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공장- 지식을 생각한다
1. 공장은 말이 없다
공장은 거대하지만 기계음이 들리지 않는다. 조용하다. 먼지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공기는 청정하게 관리되고, 노동자들은 제복, 혹은 방진복을 입고 일한다. 말도 필요 없다. 모든 것은 자동화되어 있다. ‘노동쟁의’는 고어사전에서 찾아볼 단어가 되었다. 청정하고 쾌적한 공장은 한때 우리의 이상이었던 바, 이제 그것이 실현된 것이다.
공장을 지배하는 것은, 완벽한 침묵이다. 사내들의 노동의 노래에 섞여 있던 땀 냄새와 손끝을 놀리던 아낙들의 자지러드는 웃음소리 또한 사라졌다. 나는 내가 만드는 물건의 용도를 모른다. 나는 다만 급여를 받기 위해 일할 뿐이다. 이 완벽한 노동공간은 컴퓨터에 의해 통제된다. 나는 이제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일과를 마치면 값싼 말초적 쾌락이 기다리고 있다. 나의 생은 즐겁다.
인문학담론모임이 1백 회를 맞았다. 구성원의 범위도 정확하지 않고, 조직도 없는, 오직 담론의 자유를 위해 탄생한 모임이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12년 6개월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1백 회를 마지막으로 담론모임은 스스로 숨을 거둘 예정이다. 어쩐 일인가. 나는 생뚱맞게 침묵이 지배하는 공장의 광경을 상상한다. 상상은 상상을 낳는다. 양계장과 총장 선거! 이 해괴한 이미지의 결합도 눈에 떠오른다. 왜인가. 그 이유는 이제부터 말할 터이다. 말이 조금 거칠더라도 양해를 바란다. 이건 무슨 거룩한 논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2. 국가-자본-테크놀로지, 지배의 트라이앵글
지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국가, 자본, 테크놀로지가 이루는 트라이앵글이다. 우리의 삶은 이 삼각형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인문학 역시 이 트라이앵글 속에 갇혀 있다. 이 삼각형을 제외하고 인문학의 위기를 논하는 것은 우스꽝스런 일이다. 황우석 사건을 보라. ‘환자맞춤형 배아줄기세포는 우리 대한민국의 기술’(황우석의 말)이며, 수십 수백 조의 이윤을 획득할 것이라고 선전되었다. 생명과 윤리는 잊혀졌다. 황 교수의 연구는 과학이 내셔널리즘과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백일하에 드러냈던 것이다.
인문학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어떤 순진한 사람은, 학문의 순수성, 중립성을 말하지만(유사 이래 그런 것은 없었다), 국가, 자본, 테크놀로지의 권력은 이미 인간의 삶을 완벽하게 관리, 지배하고 있기에 거기에는 어떤 중립적 영역도 남아 있지 않다. 예컨대 이윤과 결합하지 않는 순수한 테크놀로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테크놀로지의 근거인 자연과학과 공학에도 순수성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이 트라이앵글은 자본-국가, 자본-테크놀로지, 국가-테크놀로지, 자본-국가-테크놀로지의 관계로 현현한다. 이 결합 쌍들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음을 이미 황 교수 사건이 확인해 주었다. 그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공격하면, 배후의 둘은 메두사의 머리가 되어 격렬히 반발한다. 자본을 비판하면, 곧 내셔널리즘과 테크놀로지가 반격에 나서는 것이다. 아무도 메두사의 목을 베는 페르세우스가 될 수 없다.
한국의 대학은 이 트라이앵글을 재생산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국가, 자본, 테크놀로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 그것들이 곧 대학을 존재하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국립이든, 사립이든, 서울이든 아니면 ‘지방’이든, 총장이 누가 되든, 대학은 국가와 자본과 테크놀로지의 무례한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 아니 스스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수평으로 눕힌 칼로 자신의 어깨를 눌러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
국가가 교육을 수단으로 일방적으로 국민을 제작해내고, 국민 제작을 통해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재생산하고 있는 이상, 국가는 교육과 대학의 지배를 포기하지 않는다. 대학의 자율성이란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자본은 어떤가. 한국의 대학은 자본의 밀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또 자본의 영원한 존속을 위해 차별화된 인간 개체의 생산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위계화된 대학의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본의 논리는 대학을 떠날 수가 없다. 테크놀로지 역시 대학을 지배하는 방법이다. 대학의 연구, 운영에서 디지털화하지 않는 영역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21세기 자본은 오로지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통해 자신을 증식한다. 때문에 테크놀로지가 마치 인간을 해방시킬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오인誤認되고, 자본은 대학에 테크놀로지를 개발할 방법과 인간-도구를 요구한다.
이 트라이앵글에 갇힌 대학은 자율성을 상실한 지 오래다. 대학은 오직 ‘외부’에 의해서 작동하는 수동적 기계일 뿐이다. 예컨대 최근 수삼 년 동안 진행된 부산대학교의 ‘발전’이라는 것을 보자. 부산대학의 발전 계획은 오로지 어떤 신문사의 대학 평가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구성된다. 신문사의 대학 평가는 한국 대학의 위계를 결정짓는 권력의 작동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대학은 이미 ‘외부’의 명령에 의해 작동하는 기계가 된 지 오래인 것이다. 신문사가 대학 평가에서 사용하는 측정 단위들, 예컨대 논문 생산율과 SCIScience Citation Index 논문 등재율, 그리고 시설의 구비 비율 등을 향상시키는 수단은 단 두 가지다. 하나는 돈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지원이다. 즉 자본이 투자된 만큼 그 %가 높아지며, 동시에 국가권력의 보호 정도가 높을수록 %가 더욱 올라간다. 대학 구성원의 자발적 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발성을 이끌어내는 것이, 돈이거나 처벌이기 때문이다. 대학 간의 자발적 경쟁이 발전을 불러오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결국 자본의 밀도와 국가의 보호가 등위를 결정하는 것이고, 그 결정권은 이미 자본과 국가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학은 자율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외부’에 의해 작동하는 장치가 되었다.
대학은, ‘사회’가 아닌 ‘기업’에 인력, 곧 위계화 된 노동자를 공급하는 취업 준비기관일 뿐이며, 동시에 한국 사회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결정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그것은 자본과 국가를 영원히 재생산하는 장치인 것이다. 좀 더 야박하게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모 기업의 하청업체이거나 기업에 ‘인적 자원’을 공급하면서,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기지로 전락한 지 오래다.
3. 자본과 인문학 사이의 거리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인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의 학문은 자본의 지배하에 있는 학문일 뿐이다. 특정 학문의 중요성은, 자본과의 거리, 곧 자본을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과의 거리에 따라 결정된다. 동일하게 말해서 학문의 위계는, 테크놀로지를 첨단적으로 생산하여 자본의 이윤 증식에 기여하거나, 아니면 자본의 영속적인 사회 지배, 곧 불평등한 사회의 영속화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권력과의 거리에서 결정된다. 상경대, 의대, 약대, 법대, 공대 등의 단과대학의 학문이 선호되는 것은 곧 자본-국가권력-테크놀로지와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문학은 어떠한가. 인문학은 자본과의 거리가 가장 멀고, 또한 태생적으로 자본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한)다. 근자 다수의 대학에서 철학과가 폐과의 대상이 된 것은, 철학이 자본과의 거리가 가장 멀고, 또 자본을 근저에서부터 비판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문학 중에서도 선호되는 학문은 있다. 영어영문학과와 중어중문학과, 일어일문학과는 비교적 선호의 대상이 된다. 미국과 일본은 자본주의의 센터이고, 중국은 지리적·역사적으로 인접해 있으면서 급속도로 자본주의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 축출의 가능성이 적거나 축출에 대해 항변하여 살아남을 수 있는 분야도 있다. 사학과의 ‘국사학’이나 국어학, 국문학이 그것이다. 국사학은 집단의 과거를 독점적으로 소유함으로써 내셔널리즘을 재생산하여 국가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국어학과 국문학 역시 국민을 강제적으로 구성하는 도구인 ‘국어’를 수호하기 때문이다. 그 외의 인문학은 자본과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선호되지 않는다. 물론 영어영문학, 일어일문학, 중어중문학의 선호도 허위의식일 뿐이다. 그것은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기르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이유에서 선호될 뿐이지, 결코 촘스키Noam Chomsky, 1928~나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이나, 루쉰魯迅, 1881~1936이 견인장치인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인문학은 자본의 이익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의 권력으로 인해 소외되고 주변화된다.
4. 국가 기구―학진, 연구를 중독시키다
한국에서 자본의 규모가 커질수록, 자본의 국가권력의 포지도抱持度가 높아질수록, 학문의 위계화는 급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따라서 이미 식상한 어휘가 된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만의 위기는 아니다. 자본이 학문의 위상을 다시 배치하고 있는 이상, 정도의 차이일 뿐 자본과의 거리가 먼 학문들은 동일하게 치유할 방법이 없는 루게릭병Lou Gehrig's disease을 앓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을 현실적으로 완전히 말살할 수는 없다. 자본이 야수성을 완전히 드러낼 경우, 오히려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 자본의 이미지를 해치기 때문이다(광고는 언제나 미소 짓는 자본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상상해보라). 자본-국가는 대학에서 인문학을 축출하면서 한편으로는 인문학을 관리한다. 그 관리는 흔히 ‘지원’이라고 말로 통용된다. 인문학은 이제 국가의 ‘관리’하에서만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의 부탁을 받은 국가는 관리 기구를 작동시킨다. 교육부는 국가권력을 수단으로 교육과 대학에 강제하는 기관이고, 학진(한국학술진흥재단, 요즘의 한국연구재단)은 ‘지원’을 통해 학문을 관리, 통제하는 기관이다. 실로 부끄러울 정도의 적은 예산으로 인문학은 훌륭히 관리, 통제될 수 있다. 학진의 연구비 규모가 팽창하면서부터, 대한민국 대학의 인문학은 ‘위기’를 맞았으니, 이후 인문학은 학진의 사업에 목을 매기 시작했다(추측이지만, ‘인문학의 위기’론이 발생한 시점과 학진의 ‘돈’이 지원되기 시작한 시점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을 터이다). 학진은 궁극적으로 자본에서 나온 돈을 미끼로 인문학을 지원하는 동시에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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