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지난해 봄,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정치적으로는 더더욱 어려웠던 그때, 나는 우연히 이런 문장을 떠올렸다. <우리 삶이 시작될 수 있었던 지구의 발달이 유일무이한 진화적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도롱뇽과의 전쟁』은 이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사실이다. 어떤 적합한 조건 아래서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의 삶의 형태가 문명 발달의 견인차가 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인간이 그들의 문명, 문화, 역사를 통해 포유류와 영장류 중에서 독보적인 발달을 이루었듯이, 비슷한 진화적 힘이 다른 종족의 발달을 고무시킬 수도 있었다. 특정한 생명의 조건이 갖춰졌을 경우, 꿀벌이나 개미도 인간의 문명적 기술에 못지않은 능력을 지닌 대단히 명석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다른 동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적합한 생물학적 조건이 갖춰졌다면, 깊은 물속에서도 인간 못지않은 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다. 이것이 첫 번째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들 속에서 두 번째 아이디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과 다른 종족이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발달을 이루어 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인간처럼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을까? 인간처럼 전쟁을 일으켰을까? 인간처럼 역사적 파멸의 길을 걸었을까? 인간은 파충류의 제국주의나 개미의 민족주의, 갈매기나 청어의 경제적 팽창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인간과 다른 종족이 자신들의 능력과 개체 수를 고려해 온 세상을 점령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발언을 내뱉었다면, 우리 인간은 대체 어떻게 생각했을까? 인간이 써 내려온 역사와 최근 벌어지고 있는 상황, 그 둘 간의 대립이 나로 하여금 펜을 쥐게 했고, 『도롱뇽과의 전쟁』을 쓰게 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유토피아적 소설이라고 평가했지만, 나는 이러한 분류에 반대한다. 이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재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추측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존재하는 현실의 반영이다. 이 작품의 핵심은 판타지가 아니다. 판타지는 누구라도 원한다면 대가 없이 덤으로 줄 수 있지만,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현실>이다. 현실에 무관심한 문학이나, 세계의 현 상황을 말과 생각이 가지는 힘만큼 열정적으로 반영하지 않는 문학은 나의 것이 아니다.
자, 여기까지다. 나는 인간을 생각하며 『도롱뇽과의 전쟁』을 집필했다. 내가 신의 창조물 가운데 도롱뇽을 특별히 좋아한 것은 아니다. 지질학적으로 제3기에 존재했던 왕도롱뇽이 한때 인간의 조상이라 오해를 받은 만큼,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역사적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왕도롱뇽들은 인간사를 묘사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지만, 작품을 써 내려가면서 나는 도롱뇽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것은 실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경험이었다. 동시에 인간의 입장 또한 생생하게 와 닿는 마술적이며 두려운 경험이었다.
1936년, 카렐 차페크
제1부
안드리아스 스케우크제리
1 반 토흐 선장의 기벽
당신이 타나마사라는 작은 섬을 지도에서 찾는다면 수마트라 섬에서 살짝 서쪽으로 치우친 적도 선상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칸동 반둥호(號)의 J. 반 토흐 선장에게 그가 방금 닻을 내린 이 타나마사라는 섬이 어떤 곳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한참 욕설만 퍼붓다가 결국 순다 제도에서도 가장 더러운 시궁창이라고, 심지어 타나발라보다 더 지독하고 적어도 피니나 반야크만큼이나 한심무쌍하다고 말해 줄 것이다. <미안하지만, 거기 살고 있는 인간은 ― 물론 그 한심무쌍한 바타크족은 논외로 하고 말입죠 ― 주정뱅이 중개상 밖에 없어요. 쿠바인과 포르투갈인을 섞어 놓은 위인인데 순 날강도에, 순혈 쿠바인과 순혈 백인을 섞어 놓은 것보다 더 지독한 이단에 돼지란 말요. 이 세상에 진짜 한심무쌍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이 한심무쌍한 타나마사에서 한심무쌍한 인생을 살아가는 거라, 이 말입니다. 암요!> 이런 말을 들은 당신은 조심스럽게, 그렇다면 어째서 선장님께서는 한심무쌍한 사흘을 이곳에서 보내기라도 할 태세로 한심무쌍한 닻을 이렇게 내리셨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다. 그러면 그는 그저 짜증스럽게 코웃음을 치며 뭐라고 중얼거리겠지만, 어차피 그 내용은 이런 것이리라. <칸동 반둥호가 한심무쌍한 무슨 코프라나 야자유 때문에 여기까지 항해를 해왔을 리가 있겠습니까? 말이 됩니까? 안 되죠? 또 그게 선생 볼일이랑 무슨 상관이라도 있으신지? 하지만 나는 나대로 빌어먹을 명령을 받았다, 이 말이요. 그러니 선생은 상관 마시고 빌어먹을 선생 볼일이나 보쇼!> 그러고는 과연 나이는 좀 들었어도 여전히 풍채가 좋은 뱃사람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걸쭉하고 화려한 욕설을 퍼부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오지랖 넓게 꼬치꼬치 따져 묻는 대신, 그냥 반 토흐 선장이 저 혼자 투덜거리고 욕을 퍼붓게 내버려 둔다면 당신은 훨씬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리라. 딱 보면 저 사람이 치미는 울화통을 풀 데가 없어 안달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가? 그저 내버려 두면 짜증은 절로 가라앉게 마련이다. 「그게 이런 겁니다.」 선장이 불쑥 분통을 터뜨렸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저 인간들, 저 꼭대기에 앉은 유대인들이 느닷없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진주, 바로 이거란 말이지. 자네는 가서 진주를 찾아보게. 사람들이 진주며 그딴 걸 보면 환장을 한다나 뭐라나요!」 이 대목에서 선장은 분통을 터뜨리며 가래를 칵 뱉었다. 「따놓은 당상, 돈은 진주에다 투자를 한다, 이거지요! 그게 다 선생 같은 사람들이 노상 전쟁이며 그딴 걸 하고 싶어 난리라 그래요. 자기 돈이 걱정 돼서. 그게 다 그런 거죠. 위기라나 뭐라나! 암요.」 반 토흐 선장은 잠시 망설이며 당신과 경제를 논할까 말까 고민한다. 하긴, 요즘 다른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물론 이곳, 타나마사는 예외다. 경제 얘기를 하기에는 너무 덥고 나른했던 것이다. 그래서 반 토흐 선장은 그냥 손을 흔들며 투덜거리기만 했다. 「말이야 쉽지. 진주라니! 실론에서는 말입니다, 선생, 벌써 5년 전에 씨가 말랐어요. 포르모사에서는 진주조개잡이를 금지했고요. <아니, 그렇다면 반 토흐 선장님, 어딘가 새로운 어장을 개척하는 게 좋겠군요. 방금 이 빌어먹을 작은 군도에 도착하셨으니, 아시다시피 그곳엔 새로운 조개들이 두둑하게 붙어…>」 선장은 경멸스럽다는 듯 하늘색 손수건에 코를 팽 풀었다. 「유럽에 있는 쥐새끼들은 아직도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뭔가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 말입니다! 하느님 맙소사, 그 머저리 둔탱이들! 기껏해야 핀 두 개 만들겠다고, 나한테 행여 그 바타크 놈들이 진주 냄새라도 맡을지 모르니까 콧구녕을 바짝 들여다보고 있어라, 그렇게 시킬 위인들이라니까요! 새로운 어장? 좋아하시고 있네! 파당에 새로 생긴 매음굴은 확실히 있습디다. 근데 새 진주 어장? 아니 선생, 나는 이 섬들을 손바닥처럼 꿰고 있어요. 실론에서 저 한심무쌍한 클리퍼턴 섬까지 쫘악… 누가 여기서 돈이 될 거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면야, 뭐, 행운을 빈다, 그러겠지요! 30년 동안 배를 타고 이 바다를 누비고 다닌 이 몸한테, 저 돌대가리들은 이제 와서 뭔가 새로운 걸 찾아내라니!」 반 토흐 선장은 모욕적인 명령이 서러워 목이 멜 지경이었다. 「아니, 차라리 애송이나 보낼 것이지. 그러면 눈이 팍 튀어나올 정도로 대단한 걸 잘도 찾아낼 텐데! 도대체 이 반 토흐 선장한테 뭘 기대하는 건지… 거참, 선생, 좀 물어봅시다그려. 유럽에선 아직도 이런저런 걸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요? 아니, 여기 오는 사람들은 죄다 한몫 챙겨 보겠다고, 아니 한몫 챙기지는 못하더라도 사고 팔 걸 찾겠다고 눈을 부라리고 오는 거 아니요. 그러니 나 원, 푼어치밖에 안 되는 거라도 한심무쌍한 열대에 남아 있다면야, 아마 중개상 셋쯤은 벌써 그걸 깔고 앉아서 사방팔방, 일곱 나라 배들한테 끌어올려 달라고 더러운 손수건을 흔들어 대고 있을 거란 말요. 다 그렇고 그런 거다, 이 말입니다. 미안하지만, 난 왕립 식민지 사무국보다 이 동네를 더 잘 알아요.」 반 토흐 선장은 정의의 분노를 힘겹게 억누르려 애쓰며 한참 더 씩씩거린 후에야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다. 「저기 빈둥거리고 있는 두 치들 보이쇼? 저 치들이 실론에서 온 진주조개잡이들이라오. 하느님 맙소사, 신할라족으로 태어난 인간들이죠. 하느님이 저런 치들을 왜 만드셨는지는 영문을 모르겠소만, 지금 내가 싣고 다니는 게 저 치들이라오. 무역상이나 바타 기업이나 세관에 등록되지 않은 해안이 눈에 띄면, 저 치들을 물속에 떨어뜨려서 진주조개를 찾아보게 하는 거요. 저 키 작은 놈은 45패덤까지 잠수할 수 있어요. 지난번 프린세스 제도에서는 필름 카메라 손잡이를 잡고 45패덤까지 들어갔다니까요? 암요! 근데 진주? 없어요! 코빼기도 못 봤다, 이 말입니다! 저 신할라 놈들은 죄다 쓸모없는 식충이들이죠. 내가 떠맡은 한심무쌍한 일이 바로 이런 겁니다, 선생. 야자유를 사러 온 척하면서 새 진주 어장이나 찾아다니는 거죠. 다음엔 아마 나한테 무슨 처녀 대륙을 발견하라고 하지 않겠어요? 정직한 상선 선장이 할 짓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J. 반 토흐는 당신네 빌어먹을 모험가가 아니란 말요. 암요!」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바다는 넓고, 시간의 대양은 무한하고, 침을 뱉는다고 물이 불지도 않으며, 운명을 한탄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한참 변죽을 울리고 딴소리를 늘어놓은 끝에, 우리는 마침내 네덜란드 상선 칸동 반둥호의 J. 반 토흐 선장이 깊은 한숨과 욕설을 내뱉으며 보트로 내려가 타나마사 해안의 부락에 상륙, 쿠바인과 포르투갈인을 섞어 놓은 혼혈 주정뱅이와 몇 가지 사업 얘기를 하는 대목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유감이군요, 캡틴.」 쿠바인과 포르투갈인을 섞어 놓은 위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타나마사에는 진주조개가 없어요. 그 더러운 바타크 놈들―」 그의 목소리에는 무한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놈들은 해파리라도 먹을 겁니다. 마른 땅보다 물속에서 더 제 세상 만난 것 같다니까요? 여기 계집들한테선 생선 냄새가 나요. 아마 상상도 못 하실걸요. 근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참, 여자들 얘기를 물어보셨지.」
「그러면, 그 바타크 놈들이 안 들어가는 해변은 이 근처에 하나도 없는 거요?」 선장이 물었다.
쿠바인과 포르투갈인을 섞어 놓은 위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없어요. 물론 데블베이라는 데가 있지만, 선장님한테는 아무 쓸모가 없을 테고요.」
「왜 그렇지?」
「왜냐하면… 아무도 그곳에 못 들어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선장님, 잔 채우시죠?」
「땡스. 거기 상어들이 있나?」
「상어들도 있고 다른 것들도 있지요.」 혼혈이 툭 내뱉었다. 「몹쓸 곳입죠. 바타크 놈들은 누가 거기 들어가는 걸 아주 싫어해요.」
「왜요?」
「거기 악마들이 있어요, 선장님. 바다 악마들이요.」
「바다 악마가 뭐요? 물고기?」
「물고기는 아니고요…」 혼혈은 잠시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냥 악마예요. 심해의 악마. 바타크 사람들은 <타파>라고 부릅니다. 타파. 그 악마들이 모여서 자기네 마을을 이루고 산답니다. 잔 채워드릴까요?」
「근데… 그 악마들은 어떻게 생겼답디까?」
쿠바인과 포르투갈인의 혼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악마처럼 생겼죠. 한 놈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러니까, 머리만요. 케이프하를럼에서 보트를 타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놈이 물속에서 불쑥 나오더니 내 면전에다 흉측한 머리를 들이밀지 뭡니까?」
「그래서요? 어떻게 생겼습디까?」
「대머리였어요. 바타크 비슷한데, 머리가 홀랑 벗겨졌더라고요.」
「바타크는 확실히 아니었고?」
「절대 아닙니다. 거기서 물에 들어갈 바타크 놈은 한 놈도 없으니까요. 게다가… 그게 밑에 붙은 눈꺼풀로 눈을 끔벅거렸어요.」 혼혈은 공포에 떨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밑에서 눈꺼풀이 올라오더니 눈을 다 덮었다고요. 그건 타파가 맞아요.」
J. 반 토흐 선장이 살찐 손가락으로 야자 와인이 담긴 술잔을 돌렸다. 「술에 취했던 건 아니고? 곤드레가 되었던 거 아니요?」
「당연히 취했죠. 안 그랬으면 거기까지 배를 저어 갔을 리가 없잖습니까. 바타크 놈들은 사람들이… 악마들을 건드리는 걸 싫어한단 말입니다.」
그 말에 반 토흐 선장이 고개를 저었다. 「저런! 이 사람아, 악마 같은 건 세상에 없다니까! 설령 있다 한들 유럽 사람들처럼 생겼을 거야. 무슨 물고기 같은 걸 본 거겠지.」
「물고기라…뇨.」 쿠바인과 포르투갈인의 혼혈이 말을 더듬었다. 「물고기는 손이 없잖아요. 선장님, 전 바타크 사람이 아니에요. 바둥에서 학교를 다녔단 말입니다. 아직도 십계명이며 그 밖에 과학적으로 증명된 교리를 줄줄 읊을 수 있어요. 배운 사람이니 악마와 짐승의 차이는 안다고요. 바타크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깜둥이들 미신이라니까!」 선장이 배운 사람 특유의 호탕하고 권위적인 태도로 선언했다. 「과학적으로 볼 때 말도 안 되는 헛소리요. 악마가 물속에 살 리가 없어요. 거기서 악마가 무슨 할 일이 있다고? 원주민들이 퍼뜨린 뜬소문을 믿지 말란 말이요. 누가 거길 <데블베이>라고 부르니까 바타크 놈들이 지레 겁을 먹은 것뿐이지. 그게 사건의 전말이라고.」 선장이 거대한 손바닥을 탁자에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요, 이 사람아. 과학적으로 볼 때 명백한 사실이라고. 안 그렇소?」
「그렇죠.」 바둥에서 학교를 다닌 혼혈이 동의했다. 「하지만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데블베이에 얼씬도 안 할 겁니다.」
J. 반 토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현란하게 변했다. 「뭐라고? 이 더러운 쿠바 놈아, 내가 그 따위 악마들한테 겁을 먹을 위인으로 보이냐? 어디 두고 보자고!」 반 토흐 선장은 호통을 치고 벌떡 일어서서 9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위풍당당한 거구를 과시했다. 「볼일이 바빠서 네놈과 여기서 시간 낭비 하지는 않겠다만 한 가지는 명심해라. 네덜란드 식민지에는 악마가 한 마리도 없어. 있다면 다 프랑스 식민지에 산단 말이다. 그래, 하긴, 거기에는 몇 놈 살겠다. 이제 이 한심무쌍한 부락의 시장이나 대령해!」
방금 말한 고관대작이라면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혼혈이 운영하는 가게 바로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사탕수수를 씹고 있었으니까. 그는 벌거벗은 노신사로, 보통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시장들보다 훨씬 깡마른 사람이었다. 그의 뒤에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여자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주민 전체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영화 촬영이라도 구경하려는 건지…
「자, 내 말 좀 들어 보십쇼.」 반 토흐 선장이 말레이어로 말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어나 영어로 말했어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으리라. 존경받는 바타크 노인은 말레이어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고, 선장의 말은 모조리 쿠바인과 포르투갈인의 혼혈이 바타크 방언으로 통역해 주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선장은 말레이어가 훨씬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자, 그러니까 내 말은, 같이 사냥을 떠날 힘세고 용감한 친구 몇 명이 필요합니다. 알겠어요? 사냥 말입니다.」
혼혈은 통역을 했고 시장은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더 많은 청중들을 향해 돌아서서 연설을 했는데 반응을 보니 성공적인 모양이었다.
「촌장님 말씀은요, 마을 전체가 투안 선장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사냥을 나갈 거라는 말씀입니다.」 혼혈이 통역했다.
「그래야지. 우리는 데블베이로 조개를 캐러 갈 거라고 자네가 말 좀 해주게.」
그 말이 전해지자마자, 15분간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마을 주민 전체가 참여했는데, 특히 노파들이 극성이었다. 혼혈이 선장 쪽으로 돌아섰다. 「이 사람들 얘기가요, 선장님, 데블베이에는 사람이 못 간다는데요.」
선장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대체 왜 안 된다는 건가?」
혼혈이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 사는 타파타파 때문입죠. 악마들 말씀입니다.」
선장의 얼굴은 이제 암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한테 말하게. 따라오지 않으면… 이 몸이 주먹으로 패대기를 쳐서 이빨을 죄다 뽑아 버리고… 귀를 찢어발기고… 목을 매달고… 이 한심무쌍한 부락을 몽땅 태워 버리겠다고. 알아들었나?」
혼혈은 충실하게 통역을 했고, 또다시 논쟁이 이어졌다. 마침내 혼혈이 선장 쪽으로 돌아섰다. 「이 사람들이 그러는데요, 가서 파당 경찰한테 투안 선장이 협박했다고 신고하겠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법이 있다고요. 시장님은 좌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J. 반 토흐 선장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해!」 선장이 포효했다. 「그 자식은…」 선장은 족히 11분 동안이나 숨도 쉬지 않고 떠들었다.
혼혈은 어휘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최대한 열심히 통역했고, 바타크 사람들이 다시 자기네끼리 아주 오랫동안, 좀 전과는 달리 실무적인 문제에 관해 논의하는 것에 귀 기울였고, 또다시 선장에게 통역을 해주었다. 「지금 하는 얘기는 뭐냐면요, 선장님, 투안 선장이 동네 유지들에게 벌금을 내면 법적인 고소를 취하할 생각도 있다는 겁니다. 지금은…」 그는 이 대목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2백 루피를 부르는데요. 그건 좀 지나치게 세잖아요. 5루피로 하자고 해보시지 그러세요?」
반 토흐 선장의 얼굴은 황갈색 얼룩들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처음에 그는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바타크 사람들을 남김없이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가, 3백 번 발로 차주는 정도까지 수위를 낮추었고, 결국에는 암스테르담 식민지 박물관에 촌장을 박제해서 전시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바타크 사람들은 그들대로 2백 루피에서 바퀴가 달린 철제 펌프로 양보했다가, 끝내는 선장이 벌금 대신 시장에게 석유 라이터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냥 줘 버리세요, 선장님.」 쿠바인과 포르투갈인의 혼혈이 간절히 애원했다. 「우리 가게에 재고 라이터가 세 개나 있지만, 셋 다 심지가 없네요.」) 그리하여 타나마사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J. 반 토흐는 깨달았다. 이제 백인의 명예가 경각에 달렸다는 사실을.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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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카렐 차페크 (Karel ?apek, 1890~1938)
1890년 1월 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헤미아 북동부 지역에서 태어났다. 명문 아카데미 김나지움을 전 과목 A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프라하 카렐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 파리의 소르본 대학을 오가며 수학했고, 미국 실용주의를 수용, 1915년 25세의 나이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대 초반부터 차페크는 체코 문학과 언론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1916년 산문집 『빛나는 심연 외(外)』를 출간한 것을 시작으로 장편 및 단편 소설, 희곡, 에세이, 동화, 인터뷰와 편지, 번역 작품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했다. 작품 활동을 하는 동시에 「나로드니 리스티」, 「리도베 노비니」와 같은 체코의 유력 일간지의 편집자로 일했고, 체코 민주주의와 반(反)파시즘의 선봉장이자 문화적 선각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는 그는 일곱 차례나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나치스 독일에 저항하는 정치 성향 때문에 끝내 수상하지 못했다. 독일이 프라하를 점령하기 몇 달 전인 1938년 12월 25일 인플루엔자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대표작으로 형 요세프 차페크와 공동으로 집필하여 <로봇robot>이라는 신조어를 세상에 알린 희곡 『R. U. R.』을 비롯하여 소설 『절대성의 공장』, 『호르두발』, 『별똥별』, 『평범한 인생』, 『크라카티트』, 희곡 『곤충의 생활』,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어머니』, 동화 『다셰니카: 어느 강아지의 일대기』, 에세이집 『원예가의 열두 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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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김선형
영어영문학과 대학원에서 논문 「Arthur Miller의 글에 나타나는 희망의 모색」으로 석사 학위를, 2006년 르네상스 영시를 전공하여 논문 「<내면의 낙원>과 『실낙원』의 정치성」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종대학교 초빙 교수로 재직한 바 있으며, 주요 역서로는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 『재즈』, 마거릿 애투드의 『시녀 이야기』, 실비아 플라스의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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