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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특회에 들어가는 이유
: 유사 가족, 인정 욕구, 사람 사이의 연대…… 모두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
“동영상 봤어.”
오랜만에 만난 재일 코리안 친구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다. 교토 사건 직후였다.
“너, 재특회였어?”
어쩔 수 없다. 들켰으니 부정할 수도 없다. 친구의 물음에 미야이 마사시(32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걸로 고등학교 때부터 사이좋던 친구를 잃게 되겠구나.’ 하고 미야이는 생각했다. 실제로 그다음부터 친구와 연락이 끊겼다.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미야이는 자신에게 말했다. 체포는 면했지만, 교토 사건에서 미야이가 펼친 활약은 동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인은 똥이나 먹어.”
“김치 냄새 난다.”
조선학교 관계자들을 격노하게 만든 이 욕설의 주인공이 미야이였다. 나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인신공격이라고 할 수조차 없었다. 이런 녀석은 취재를 거부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지만, 미야이는 의외로 흔쾌히 취재 요청을 받아들였다. 오사카 역 근처에 있는 호텔 라운지에서 만났다. 대낮부터 소주를 들이키면서도 미야이는 진지한 태도로 나와 대화해 주었다.
“지금 동영상을 보면 큰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어요. 행동 자체는 옳았다고 생각하지만, 유치한 발언이었죠.”
예상치 못했던 다음 말에 나는 허탈해졌다.
“조선인이 싫은 건 아니에요.”
미야이는 그렇게 몇 번이나 강조했다. 미야이 역시 내 앞에서는 예의 바른 남자였다. “야스다 씨는 적이지만.”이라고 하면서도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이야기했다. 소주의 힘이 다소 말을 많이 하게 만들었지만, 품위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끝까지 호텔 라운지라는 장소에 걸맞은 태도였다.
재특회와 그 관계자를 취재하다 보면 허탈한 일이 너무도 많다. 동영상과 인터넷만 보고 얼마나 나쁜 녀석인가 생각해 긴장하지만, 실제로 만나면 평범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물론 눈을 부릅뜨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나서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도 기껏해야 진부한 협박 문구를 뱉어 낼 뿐, 지금 생각해 보면 귀여운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파시스트’, ‘인종차별주의자’, ‘유사 네오 나치’라고 비난받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이 거리에서 하는 짓은 인종차별주의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막무가내 언어폭력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을까? 그런 피해자들의 분노에 공감한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만나면 그 폭력적 언어에서 연상되었던 무시무시한 느낌을 받는 일은 없다. 아니, 어쩌면 파시즘이나 인종차별주의도 실제로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역사적으로도 독재에 대한 열광을 밑에서 지탱해 온 사람들은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좌익이 말하는 ‘인민’ 말이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파시즘의 구조를 그린 명저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에서 나치즘에 경도된 독일 국민들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정상적인 발전 과정에서는 돈이나 권력을 얻을 기회가 거의 없는 수십만 명의 프티부르주아가 이제는 나치 관료 체제의 일원으로서 부와 특권을 자신에게도 나누어 달라고 상류계급을 압박해 상당히 큰 몫을 얻어 냈다는 사실이다. 나치 조직의 구성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대인과 정적에게서 빼앗은 일자리가 주어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더 많은 빵을 얻지는 못했지만 ‘구경거리’를 얻었다. 이런 가학적인 구경거리, 그리고 나머지 인류에 대한 우월감을 주는 이념은 그들에게 감정적 만족감을 안겨 주었고, 이 만족감은 그들의 삶이 경제적?문화적으로 빈곤해졌다는 사실을 적어도 당분간은 벌충해 줄 수 있었다.?
쉽게 말해 나치를 지탱한 것은 그야말로 ‘일반 시민’이었다는 얘기다. 폭력적이고 오만한 전형적인 파시스트가 아니라, 항상 무언가를 갈망하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재특회 회원들의 대다수는 이처럼 “빵을 얻지는 못했지만 ‘구경거리’를 얻은”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잃어버릴 것이 너무 많은 시대, 고독을 강요당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자신이 누리던 자유를 포기하더라도 강한 사람을 추종하려 한다. 사람은 파시스트나 인종차별주의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길러지는 것이다. 설사 선량함과 자애로 가득 찬 사람일지라도.
사랑하는 엄마
미야이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건축 관련 전문대학을 졸업한 뒤 육체노동을 하는 현장을 전전했다. 디즈니랜드, 유니버설 스튜디오, 간사이 공항 같은 대형 공사 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지금은 대형 운송 회사의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야근도 많고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환경이지만 결코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는다. ‘애국 활동’에 맞춰 아르바이트 시간표를 짠다. 개인적인 시간은 거의 없다.
재특회에 들어간 계기는 ‘칼데론 가족 추방 시위’를 동영상으로 본 것이었다. “불법 입국자를 쫓아내라.”라는 주장에 공감했다고 한다(“칼데론 시위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는 홍보국장 요네다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재특회에 들어간 사람이 이렇게 많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미야이는 처음에 재특회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집회 중에 항의하러 온 노조 간부의 안경을 파손한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그 책임을 지고 재특회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활동을 그만둔 것은 아니고, 간사이 팀의 주요 구성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미야이는 술을 계속 마시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일본에 살면서 일본을 비판하는 외국인은 용서할 수 없다.”
“일부 외국인은 이권을 위해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은 야마토 민족의 것이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기에 내 마음에 전혀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미야이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나도 모르게 펜을 쥔 손을 멈추었다.
“엄마, 사랑했죠. 저는 평생 마마보이예요.”
미야이는 숙연히 어머니에 대해 말했다. 미야이가 스물두 살 때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날 교토 지방재판소의 보수공사 현장에서 드릴로 자재를 깎고 있던 미야이의 휴대전화에 입원 중인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어머니는 이미 중환자실 침대에서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미야이는 넋을 잃고 심전도 모니터를 봤다. 심장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파장이 점점 약해졌다. “엄마, 죽지 마.”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대로 영면했다.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아무 일도 하기 싫었죠. 반년 동안 계속 집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저는 무서운 게 없어요. 엄마의 죽음만큼 무서운 게 어디 있겠어요.”
미야이의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
“언젠가는 엄마 이름을 몸에 새기고 싶어요.”
감상에 젖은 미야이에게 미안했지만, 약간 심술궂은 질문을 해보았다.
“어머님이 살아 계셨다면 지금 활동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미야이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엄마라면 꼭 인정해 주실 거예요.”
그날 미야이가 정색을 한 것은 이때뿐이었다. 한편 지금도 같이 살고 있는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아빠랑은 대화도 안 해요.”
미야이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지금 가족 이상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간사이 팀 동지들이다. 그중에서도 리더에 해당하는 니시무라 히토시에게 빠져 있다.
“멋있어요. 평소에는 소탈한데, 활동할 때는 할 말을 제대로 하거든요. 일종의 협객이에요.”
미야이는 “제가 히토시 형의 부하라고 써주세요.”라고 덧붙였다.
니시무라 히토시는 실제로 형님 같은 인상을 준다. 좋은 의미의 건달 같은 느낌이 든다. 아마도 동료들을 잘 보살펴 줄 것이다. 어쩌면 미야이는 니시무라에게서 ‘이상적인 아버지’를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미야이의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는데, 호리호리하고 얌전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미야이의 집을 찾았을 때, 미야이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아버지는 내가 다 죄송할 정도로 주눅이 들어 보였다. 아마도 착한 성격일 것이다. 자식을 언론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졌다. 그러나 미야이는 그런 아버지를 싫어한다. 미야이가 원하는 ‘부성’을 가진 사람은 니시무라 같은 인물일 것이다.
실제로 재특회 같은 보수 조직에는 어딘가 유사 가족과 같은 분위기가 감돈다. 니시무라 히토시와 아라마키 하루히코 같은 연장자를 ‘형님’처럼 따르는 젊은 회원들이 은근히 많다. 3장에서 나온 오카모토 히로키(21세)도 “아라마키 형은 진짜 남자예요.”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오사카의 고급 아파트에 사는 S(7장 참조)도 일찍이 간사이 팀 구성원들에게 어머니처럼 존경받았고, 이들을 아들이나 딸처럼 예뻐했다고 한다.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알게 됐어요. 다들 가족을 원하고 있다고.”
이렇게 말한 것은 도쿄에 사는 후지이 마사오藤井正夫(66세)라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자민당 의원의 선거운동을 도운 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로 여러 보수 운동에 관여해 왔다. 현재는 ‘자랑스러운 일본의 모임’이라는 단체의 이사장을 지내고 있다. 실은 사쿠라이가 지금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후지이라는 이야기를 나는 어느 현역 간부에게 들은 적이 있다.
“채널 사쿠라의 미즈시마 씨, 그리고 니시무라 슈헤이 씨 등 일찍이 사쿠라이 회장의 곁에 있던 어른들이 점점 떠나는 가운데, 지금은 후지이 씨가 유일한 보호자라고 할 수 있죠. 집회가 끝나고 후지이 씨 집에서 뒤풀이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내가 처음으로 후지이의 집을 찾았을 때 마침 사쿠라이를 비롯한 재특회 간부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현관에 나온 후지이는 내게 “지금 자네를 집에 들이면 수습이 안 돼.”라고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날을 잡아서 다시 와 주게.”라며 귀띔을 했다.
후지이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찾아간 나를 그는 연장자답게 신사적으로 대해 주었다. 채널 사쿠라가 설립되었을 때 후지이는 ‘사설 응원단’으로 시청자 확대에 협력했다. 사쿠라이와는 그 무렵부터 알게 되었다. 후지이는 사쿠라이와 재특회를 높이 평가했다.
“저도 여러 보수 단체에 관여했지만, 재특회는 보수의 역사를 다시 썼습니다. 정면에서 재일 코리안 문제를 깊이 다룬 것은 재특회가 처음일 거예요. 감동적이죠. 지금까지 보수는 물론 우익 민족주의자도 손대지 않았던 분야죠. 사쿠라이 군은 그런 의미에서 개척자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재특회가 일으킨 사건들과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후지이는 “음, 잘 모르겠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어떤 행동을 하면 비판이나 비난도 따르겠죠.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국가를 위해 행동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점에서 재특회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예전부터 보수 운동에 관여해 온 사람들 중에 이렇게까지 사쿠라이와 재특회를 칭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쿠라이가 의지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리고 후지이는 “재특회 애들은 다 귀여워요. 내 앞에서는 착한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생각했어요. ‘아, 이 아이들은 가족 같은 관계를 원하고 있구나.’ 하고. 재특회는 유사 가족 같은 거죠.”라고 말했다. 후지이는 젊은 시절 잠시 임협 조직에 몸을 담은 적이 있는데, 한마디로 야쿠자였다. 그는 그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서 알 수 있어요. 그들이 가족을 원하는 기분을. 야쿠자 세계에도 그런 요소를 동경하며 조직에 들어온 사람이 적지 않죠. 조직이야말로 그들에게 가장 편안한 집이니까요. 물론 재특회는 야쿠자가 아니고, 야쿠자와 연관성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가족에 대한 욕구 같은 것이 비슷해요.”
재특회는 ‘고향’인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신뢰와 서로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재특회가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 사람은 재특회와 간사이 팀의 구성원이었던 30대 남성이다. 그는 “동지들과 있을 때만큼은 즐거웠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집회 중에 갑자기 훼방꾼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어요. 저도 모르게 ‘쫓아내라!’라고 외쳤는데, 그때 주위 동지들이 다들 동조해 주었어요.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을 때의 쾌감과 동지들이 지켜 준다는 안도감, 한때 재특회에 빠졌던 건 그런 기분 때문이었어요. 살면서 그만큼 도취된 적도 없었어요. ‘아, 동지는 좋은 것이구나.’ 하고 진심으로 생각했어요. 솔직히 우리는 부모에게도, 세상에서도 좋은 평가를 못 받고 있잖아요. 그런데 활동할 때 동지들은 반드시 저를 인정해 주었어요. (간사이 팀의) 아라마키 형이나 니시무라 형은 언뜻 봐서는 불량스러운데, 사실 무척 좋은 사람들이에요. 동지들이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 꼭 구해 주거든요.”
일 때문에 잠시 활동을 쉰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집회에 나가자 다들 나무라기는커녕 “잘 돌아왔어.”라며 박수로 맞아 주었다고 한다.
“모두가 좋아하는 아라마키 형은 집회가 끝나면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해요. 다들 감격하죠. 집에도, 회사에도, 학교에도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나를 봐준다, 인정해 준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주리라는 안심은 동지가 아니면 느낄 수 없어요.”
그러나 그런 성취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간사이에 살다 보면 아무래도 재일 코리안 친구들이 있기 마련이에요. 처음에는 ‘조선인을 쫓아내라.’라고 외치면 기분이 좋았는데, 머릿속에 점점 재일 코리안 친구들이 떠오르는 거예요. 제 친구가 어릴 적에 재일 코리안 동네에 있는 판자촌에 살아서 저도 그 근처에서 같이 놀았는데, 거기 사람들 얼굴도 떠올랐어요. 도대체 그 사람들에게 무슨 특권이 있단 말인가. 차츰 냉정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그런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되면 어쩔 수 없어요. 아무와도 상담할 수 없죠. 제가 적으로 규탄당해 버리거든요. 같은 길을 똑바로 의심 없이 걸을 때만 가족이고 형제인 거지, 활동 그 자체를 의심하면 용서받을 수 없어요. 뭐,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가족이죠.”
그러나 “활동에 빠져 있을 때는 행복했다. 인정받는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라고, 그 사실을 집요할 정도로 강조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어딘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서일본에서 지부장을 지냈던 회사원 남성도 “회원들 중에는 여기서 처음으로 인정받는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다들 쭈뼛쭈뼛 활동에 참가해요. 어설프게 일장기를 손에 들고, 익숙하지 않은 손으로 마이크를 잡죠. 가두연설 같은 걸 잘할 리도 없고요. 솔직히 말해서 엉망진창이죠. 그런데 연설 마지막에 구호를 외치면 다들 제창해 준단 말이에요. 이게 중독되는 거죠. 다음 집회부터는 마이크를 손에서 놓으려 하질 않아요. 한번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 확 바뀌거든요. 저는 그런 모습을 몇 번이나 봤어요. 재특회에는 얌전한 아이를 전투적인 애국자로 바꾸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실제로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해 보면 현실 사회에서 힘들어 보이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인터넷이 재특회의 큰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터넷에는 “재특회 회원들은 모두 인생의 낙오자”라는 식으로 그들을 야유하는 글도 넘친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SNS를 보면 재특회 간부와 회원들을 ‘백수’나 ‘은둔형 외톨이’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전직 지부장은 그런 견해를 부정한다.
“백수나 은둔형 외톨이였던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다수는 아니에요. 직장이나 학력과는 상관없이 어딘가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많긴 해요. 재특회의 장점은 오는 사람은 안 막는다는 신조를 관철하고 있는 거예요. 자신들이 소수파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누구든 대환영이죠. 일단 행동을 같이한다면, 참가자가 재일 코리안이라도, 다른 외국 국적이라도 상관없어요. 거리에서 함께 외치기만 하면 되니까요.”
나는 재일 한국인이 조부인 오카모토 히로키와 이란인 혼혈인 호시 에리야스를 생각했다. 그들 역시 재특회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호시는 “재특회만이 나를 일본인으로 인정해 주었다.”라고 단언했다. 편협한 내셔널리즘을 선동하고 있는 재특회에 그런 ‘아량’이 있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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