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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14분.
밤의 시간은 1초씩, 1분씩 흐르지 않는다. 아니, 밤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는 것은 낮의 시간이다. 밤의 시간은 웅덩이처럼 고인다, 이슬처럼 맺힌다, 안개처럼 퍼진다. 중요한 물건을 잊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서둘러 되돌아가기도 하고, 해안가 파도타기를 하는 서퍼를 노리듯 불쑥 솟아오르기도 한다.
나는 밤의 시간 안에 있다. 이삿짐 박스처럼 가득 채우는 시간, 영수증처럼 무심히 구겨지는 시간, 빈 시소처럼 갑자기 기울어지는 시간, 낮 동안 흐른 시간을 잼처럼 저어 묵처럼 굳히는 시간, 밤의 시간.
새벽의 편의점은 환하게 빛나는 밤의 항구다. 나는 그곳에서 초콜릿바와 캔커피와 견과류 믹스를 산다. 피스타치오와 아몬드와 해바라기씨를 우물거리며 나는 2월의 새벽 거리를 걷는다. 도로의 빈 택시들이 속도를 낸다. 꺼진 가로등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새삼 놀라운 일이다.
나는 신입생이 걸어간 방향으로 얼마간 걸어가 본다. 버스정류장에서 그가 탔을지 모르는 다섯 개의 버스 노선표를 살펴본다. 그는 버스를 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도착하는 버스가 없으므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므로 도착하는 버스가 없는 것일 수도. 나는 초콜릿바의 포장지를 벗기고 발걸음을 돌린다. 고무밑창을 덧댄 투박한 디자인의 방한부츠, 나는 겨우내 이 부츠를 신고 용케 미끄러지지 않고 이 일대를 걸어다녔다. 많은 낮과 많은 밤이 그렇게 흘렀다. 아니, 흐르지 않았다. 밤은 고이고 맺히고 퍼지고 되돌아가고 솟아올랐다.
누군가 나를 본다면, 나는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일 것이다. 나는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 커다란 검은 외투를 입고, 그 외투에 달린 커다란 검은 모자를 덮어 쓰고 밤의 거리를 걷는다. 커다란 주머니에는 언제나 편의점의 음식들. 그것들을 만지작거려 차갑거나 따뜻하거나 끈적이거나 가슬가슬한 손가락.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 까닭인지, 밤의 거대한 반죽에서 떨어져 나온 한 점 부스러기로 보이는 때문인지, 반년쯤 이어진 밤의 산책길에서 내게 위협을 가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02호에는 불이 켜져 있다. 저녁 6시에 출근했던 여자가 조금 전 퇴근했기 때문이다. 여자의 모습을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여자가 귀가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음은 알 수 있다.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가늘고 긴 팔을 흔들며, 새 담뱃갑의 포장을 뜯으며, 여자가 골목길에 흘리고 간 것들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빠르게 텔레비전 리모컨을 눌러대는 모양인지 방 안의 불빛이 어지럽게 일렁인다. 보름 전 새벽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불쑥 202호의 창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상체를 내밀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남자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고, 불이 붙은 꽁초를 공중으로 던진 후 창문을 닫았다.
원룸 건물의 출입구 유리문에는 ‘CCTV 촬영중’이란 아크릴 팻말이 붙어 있다. 거짓말이다. CCTV는 없다. 작년 봄 바로 옆 빌라에 도둑이 든 후 101호와 201호와 301호의 월세를 받는 집주인이 직접 구입해 붙였다고. 근처 원룸과 빌라 여러 곳에 같은 문구가 적힌 팻말이 붙어 있다. 전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꽤나 많은 곳이 CCTV 없이 팻말만을 붙여 놓았을 것이다. 팻말을 보며 도둑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지금 전화를 걸어 방을 보러 왔다 해도 202호 여자는 순순히 문을 열어줄 것만 같다. 조금도 당황해하지 않으며 집을 보러 온 사람을 빤히 쳐다볼 것만 같다. 여자의 앉은뱅이 탁자에는 젖은 수건과 헤드셋이 꽂힌 전화기와 위장약 파우치와 빈 맥주캔과 카드 지갑과 복권 몇 장, 그리고 담뱃재와 감자칩 부스러기. 냉장고 속에는 유통기한을 넘긴 우유, 화장실 안에는 물때가 낀 세면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화장실을 열어보는 것은 곤란하다 말할 것 같은 여자는 자신이 밤의 인간임을 잘 알고 있다. 매일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여자에게는 밤이 되어야만 용납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보름 전 밤 이 건물에 불이 켜진 방은 세 곳이었지만, 오늘은 202호뿐이다. 잠수함처럼 무겁게 가라앉는 침대, 여자는 몹시 지쳐 있다. 문득 모든 것에 신물이 나고 몸을 가눌 수 없이 무력해진다. 답하지 않은 문자메시지를 되뇌어 본다. 202호에 불이 꺼지기 직전의 시간.
새벽 3시가 가까운 시간임에도, 스타빌에는 여섯 집이나 불이 켜져 있다. 빛의 밝기와 색감이 조금씩 모두 다르다. 나흘 전 밤 이곳에 왔을 때, 턱 끈이 달린 헬멧을 쓰고 등판에 ‘24시 야식배달’이란 글자가 찍힌 조끼를 입은 남자를 보았다. 스타빌의 입구를 나선 남자는 낡은 스쿠터에 오른 뒤 탁한 엔진소리를 울리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도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일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한밤중 스타빌 505호에 불이 켜져 있던 적은 없다. 신입생과 함께 지금 505호를 방문한다면, 그는 여전히 505호를 마음에 들어 할까. 2,000만 원의 보증금과 50만 원의 월세가 있다 해도 그는 여전히 505호를 마음에 들어 할까. 밤의 집은 낮의 집과 다르다. 빌트인 풀 옵션의 편리함은 밤에도 유효하다. 505호의 실내는 여전히 산뜻하고 쾌적할 것이다. 그러나 한밤중 드럼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는, 자동센서로 불이 켜지는 현관은, 복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모두 낮의 그것과는 다른 그것이다.
나는 편리하고 쾌적한 스타빌을 뒤로 하고, 불 꺼진 505호를 뒤로 하고, 다시 밤의 어두운 골목길을 걷는다. 거주자 우선 주차구역, 재활용품 배출 요일 안내, 잃어버린 개를 찾습니다. 명품 아웃도어 눈물의 고별전 90퍼센트 초특가 세일, 주민센터 문화교실 회원모집, 대문 손잡이에 매달린 녹즙 배달주머니, 수많은 잔가지를 뻗고 얼어 죽은 것처럼 서 있는 담장 안의 나무, 대형폐기물 수거 스티커를 붙이고 전봇대에 비스듬히 세워진 침대 매트리스, 비행접시처럼 떠 있는 옥상 위 위성방송 안테나. 그 모두가 낮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그것이 되어 있는 밤의 어두운 골목길.
그리고 주차된 자동차 밑으로 빨려 들어가듯 몸을 숨기는 고양이, 고양이의 그림자, 그림자의 고양이, 섬뜩하게 반짝이는 작고 둥근 밤의 눈동자.
낮은 비둘기의 시간이고, 밤은 고양이의 시간이다. 그토록 수선스럽고 부주의하고 게걸스러운 낮의 비둘기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을까. 둥지도 없이 모두 어디에서 잠들어 있을까. 고양이의 시간, 지난 가을의 어느 밤, 나는 발정 난 암고양이 한 마리를 차지하기 위해 두 마리의 수고양이가 벌이는 기나긴 쟁탈전을 지켜본 일이 있다. 그것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처절한 싸움이었다. 거침없이 이빨을 드러내고 한껏 털을 곤두세우고 미친 듯이 쫓고 쫓기며 진저리 쳐지도록 집요하게 울어대는 고양이의 시간. 왜 낮이 아닌.
나는 B101호가 있는 다가구주택 앞에 도착한다. 불이 켜진 창은 한 곳도 없다. B101, 101, 102, 201, 우편함은 네 곳, 전기요금 고지서가 꽂혀 있는 곳은 102호, 우편함 옆 벽면에는 중국집과 치킨집 전단지. 주인집인 201호의 출입구는 따로 있다. 건물의 측면 B101호와 101, 102호가 사용하는 출입구에는 유리문이 따로 없다. 나는 신입생과 함께였을 때처럼 그곳을 통과한다. 그리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는다. 나는 도둑처럼 움직인다.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조용한 어둠 속에서 유난히 크게 들리지만, 나는 이미 이런 것에 대담해져 있다.
B101호의 현관문을 닫고 커다란 외투의 커다란 주머니 안에서 손전등을 꺼낸다. 캄캄한 어둠이 다소 물러나지만, 밝은 안도감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불길하고 꺼림칙한 느낌은 여전하다. 나는 이번에도 신발을 신은 채 B101호 안으로 들어선다. 손전등 불빛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은 방문에 붙어 있는 유아용 글자판. ㅅ은 사과, ㅇ은 아기, ㅈ은 자동차. 나는 부엌 싱크대 앞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커다란 외투의 커다란 안주머니에서 종이타올과 물티슈와 아세톤을 꺼낸다. 쓰레기를 담을 검정 비닐봉투도 꺼낸다. 찌든 기름때를 닦아내는 데는 손톱의 매니큐어를 지우는 아세톤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뒤처리가 가장 빠르고 간편한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종이타올에 아세톤을 흠뻑 묻힌다. 톡 쏘듯 차가운 향이 코를 찌른다. 더럽고 끈끈한 막에 겹겹 코팅이 되다시피 한 싱크대와 선반을 닦기 시작한다. 종이타올 가득 새카만 때가 묻어난다. 닦아낸 곳과 닦아내지 않은 곳의 색깔이 확연히 달라진다. 더럽게 구겨진 종이타올이 금세 수북이 쌓인다. 나는 그것들을 비닐봉투에 담고 다시 새 타올에 아세톤을 듬뿍 적신다.
불길하고 꺼림칙한 느낌. 끔찍한 범죄나 불운한 비극. 밤의 시간, B101호는 낮과는 다른 얘기를 중얼거리고 있다. 나는 잠시 손전등을 등 뒤로 비춰본다. ㅓ는 거울, ㅕ는 여름, ㅜ는 구름, ㅠ는 유리. 말갛게 세수를 한 것처럼 깨끗해져가는 싱크대.
이 집에서, 누군가는 누군가를 향해 고함을 치고 욕설을 퍼붓고 물건을 집어던졌다. 누군가는 누군가로 인해 공포에 질리고 말문이 막히고 방문을 잠가버렸다. 누군가는 밤새 고열에 시달렸고, 누군가는 바닥을 기어가는 벌레를 향해 슬리퍼를 내리쳤고, 누군가는 빚 독촉 전화를 받지 않으려 텔레비전 볼륨을 크게 높였다. L은 love, M은 mommy, N은 night.
마지막으로 아세톤을 물티슈에 묻혀 손가락에 엉긴 검댕을 닦아낸다. 손끝이 차갑고 건조하고 아리다. 나는 더러워진 종이타올로 가득 찬 비닐봉투를 꾹꾹 눌러 작게 뭉친다. 가져온 것들을 모두 커다란 외투의 커다란 주머니에 쑤셔넣는다.
다시 화장실 앞, 문을 열지는 않는다. 밤의 나는 낮의 내가 아니므로 비명을 지르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화장실문을 열지는 않는다. B101호, 오늘밤 이 집이 내게 허락해주는 것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안다.
새벽 3시 27분. 이제 조금 졸린 듯도 싶다.
(본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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