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제욱시스의 포도
전설 속의 그림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소년 시절, 그의 아버지인 공증인 세르 피에로에게 어떤 농부가 나무로 만든 방패를 맡기며 여기에 적당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세르 피에로는 레오나르도에게 네가 한번 그려 보렴, 하고 권했다. 레오나르도는 방패에 뭘 그릴까 궁리하다가 ‘메두사’를 그리기로 했다.
메두사는 그 얼굴을 보는 이는 그 자리에서 돌이 되어버린다는 신화 속의 괴물이다. 영웅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목을 잘라 여신 아테나에게 바쳤고, 아테나는 이 목을 자신의 방패 앞에 달았다고 한다. 다들 아시는 대로 메두사의 머리칼은 한 가닥 한 가닥이 뱀으로 되어 있었는데, 레오나르도는 뱀을 실감나게 그리기 위해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뱀과 개구리 따위를 잡아다가 방구석에 모아두고는 그것들이 썩어가는 악취를 견디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방패를 만드는 데 골몰했다.
마침내 그림을 완성한 레오나르도는 아버지를 불렀다. 세르 피에로는 무심코 아들의 방에 들어섰다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수많은 뱀이 똬리를 틀며 몸부림을 치는 가운데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여인의 얼굴이 들어앉아 있었다. 입은 흉측하게 찢어지며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고 뒤룩거리는 눈동자는 분노와 절망을 내뿜었다.
세르 피에로는 조금 뒤에야 이 여인이 방패에 그려진 그림임을 깨닫고 정신을 수습했다. 아들의 솜씨에 탄복한 세르 피에로는 당시 피렌체를 주름잡던 화가이자 조각가 베로키오의 공방工房에 아들을 데려갔다.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이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렸을 때 위인전에서 이 대목을 읽은 나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메두사 방패를 실제로 볼 수만 있다면 원이 없겠다 싶었다. 실물과 그림의 경계를 넘어서는 그림이라면 물리적인 제약을 뛰어넘어 뭔가 다른 세상을 열어줄 것만 같았다.
유감스럽게도 레오나르도의 ‘메두사 방패’는 전설 속으로 사라져버렸으니 그 방패가 사람들에게 안겨주었을 두려움과 놀라움에 대해서는 그저 상상만 할 뿐이고, 상상 속에서 그 그림은 점점 더 신묘한 것이 되어간다. 레오나르도의 그림 대신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메두사 방패’는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가 그린 것이다.도0-1
실물과 꼭 닮은 그림
실물처럼 그린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없이 전해온다. 그중에서도 고대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가 포도를 그렸더니 새들이 날아왔다는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총애를 받았던 화가 아펠레스가 암말을 그렸더니 진짜 수말이 올라타려 했고, 아펠레스의 동료 화가 프로토게네스가 그림의 배경에 메추라기를 그려 넣자 그걸 보고 진짜 메추라기가 날아왔다고 한다. 19세기 후반 도쿄에서 활동했던 우키요에 화가 고바야시 기요치카小林淸親의 목판화는 그림을 보고 실물로 착각하는 고양이를 보여준다.도0-2 서구의 미술을 연구한 기요치카 자신이 이제는 고양이가 속을 만큼 실물을 핍진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 그림이다.
사물을 꼭 닮게 묘사하는 것은 라스코 동굴 벽화 이래 그림의 존재 이유였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는 실물을 꼭 닮게 그리기 때문에 화가가 우월하다는 믿음이 만연했다. 그런데, 실물을 꼭 닮게 그려봤자 어디까지나 실물의 불완전한 모방일 뿐인데, 여기에 어떻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실물과 꼭 닮게 그리거나 만들면 그것이 실물을 대체할 수 있다는, 그것이 곧 실물이 된다는 주술적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림과 실물이 하나라는 믿음은 여전히 중요한 구실을 한다. 독재정권이 붕괴했을 때 군중은 독재자의 동상을 쓰러뜨려 끌고 다니고, 헤어진 연인들은 서로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찢거나 잘라내버린다. 거대한 청동덩어리나 인화지에 정착된 이미지는 실제 인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사람들은 외형이 닮았다는 이유로 이들을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화가가 실물을 꼭 닮게 그릴 수 있고, 그렇게 그려야 하는 존재라고 여겨왔다. 그래서 인물이나 사물을 꼭 닮게 묘사한 그림에 대한 전설이 이처럼 많은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그림들은 어느 것 하나 남아 있질 않다. 어찌 보면 당연한 노릇이다. 만약 그 그림들이 남아 있다면 전설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그림들이 그려졌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실물과 꼭 닮은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사진과 영화를 비롯한 시각매체의 포화 상태에 빠진 현대인들에게는 소박하게만 보일 테니까.
트롱프뢰유의 정의
이 책은 전설 속의 그림처럼 사람의 눈을 속여온 그림, 즉 ‘트롱프뢰유’를 다룬다. ‘트롱프뢰유’는 프랑스어로 ‘눈속임’을 의미한다. 미술사에서 트롱프뢰유는 관객이 실제와 착각하도록 그린 그림을 가리키는 말로, ‘눈을 속이는 그림’ 정도로 옮길 수 있다.
그런데 ‘눈을 속이는 그림’이라고 하면 눈을 어지럽히는 갖가지 이미지를 함께 떠올리기 쉽다. 예를 들어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의 「어긋난 원근법」 같은 그림이나 에스허르Maurits Cornelis Escher, 1898~1972의 그림 같은 것들이다. 이들 그림은 시각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는 과정을 교란하는 것들이다.도0-3, 도0-4 물론 ‘눈을 속인다’와 ‘눈을 어지럽힌다’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가 없고, 이 두 가지는 얼마든지 함께 쓰거나 바꿔 쓸 수 있다. 한데, 그렇게 되면 외연은 무한히 확장된다. ‘눈을 속이는’ 그림에 대한 정의는 ‘눈을 어지럽히는’ 그림까지 포괄하여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눈을 어지럽히는’ 이미지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는 편이, 내가 이 책에서 드러내려는 ‘눈속임’의 국면을 분명히 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본다.
의미를 좁혀보자면, 눈을 어지럽힌다는 말은 시각을 통해 구축된 상이 정립되지 못하도록, 시각의 상이 뚜렷한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교란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눈을 속이는 그림’은 보는 이가 그 이미지를 실제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착각’하게끔 해서, 인식과 판단이 엉뚱한 방향으로 쏠리게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얼른 보고는 실제 사물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실제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을 흉내 내어 만든 그림, 이것이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이다.
예컨대 문에 걸려 있는 이 바이올린을 보자.도0-5 만약 이 바이올린을 문에서 떼어 손에 들고 보려든다면, 비로소 이게 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도0-6 이는 화가가 감쪽같이 그려 넣은 것이다.
이처럼 트롱프뢰유는 관객을 ‘속인다’. 관객은 일단 속았다가 곧 가짜임을 알아차린다. 대부분의 트롱프뢰유는 몇 초 만에 그림임이 들통 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혹여 관객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도 곤란하다. 예를 들자면 한동안 유행하던 텔레비전의 몰래카메라 프로그램 같은 것이다. 만약 몰래카메라였음을 모르고 지나가면, 당사자에게는 그저 기분 나쁘거나 간 떨어질 만한 경험이 될 뿐이다. 마지막에 몰래카메라였음을 밝혀야 상황을 납득하며 파안대소할 수 있는 것이다. 트롱프뢰유도 그렇다. 혹시라도 실제인 줄 알고 지나가버리면, 교묘한 솜씨에 대한 경이로움은 아예 없게 된다. 솜씨를 과시하여 감탄을 자아내려면 어찌되었든 마지막에는 발각되어야 한다.
또, 관객이 애초부터 ‘완전히 속아 넘어가지 않는’ 트롱프뢰유도 많다. 관객의 시각적 경험이 풍부해질수록 속이는 일은 어려워진다. 유명한 트롱프뢰유라도 관객이 홀딱 넘어가는 경우는 드물고, 어떤 부분은 그림인 것이 분명하고 어떤 부분은 이상한, 어딘가 그림 같지 않은(실물 같은) 그림도 있다. 순간적으로 실제인지 그림인지 긴가민가하는 국면에 머물다가 그림임을 알아차리게 되는 작품도 많다. 사실 이 ‘긴가민가하는’ 국면도 트롱프뢰유가 선사하는 큰 즐거움이다.도0-7
트롱프뢰유의 대상
관객의 눈을 속이는 그림이 되려면, 관객이 잘 아는 것을 그려야 한다. 생각해보면 이는 당연한 말이다. 우선 ‘진짜’를 알고 있어야 ‘진짜인 듯한’ 그림에 속아 넘어가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보면 전설 속의 괴물, 즉 실재하지 않았던 괴물이 지닌 실재감이란 뭔가, 하는 기묘한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상상 속의 괴물을 그린 그림이 뿜어내는 힘은 무엇일까? 레오나르도가 그린 메두사를 본 세르 피에로를 놀라 떨게 한 건 무엇이었을까?
애초에 신화 속 괴물을 그린 그림은 트롱프뢰유가 되기 어렵다. 카라바조가 그린 메두사가 실물처럼 보이기 어려웠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앞서 괴물을 보았던 기억이 있어야 할 텐데 신화 속 괴물은 말 그대로 상상의 산물이라 실제로 본 사람이나 그걸 꼭 닮게 그린 그림 따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화 속 괴물의 모습을 설명할 때는 대개 실재하는 여러 동물을 부분부분 끌어모은다. 예컨대 기린麒麟은 뿔과 오색의 털을 갖고 있지만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 말과 같은 발굽과 갈기를 지닌 것으로 알려졌고, 용龍의 경우 뿔은 사슴과 비슷하고 눈은 토끼와 비슷하며 발톱은 매와, 비늘은 잉어와 비슷하다고 묘사되었다. 그래도 이들 동북아시아의 괴물에 비해 유럽 신화 속 괴물들은 상상하기가 쉬운 편이다. 메두사만 봐도 얼굴은 인간 여성, 머리칼은 작은 뱀, 몸통은 큰 뱀, 이런 정도로 조합이 비교적 단순하다. 레오나르도의 메두사가 불러일으켰던 공포감은 꿈틀거리는 뱀의 모습과 고통에 일그러진 여성의 모습 등 각각의 부분이 지닌 실재감과 유례없이 흉측한 모습에 기인했으리라.
트롱프뢰유의 대상은 주로 묘사하기 용이한 것, 묘사했을 때 관객의 눈에 그럴 듯하게 보일 법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트롱프뢰유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정물화이다. 어떤 연구자들은 아예 트롱프뢰유를 정물화의 한 종류로 못 박아버리곤 하는데, 이는 너무 좁은 규정이다. 트롱프뢰유의 외연은 의외로 매우 유동적이다. 트롱프뢰유는 묘사하기 쉬운 방향으로 흐르면서도 동시에 묘사하기 어려운 영역으로도 뻗어나간다.
(서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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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이연식
학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예술전문사 과정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일본 우키요에浮世繪와 양풍화洋風畵에 대한 논문을 썼다. 『미술영화 거들떠보고서』, 『위작과 도난의 미술사』, 『유혹하는 그림, 우키요에』를 썼고, 『무서운 그림』, 『맛있는 그림』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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