에서 모를 심는 남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네요. 여성과 아이들 뒤로 펼쳐진 논은 모두 정사각형으로 잘 다듬어져 있고 왼쪽 앞은 형형색색의 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모두 평화롭고 아름다운 농촌의 모습이죠. 이 삐라는 북한으로 넘어오는 군인들의 대우와 관련된 그림이에요. 곧 투항하면 이 그림처럼 생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삐라들에는 주로 전쟁과 대비되는 평화와 행복의 판타지들이 실려 있어요. 현실에는 없는 것들이죠. 삐라는 이러한 판타지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자와 파괴하는 자를 비교해 보여 줍니다.
그림 60 |
그림 61 |
한국 전쟁 때 뿌려진 많은 삐라들은 안전 보장, 항복, 좋은 대우를 주제로 했어요. 그리고 감정을 자극하려 향수, 그리움, 설렘, 병사들에게 닥친 곤경, 선물 따위를 소재로 삼았습니다. 이 삐라들은 상대편(적) 병사들의 싸우고자 하는 마음을 누그러뜨릴 뿐만 아니라 전장을 벗어나려는 행동, 곧 투항이나 탈영을 불러오려는 의도를 담고 있죠. 아래 <그림 60>과 <그림 61>의 삐라가 이런 의도를 잘 보여 줍니다.
젊은 여성의 사진이나 이미지를 그려 애틋한 사랑을 보여 줌으로써 병사들을 자극하려 합니다. 중국군을 상대로 한 삐라 <그림 60>은 대만 출신 젊은 여성의 사진을 실어 병사들의 이성애를 자극하려 했지요. 치파오를 입은 삐라 속 젊은 여성이 엷은 미소를 띤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죠. 앞면에는 “아내와 아들 없이 병사들의 생활은 완성될 수 없다”라는 문구가 있어요. 미군을 상대로 뿌려진 삐라 <그림 61>은 병사들과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고 싶은 연인의 모습을 크게 확대해 보여 줍니다. 금발의 연인이 크리스마스 때까지 돌아오라고 하네요. 잠시 동안이나마 젊은 병사들의 마음이 흔들리겠지요. 이 삐라들이 젊은 병사들에게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움이나 사랑의 감정은 예나 지금이나 심리전의 소재임이 틀림없어요.
전쟁을 치르는 양쪽은 문구만 바꿔 서로를 비방하거나, 평화로운 판타지를 이용했어요. 이는 양쪽이 삐라로 얻고자 하는 바가 같았기 때문입니다. 곧 상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전장에서 벗어나고픈 병사들의 심정을 자극하거나 이데올로기를 상대에게 심어 주는 것이 목표였죠.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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