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 서론
서양의 3대 종교의 원천으로서 헤브라이어로 쓰인 구약성서는 소중히 다루어야 할 역사적 유물 이상의 가치가 있을까? 종교적 가치를 은연중 또는 공공연히 부정하는 유물론적 철학을 비롯해 혁명, 자동화, 핵무기가 판치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구약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헤브라이어로 된 구약이 여전히 의미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구약 외경을 포함한 구약은 1000년이 넘는 기간(기원전 약 1200년부터 기원전 100년 사이)에 여러 저자가 쓴 내용을 모은 것이다. 그 안에는 율법, 역사에 관한 기술, 시, 예언자의 말 등이 포함되어 있지만 실제 내용물은 헤브라이인이 1100년 동안 만들어낸 방대한 문헌의 일부에 불과하다. 구약은 문화적·사회적으로 전혀 다른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을 위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교차로에 있는 어느 작은 나라에서 씌어졌다.
헤브라이어로 된 구약이 유대교뿐 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교 발생에 중대한 기여를 했으며, 유럽과 아프리카, 근동의 문화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헤브라이어로 된 구약은 유대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에서조차 한낱 과거를 훌륭하게 대변하는 유산으로만 여겨지는 것 같다. 대다수 기독교도는 신약에 비해 구약은 거의 읽지 않는다. 게다가 구약을 읽는다 해도 편견에 사로잡힌 나머지 내용을 자주 곡해한다. 사람들은 흔히 구약이 정의와 복수의 원리만 밝힌 반면, 신약은 사랑과 자비의 원리를 기술하였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대다수 사람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말조차 신약에만 나온다고 생각한다. 또 구약은 편협한 민족주의 정신에 입각해 서술되었을 뿐 신약의 특징을 이루는 초민족적 보편 구제주의universalism의 요소를 전혀 담고 있지 않다고 간주한다. 최근 일부 신교도와 가톨릭교도가 구약에 대해 보이는 태도와 예배의식의 변화는 고무적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유대교도는 안식일 외에 월요일과 목요일에도 구약의 첫 5편인 모세 5경 일부를 음송하고, 해마다 한 번씩 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음송하기 때문에 구약에 훨씬 익숙한 편이다. 이렇게 얻은 지식은 구약의 인용구가 많이 들어 있는 탈무드를 연구하면서 한층 풍부해진다. 오늘날 탈무드 전통을 따르는 유대교도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이런 생활방식은 150년 전까지만 해도 모든 유대교도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전통적 생활 속에서 성서 구절을 모든 사상적?종교적 가르침의 바탕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유대교도는 성서를 활발히 연구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성서 이용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새로운 사상이나 종교적 율법을 뒷받침하는 데 성서 구절이 문맥과 상관없이 인용되다 보니 본래 의미에 맞지 않게 해석되고 만 것이다. 그런 왜곡이 발생하지 않는 경우조차 대개 전체 문맥상의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사상을 뒷받침하는 특정한 구절의 ‘유용성’에 더 관심을 두었다. 사실상, 성서 구절은 직접적·체계적 연구보다 탈무드와 암송으로 더 잘 알려졌다. 《미슈나》* 나 《게마라》** 따위의 구전 전승 연구는 더욱 중요하고 한층 흥미로운 지적 도전이었다.
* Mishnah: 탈무드의 제1부를 구성하는 유대교의 불성문율집(不成文律集) - 옮긴이
** Gemara: 탈무드 중 주석편의 제2편 - 옮긴이
유대교도는 몇 세기에 걸쳐 자신들의 고유한 전승 정신에 따라 성서를 이해했을 뿐 아니라 유대교 학자들은 접촉한 다른 문화의 사상으로부터 대단히 큰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필론*은 구약을 플라톤식으로 이해했고, 마이모니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이해했으며, 헤르만 코엔***은 칸트식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고전적인 주석서들은 중세에 씌어졌다. 가장 저명한 주석자는 라시****인데, 그는 중세 봉건제도의 보수적 시대정신에 따라 성서를 해석했다. 사실, 헤브라이어로 된 구약에 관한 그와 다른 이들의 주석서들은 성서 구절의 의미를 언어학적·논리적으로 분명히 밝혔다. 흔히 그들은 유대교 율법 박사들이 엮은 《하가다》*****와 유대교의 신비주의적 전승, 때로는 아랍 철학자들과 유대교 철학자들의 사상에 입각해 성서 구절의 의미를 보강했다.
* Philon: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유대 사상과 그리스 철학을 융합하여 중간 실재로서의 로고스설을 주장하였다. - 옮긴이
** Moses Maimonides: 1135~1204, 유대계 철학자·신학자·의학자·천문학자 - 옮긴이
*** Hermann Cohen: 1842~1918, 독일의 철학자. 인간의 능동적 측면을 강조한 신칸트학 창시자의 한 사람 - 옮긴이
**** Rashi: 1040~1105, 프랑스의 유대계 성서 주석학자 - 옮긴이
***** Haggadah: 유대교 전승 중 전설·민요·설교·주술·점성과 같이 율법적 성격이 없는 이야기들
중세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유대인, 특히 독일, 폴란드,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거주한 유대인의 경우를 보면, 이런 고전적 주석서들의 시대정신이 유대인 강제 거주 구역에 뿌리박고 그 풍조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는 바람에, 그들은 현대의 사회생활, 문화생활과 거의 접촉하지 못했다. 반면에 18세기 말부터 당대 유럽 문화에 편입된 유대인은 구약 연구에 거의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구약은 1000년 동안 여러 저자가 써서 편집·재편집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였으며, 원시적 권위주의와 배타성에서 인간의 근원적 자유radical freedom와 인류의 형제애로 놀랄 만큼 진화한 산물을 담고 있다. 구약은 일종의 혁명서다. 주제는 과도한 혈연, 지연, 우상숭배, 노예 소유제도, 힘센 지배자 따위로부터의 인간 해방이며, 개인의 자유, 국민의 자유, 온 인류의 자유를 다룬다. 오늘날 우리는 헤브라이어로 된 구약을 과거 어느 때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분명 우리는 여러모로 잘못을 저지르는 바람에 새로운 유형의 종속관계에 처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과 ‘사회법규’의 제재를 받는 모든 유형의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혁명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전통에 거의 얽매이지 않고 진행 중인 해방 과정의 본질을 철저히 인식하는 자들이야말로 서양 문화에서 오래된 책 중 하나인 구약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이 구약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한다. 나는 구약을 ‘하나님 말씀’으로 보지 않는다. 역사적 고찰을 통해 구약이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던 각기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쓴 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내가 유신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약은 수천 년 동안 타당성을 유지해온 여러 규범과 원리를 표현해놓은 대단한 책이다. 지금도 여전히 타당하며 장차 실현해야 할 일종의 비전을 선언한 책이다. 성서는 한 명이 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쓴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삶과 자유를 위해 여러 세대에 걸쳐 투쟁해온 한 민족의 정신을 나타낸다.
구약 편집자들은 자신들이 이용한 여러 자료 사이의 모순을 언제나 없애려 한 것은 아니다. 분명 그들은 그러한 모순이 완전체의 여러 양상임을 알고 모순의 진화 과정을 심사숙고하여 여러 부분을 단일한 형태로 바꿀 만큼 위대한 통찰력과 지혜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넓은 의미로 보아, 그런 편집자들의 작업이나 성서를 마지막으로 완성한 현인들의 작업은 저술 작업과 다름없다.
헤브라이어로 된 구약은 여러 자료를 모아 편집하긴 했지만 책 한 권으로 취급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다양한 편집자들의 수고와 지난 2000년 동안 한 권으로 읽히고 이해되는 과정을 거쳐 책 한 권이 되었다. 게다가 각각의 구절은 원래 자료에서 구약 전체의 새로운 문맥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바뀌었다. 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여러 학자에 따르면, 이 구절은 제사장 문서Priestly Code를 편집자가 거의 수정하지 않고 삽입한 옛 문장 그대로다. 일부 저술가들에 따르면, 이 구절에는 하나님이 곧 하나의 인간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원문 고유의 뜻으로 한정지어 말하면 이는 틀림없는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에 관해 옛 개념을 갖지 않은 편집자는 왜 이 구절을 바꾸지 않았을까? 편집자가 이 구절을 하나님 형상을 따라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로 파악했기 때문인 듯하다. 또 다른 예는 하나님 형상을 만들거나 하나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 경우다. 이는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을 종교적 금기로 여겨 하나님 형상을 만들고 하나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 일부 셈족 종파의 옛 관습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러나 옛날 종교적 금기의 의미는 책 전체 맥락에서 새로운 개념으로 바뀌었다. 즉 하나님은 구체적 형체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떤 이름이나 형상으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다.
구약은 소규모 원시국가가 이름 없는 하나님과 모든 사람의 궁극적 통합, 각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믿는 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을 서술한 문서인데, 그 국가의 종교 지도자들은 유일신만 존재하며 우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유대인의 역사는 구약 24권이 편찬된 시점에도 계속 이어졌다. 헤브라이어로 된 구약에서 시작된 사상은 진화 과정을 좀 더 충분히 밟아나갔다. 이 흐름은 두 방향으로 이어졌다. 하나는 기독교 성서인 신약으로 표현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이른바 ‘구전 전승oral tradition’이라는 유대교의 발생으로 나타났다. 유대교 현인들은 언제나 문자로 된 전승(구약)과 구전 전승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강조했다. 구전 전승 역시 경전으로 편찬되었는데, 《미슈나》는 대략 200년에, 《게마라》는 500년에 각각 편찬되었다. 역설적인 사실이지만, 구약이 여러 세기에 걸쳐 쓴 저작물의 선집이라고 보는 사람들일수록 문자와 구전 전승 사이에 통일성이 존재한다는 전통적 견해에 쉽게 동의한다. 구전 전승은 문자로 된 구약과 마찬가지로 1200년이 넘는 동안 표현된 사상을 담았다. 제2의 유대교 성서가 편찬된다고 가정하면, 거기에는 하시디즘* 지도자들의 설교뿐 아니라 탈무드와 마이모니데스의 저작물, 유대교의 신비철학이 포함될 것이다. 만약 그런 저작물의 선집이 편찬된다면, 구약보다 불과 두어 세기를 포괄하는, 생활 환경이 전혀 다른 여러 저자의 저작물로 구성될 것이며, 구약처럼 모순된 사상과 가르침이 다수 담길 것이다. 물론 그런 제2의 성서는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러 이유로 편찬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계기에 전달하고 싶은 것은, 구약은 오랜 기간 발전해온 사상의 표본으로, 구약이 편찬된 뒤에도 이 사상은 아주 오랫동안 계속 발전해왔다는 점이다. 이 연속성은 오늘날 출판된 탈무드 곳곳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거기에는 《미슈나》와 《게마라》뿐 아니라 마이모니데스 이전부터 빌나 가온** 이후까지 기록해둔 일련의 주석서들과 논문들이 포함되어 있다.
* Hasidism: 헤브라이어의 hasid(경건한 자)에서 유래. 넓은 의미에서는 율법의 내면성을 존중하는 유대교의 경건주의 운동을, 좁은 의미로는 18세기 초 폴란드나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대중 사이에 널리 퍼진 성속일여의 종교적 혁신운동을 말한다. - 옮긴이
** Vilna Gaon: 18세기 탈무드 주석가 - 옮긴이
구약과 구전 전승은 모두 그 자체로 모순되는 내용을 포함하지만 성격은 조금 다르다. 구약의 모순은 헤브라이인이 소규모 유목 부족에서 바빌로니아에 거주하며 훗날 헬레니즘* 의 영향을 받은 민족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비롯했다. 구약을 완성한 이후의 모순은 옛 생활에서 문명화된 생활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런 모순들은 성전 파괴**부터 히틀러의 전통적 유대문화 중심지의 파괴까지, 유대교의 모든 역사를 관통하는 상반된 여러 시대 풍조 사이의 끊임없는 불화속에서 탄생했다. 이것은 민족주의와 보편주의의 분열, 보수주의와 급진주의의 분열, 광신과 관용의 분열이다. 양대 진영과 그 사이에 낀 여러 분파는 물론 각자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하며 세력을 겨룬다. 그 근거는 유대교가 전파된 나라들(팔레스타인, 바빌로니아, 이슬람교도의 지배를 받은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중세 유럽, 제정러시아)의 특정 조건과 학자들이 속한 특정 사회계층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 Hellenism: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 이후 그리스 고유문화가 오리엔트문화와 융합하여 이룬 새롭고 세계적 성격을 띤 문화로 헤브라이즘과 함께 서양 문화의 2대 조류가 됨. - 옮긴이
** Destruction of the Temple: 성서시대의 예루살렘에는 같은 장소에 성전이 세 곳 있었다. 제1성전은 솔로몬왕이 세운 솔로몬 성전으로, 기원전 587년경 바빌로니아의 네브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2세가 파괴했다. 제2성전은 유대인이 바빌로니아 포로 상태에서 귀환하여, 스룹바벨의 지휘로 파괴된 솔로몬 성전을 재건축한 스룹바벨 성전이다. 이 성전은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파괴했다. 제3성전은 유대 왕 헤로데가 폐허가 된 스룹바벨 성전 터에 세운 헤로데 성전인데, 70년 로마군이 파괴하였다. 현재 ‘통곡痛哭의 벽’은 이 제3성전 서쪽 벽의 남은 잔해에 해당한다. - 옮긴이
이런 이유 때문에 구약과 후기 유대교 전승은 해석하기가 어렵다. 어떤 발전 과정에 관한 해석은, 그 과정에서 나타난 일정한 경향으로 풀이해야 한다. 그러려면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요 경향, 최소한 하나의 주요 경향을 구성하는 요소를 추려낼 필요가 있다. 이는 일정한 사실의 중요성을 평가하여 좀 더 전형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낸다는 뜻이다. 모든 사실을 똑같은 비중으로 다루는 역사는 사건을 나열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그 경우 사건들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언제나 역사를 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해석자가 미리 판단한 명제를 뒷받침하려고 일부 자료를 골라내는 위험에 빠지지 않을 만큼 사실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것들을 중요하게 다루느냐다.
그 다음으로 해석이 충족시켜야 할 유일한 조건은 구약과 탈무드, 후기 유대교 문헌에서 인용한 구절들이 희귀하고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인물들이나 한결같고 발전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쪽에서 언급한 말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서로 모순된 진술도 무시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서로 모순되는 사고방식도 이 책에서 강조된 부분과 함께 존재하는 통일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근본적 휴머니즘 사상이 유대교 전승의 주요 발전 단계를 구분하는 사상인 반면 보수적 유형, 즉 민족주의적 유형이 더 낡은 시대의 잔재이며, 보편적 인간 가치에 기여한 유대교 사상의 발전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하려면 한층 폭넓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성서 연구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 책은 어린 시절부터 구약과 탈무드를 공부하면서 깊이 생각하고 반추해온 노력의 결실이다. 그렇지만 위대한 유대교 율법학자들에게서 헤브라이어로 된 구약과 후기 유대교 전승을 철저히 지도받지 못했다면 감히 이런 해설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유대교 전승의 휴머니즘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로 유대교 관습을 엄격히 지켰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크게 달랐다. 한 사람은 루트비히 크라우제Ludwig Krause인데, 그는 근대 사상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전통주의자였다. 또 한 사람은 네헤미아 노벨Nehemia Nobel인데, 그는 서양의 휴머니즘 사상뿐 아니라 유대교 신비주의에 깊이 빠진 신비주의자였다. 세 번째 인물은 살만 B. 라빈코프Salman B. Rabinkow인데, 그는 하시디즘 전승에 깊이 빠진 사회주의자이자 현대적 사상을 지닌 학자였다. 그는 아무런 저작물도 남기지 않았지만,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이전에 독일에서 아주 저명한 탈무드 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물론 나는 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거나 믿는 유대인은 아니므로 그들과 아주 다른 처지에 있으며, 이 책에서 밝힌 견해의 책임 소재를 그들에게 돌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내 견해는 그들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들의 가르침과 내 견해 사이에 어떤 단절도 없다고 확신한다. 또 위대한 칸트학파의 헤르만 코엔을 본보기 삼아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그는 《유대교에 바탕을 둔 이성적 종교Die Religion der Vernunft aus den Quellen des Judentums》에서 구약뿐 아니라 후기 유대교 전승을 전반적으로 고찰하는 방식을 활용했다. 물론 졸저는 그의 위대한 저작과 비교될 수도 없으며 결론 또한 때때로 그의 결론과 다르지만, 저술 방식은 성서를 보는 그의 관점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책에서는 구약을 근본적 휴머니즘Radical Humanism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근본적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인류의 조화oneness, 즉 인간이 자기 능력을 개발하고, 조화로운 정신세계에 도달하여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하는 구약의 포괄적 사상을 언급한다. 근본적 휴머니즘에서는 인간이 완전한 자주성을 가진 존재를 지향한다고 보는데, 이는 허구와 환상을 꿰뚫어보고 실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근본적 휴머니즘은 폭력에 회의적 태도를 취한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 허구를 실재로, 환상을 진리로 잘못 인식한 것은 바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폭력 때문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기 때문이다. 폭력이야말로 인간이 자주성을 지킬 수 없게 만들며, 그로써 인간의 이성과 감성은 왜곡된다.
우리가 오래된 성서 구절에서 근본적 휴머니즘의 씨앗들을 찾을 수 있는 이유는 아모스*와 소크라테스, 문예부흥 시대의 인문주의자들, 계몽운동, 칸트, 헤르더Herder, 레싱Lessing, 괴테, 마르크스, 슈바이처 등이 주장한 근본적 휴머니즘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꽃을 알기만 하면 씨앗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다. 발생학적으로 더 이른 단계는 흔히 더 늦은 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 Amos: 기원전 750년경 이스라엘의 예언자이자 구약성서 《아모스》의 저자 - 옮긴이
여기서 또 한 가지 근본적 휴머니즘에 대한 해석 방식을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한 개인의 사상일지라도 그것이 이미 역사 발전 과정에 통합된 경우에는 실제 사회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생명력을 얻는다. 따라서 근본적 휴머니즘이 구약과 후기 성서적 전통에서 주요 흐름을 보이는 사상이라고 가정한다면, 휴머니즘적 경향의 존립과 성장을 보장하는 기본 조건이 유대인의 역사 전반에 걸쳐 존재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 기본 조건은 존재하는가?
나는 그것들이 존재하며, 찾아내기도 어렵지 않다고 본다. 유대인이 사람들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남길 만큼 세속적 권력을 장악한 것은 사실상 두어 세대에 불과했다. 다윗과 솔로몬이 통치한 뒤, 유다*와 이스라엘은 북방과 남방의 강대국들로부터 점차 거센 압박을 받다 정복되었으며, 끝내 빼앗긴 영토를 되찾지 못했다. 유대인이 훗날 공식적으로 정치적 독립을 얻었을 때조차도 그들의 나라는 세력도 없이 강대국들에 종속된 작은 위성국에 불과했다.
* Judah: ‘남南왕국’이라고도 알려진 유다 왕국은 오늘날의 이스라엘 남부에 위치한 고대국가로,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이어졌다. - 옮긴이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Yohanan ben Zakkai가 미래 세대의 유대교 율법학자들을 양성할 학교 한 곳을 야브네Jabne에 개설해달라고 요청하며 로마 진영으로 전향한 뒤, 로마인이 마침내 그 나라를 멸망시키자, 겉으로는 로마인에게 최후의 일격을 당하면서도 그 이면에서 수세기 동안 이어져온 유대교는 국왕과 성직자가 없는 상태로 제 모습을 드러냈다. 예언자들은 세속 권력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며 찬사를 보내는 행위를 비난했는데, 그들의 정당성은 역사의 흐름에서 입증되었다. 따라서 솔로몬의 위업이 아니라 예언자의 가르침이 유대인의 사상에 끊임없이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후 유대인은 한 민족으로서 다시 세력을 되찾지 못했다. 도리어 그들은 역사상 대부분의 시기에 걸쳐 무력을 쓸 수 있는 세력으로부터 수난을 당했다. 분명히 그들의 처지 역시 민족주의적 원한을 품고 배타성과 오만의 근원이 될 수 있었고, 그렇게 되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이것은 또한 앞서 언급한 유대인의 역사에 내재된 또 다른 경향의 토대다.
그러나 노예 상태였던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야기나 위대한 휴머니스트 예언자들의 가르침이 권력의 집행자가 아니라 피지배자 노릇만 해온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음이 틀림없다. 평화를 애호하며 하나가 된 인류,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 등에 관한 예언자의 비전이 자랄 수 있는 기름진 토양을 유대인이 제공했으며, 그 비전이 결코 망각되지 않았다는 점은 놀라운 일인가? 유대인 강제 거주 구역의 벽이 무너지자 국제주의, 평화, 정의에 관한 이상을 부르짖는 이들 가운데 유대인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점은 놀라운 일인가? 유대인은 현실적으로 영토와 나라를 잃는 비극을 겪었지만, 휴머니즘 측면에서는 가장 큰 축복을 누렸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수난과 멸시를 받으면서 그 속에서 휴머니즘이라는 전통을 발전시키고 옹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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