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경험 나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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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경포고등학교에서 온 학생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이 쓴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시는 작품이 있다면 어떤 작품인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나는 내가 마음에 드는데,(웃음) 나는 사실 내 작품 속에 가장 오래 스토리가 기억이 나고 애착이 가는 것은 잘 썼다는 것과는 다른데, 『나목』에 애착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세상 엄마들이 첫아이에게 가지는 그런 애착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각하면 나는 그것을 쓸 때, 유명한 작가가 되리라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별안간 쓰게 되었는데, 그 자세한 사연은 질문의 취지와 어긋나 생략하고……. 그 작품에 대해서 애착이 가는 까닭 중에는 마흔 살에 변신에 성공했기 때문도 있을 겁니다. 마흔이 될 때까지 내가 불만이 많은 주부였던 것도 아니고, 그냥 주부 생활에 만족하면서 아이를 다섯이나 낳아 키웠습니다. 지금 같으면 생각할 수도 없지만요. 그렇게 재미나게 살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시집 장가를 보내는 것으로 끝낼 줄 알았는데, 주부로서, 엄마로서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의 문을 그 첫 작품이 열어주었으니까요. 첫아이가 여자의 삶에서 엄마의 삶으로 변화하는 경이로움 같은 것 때문에 더 소중한 것처럼 『나목』이 저에게는 애착이 많이 갑니다.
제가 <여성동아>로 데뷔했는데, 지금처럼 등용문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심코 거기다 투고했어요. 지금은 여성지가 패션잡지처럼 되었지만 예전에는 읽을거리가 많은 건실한 잡지였고, 그냥 그때 내 경험을 얘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을 했는데 그것이 많은 반향을 일으키면서 인기 작가가 되었을 뿐 아니라 『나목』의 모델이 되었던 박수근 화백도 그때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지만 재평가가 활발해져서 문학의 힘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소설에서처럼 은유를 통해서 표현한 것이 아닌, 바람직한 인간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아직까지 변화의 여지가 있는 젊은세대에게 주실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박경리 선생님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리라고 마음먹었던 것 중에 하나가 육체노동입니다. 육체노동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정신노동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 풍토에서 균형 잡힌 인간상은 실생활 속에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조화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경리 선생님은 밖에서 육체노동을 많이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 나는 이것을 글을 쓰는 정신노동의 휴식으로 삼는다, 또 육체노동의 고됨을 달래주는 것이 정신노동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뜻의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진짜 건강한 인간은 몸을 움직여 결과를 보는 일을 천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신노동하는 사람에게 육체노동이 중요하듯이 공장에서 일하거나 농사 등, 육체노동을 주로 하는 사람도 틈틈이 책을 읽거나 음악, 미술 등을 감상함으로써 정신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이상적인 인간상이 될 겁니다.
앞서 강연에서 술을 즐겨 드신다고 했는데 작품을 쓰시면서 술을 제일 많이 드신 작품이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또 선생님께서는 시집을 많이 읽으신다고 했는데 본인의 시집을 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작품을 쓰면서 술을 마시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일을 끝내고 나서 마시는 것처럼 저도 스트레스 받는 일을 끝냈을 때 술 생각이 납니다. 친구들과 같이 마실 때는 소주를 많이 마십니다. 혼자 마시는 경우도 있는데 잠이 안 오거나 근심이 있을 때입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잠이 저의 건강의 척도입니다. 잠이 안 오면 내일은 어떻게 지내나 근심되는데, 자정이 넘도록 잠이 안 오면 와인을 한 잔 마십니다. 와인을 좋아한다기보다는, 혼자 마실 때 특히 레드와인을 선호하는 것은 그 빛깔의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혼자 마시는데도 타인을 의식한다 할까, 내가 혼자 소주를 마시는 것을 누가 보면 얼마나 궁상맞아 보일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대로 된 잔을 꺼내어 마십니다. 레드와인은 조금 사치스러운 느낌이 나잖아요. 초라하고 청승맞기보다는 혼자 마시더라도 약간의 사치를 하고 싶은, 그런 거 있잖아요? 일종의 허영이지요. 저도 허영이 많습니다. 보는 사람도 없어서 아무렇게나 마셔도 되는데, 오히려 보는 사람이 있을 때는 소주나 양주도 마실 수 있는데, 혼자 마실 때에는 이상하게 멋을 부립니다. 치즈 같은 것도 예쁘게 썰어놓고 마십니다. 그럼 밤에 혼자 술을 마신다는 청승스러움이 다소 완화가 됩니다. 혼자 있을 때도 화장을 하거나 예쁜 옷을 입기도 합니다. 저는 화장을 잘 할 줄 모르는데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화장을 하고 머리도 드라이를 하고 옷을 갖추어 입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내가 왜 이러지? 지금 나가지 않는데, 이런 생각이 들면, 우리 집이 작업실이고, 내가 서재로 가는 것은 출근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된다고 나에게 들려줍니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에겐 출근하는 기분은 신선감을 줍니다.
저는 좋은 시집을 가까이 두면서 읽는 것을 즐기는데, 박경리 선생님이 남긴 시집을 보면서도 대하소설을 쓴 분답게 얇은 시집 안에 당신의 일생뿐 아니라 여성 삼대를 압축해놓은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이런 가정에서 이렇게 크셨구나, 우리가 보기에 지나친 도도한 자존심, 오만, 그런 것들이 잘 나타나 있고, 전혀 말씀 안 하셨던 것들, 우리가 가장 가까운 엄마에 대해서는 애증이 많잖아요. 애증이 많았기 때문에 회한도 많았을 곡절들을 시라는 형식이 아니었으면 풀어놓기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그 시집을 보면서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하신 꿈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 따라가다 보면 안 계시더라고 말씀하실 때 조금은 섬찟했었습니다. 예언적 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자신이 너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을 겁내는 마음도 있는 것 같아요. 소설은 웬만큼 써도 봐주는데, 시에 대한 생각은 굉장히 엄격합니다. 그래서 저는 남의 소설을 보면서는 안 그러는데, 시를 보면서 이것도 시라고 썼나? 말만 짧게 썼다고 시가 아닌데, 그런 혹평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런 욕을 먹기 싫어서라도 안 할 겁니다. 안 한다고 단언합니다.
문학을 꿈꾸는 소녀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한마디 해주십시오.
저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6·25가 나고 휴전이 되기 전에 결혼해버려서, 국문과에 가긴 했지만 정식 문학 교육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 대신 고등학교는 지금처럼 입시 위주의 교육이 아니어서 선생님 재량껏 다양한 독서 지도와 토론으로 문학에 대한 안목을 키워주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창작 시간도 따로 있었으니까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학교(숙명여고)에 박노갑 선생님이란 중견 작가분이 국어 선생님으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좌익 단체인 문학가 동맹에 들고 그러셨는데, 6·25때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근래까지 문학사를 다룰 때 복자伏字라고, 가운데 이름을 지워서 ‘박○갑’으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우리 담임이셨고, 국어, 창작, 문학개론 같은 것을 마음대로 가르치셨는데, 해방 후에 우리 글, 문학에 대한 정열이 많아서 고전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때까지도 일본말로 된 얄팍한 연애소설들을 많이 읽었는데, 그런 책을 빼앗기도 하면서 혼을 많이 내셨습니다. 창작 시간에 선생님이 진저리치며 싫어하시는 것이, 우리 또래들이 경험의 무게가 실리지 않은 허황하고 감상적인 미사여구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경험에서 나온 것을 써라, 그리고 쓸 게 생겼다고 금세 쓰지 말고 속에서 삭혀라. 그게 제일 인상적이어서 저는 친구들과 여고 시절 이야기를 할 때면 박노갑 선생님의 그 말씀 생각나니 하고 물어보면 기억하는 친구가 거의 없는데 저는 이상하게 그 말씀을 못 잊습니다. 또 하나, 선생님이 포도주를 만들 때 너희들 뭐가 필요한지 아니? 물으셔서 포도, 설탕, 소주, 이렇게 대답을 하면 또? 그러셔서 항아리 등, 별의별 대답이 다 나오면 선생님은 포도주는 포도를 버린 것이 땅에 고여 시간이 지나 발효하여 술이 된 것을 발견한 것이라고 하면서, 포도주가 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아! 오오! 따위 감탄사를 함부로 쓰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에 감동을 해서 쓰고 싶은 것이 생기면 속에서 삭혀서 그것이 발효가 되면 쓰지 않을 수 없는 시기가 온다, 폭발이 일어난다, 그것이 안 되고 잊혔다면 그 소재는 포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뭐가 될 것은 반드시 속에서 폭발이 일어난다고 하셨는데 철없는 우리보다는 당신 스스로에게 하신 말씀이 아닌가 싶어 아직도 기억하고 있고 여러분에게도 혹시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전해드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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