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교회, 마몬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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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맑시스트가 아니고,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는 유대인이었다. 이것은 기본적인 사실에 속한다. 기본적인 사실들을 떠벌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요즘은 이 사실에서 약간의 위안을 얻는다. 망해가는 기독교로부터 그래도 예수를 좀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종교는 많고, 기독교만 거기서 예외가 되라는 법은 없다. 영양 부족도 치명적이지만, 영양 과다는 치명적인데다가 추하기까지 하다. 지금 기독교는 혈관 속속들이 끈적끈적한 기름이 끼어 비대한 살집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잠시 더 버티겠지만, 지금의 기독교는 죽어가고 있으며, 죽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가 산다.
지금의 기독교는 예수를 기념하는 종교지, 예수를 ‘사는’ 종교가 아니다. 사제(師弟) 사이였던 유영모와 함석헌은 서로를 지극 정성으로 대했지만, 매우 엄정한 사람들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함석헌이 정부 허락을 받아 간디를 추모하는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유영모는 함석헌이 간디를 기념하는 것을 깊이 염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왜 간디를 기념하는가? 간디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내가 간디처럼 사는 것이 중요하지, 어째서 간디를 기념하는가?”
간디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지, 간디를 기념하는 것은 사실은 간디와 멀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은 예수와 멀어지기 위해 예수를 높은 곳에 고이 모셔놓는다. 예수를 기념하는 것은 사실은 예수를 먼 과거의 인물로 박제하여 가두어두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예수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 라고 했을 때, 그 말은 단순히 수사(修辭)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예수의 살과 피가 내 몸 안에 녹아들어 더이상 종이 아니라 예수의 친구가 되어, 나도 예수처럼 하느님나라, 동무들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기독교는 예수가 빠진 대신 종교 냄새가 너무 난다. 원래 냄새는 뭐든 상할 때 많이 나는 법이다. 열심은 열심인데 너무 냄새나는 신앙이고, 자기 냄새에 자기가 도취해있어서 남들이 자기한테서 무슨 냄새를 맡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종교 냄새가 난다는 것은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언어로 자기를 표현하지 못하는 종교라는 뜻도 되고, 일상의 삶 속에서 생활화된 종교가 아니라는 뜻도 된다. 그저 교회 안에만 갇혀있는 교리적인 종교이고, 틀에 박힌 종교라는 뜻이다. 이런 종교는 교회 밖의 세상에 대해 설득력이 없다. 교회 안에서는 열심이지만 일단 교회 밖 넓은 세상에 나오면 마치 외국어로 말하는 사람들처럼 소통이 안된다.
그러면서도 자기이익만큼은 확실하게 챙긴다. ‘교회재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회경제적으로 확실한 세력을 형성하고, ‘사학법 재개정’ 소동에서 보았듯이, 자기이익을 챙길 때에는 물불 가리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심한 경멸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공중도덕도 없다. 사람 많이 다니는 도심 한가운데에서 확성기를 틀어놓고 복음성가를 부르며 고성방가를 일삼는가 하면, 어디서든 가리지 않고 핏발 선 눈으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친다. 다른 종교를 향해 턱없이 우월감을 과시하려 들고, 오랜 세월 사람들이 지켜온 관습이나 생각의 습관을 존중할 줄 모르며, 교양없고 무례하다. 덩치가 작기라도 하면 눈총을 덜 받을 텐데 엄청나게 비대해졌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욕먹기 십상이다.
열심은 있지만 어리석은 열심이고, 그 근본 태도가 진리에 닿아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나 삶에 대해 도무지 생각이 없고, 그저 죽은 교리만을 되새김질하고 있을 뿐, 미래를 생각할 줄도, 자기자신에 대해 반성할 줄도 모른다. 예수의 정신을 밀어낸 자리에 교회 성장 마케팅과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질긴 생존본능이 들어섰다. 그래서 믿는 자의 정신은 광명한 데로 올라가지 못하고 무지몽매의 어둠으로 내려가기만 한다. 교회가, 기독교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을 지금 하기는 참으로 무색하다. 전체로서 기독교인, 한국기독교가 잘못되어 있고, 이제 조용히 입을 가리고 회개하는 일에 진보고 보수고, 주류 교회고 비주류 교회고 예외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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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맨 처음 교회가 생겨날 때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좋다. 교회는 예수 사후, 전에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선언하면서 모인 모임에서 유리했다. 교회가 생긴 것은 예수의 죽음 이후지만, 생전의 예수를 중심으로 모였던 모임과 역사적인 연속성을 지닌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까지 온전히 정성을 기울였던 열둘의 공동체, 그리고 그 외연에 있던 더 큰 익명의 제자 공동체는 교회의 모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마음과 뜻과 생각을 나누었다. 이를 통해 예수는 로마제국의 식민지배 아래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고 있던 갈릴리사람들의 가슴속에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에 대한 오랜 이스라엘의 기대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사라져가고 있던 인간다운 삶에 대한 희망을 일깨운 것이다.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는 원래 초기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사람들은 출애굽의 경험을 통해 이스라엘 신앙의 근간이 되는 하느님 체험을 하게 된다. 이때 이들은 히브리 민중의 고통과 울부짖음을 듣고 내려와 고통스런 삶에 참여하는 하느님을 경험한다. 이 하느님은 민중의 고통스런 삶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하느님이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해방의 나라를 세우는 하느님이다. 함께 역사의 짐을 지고 역사를 성취하는 하느님이며, 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이 다스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에 대한 이상(理想)은 민중들 사이에 면면히 이어져 예수에까지 내려오게 된다. 사실상 이 이상은 힘있는 자들의 돈과 권력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성실하게 애쓰며 살아가면서 만드는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우정과 환대의 그물망을 신뢰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실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함께 애쓰면서 노동하고 협력하며 사는 것이 좋은 삶이라는 사회적 공감대의 지지대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나라를 믿는다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세상 안에 함께 애쓰고 사랑하는 친구들의 나라, 동무들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하느님나라운동’은 이러한 이스라엘 민중의 기대와 믿음 속에서 탄생했다.
예수 시대에는 로마제국의 침략과 헤롯 가문의 수탈에 의해 전통적인 갈릴리 농경사회의 서로 돕는 자생적인 농민 협동조직이 거의 무너졌다. 로마제국과 헤롯 가문의 통치는 테러리즘과 폭력에 기반해있었고, 그로 인해 민중들은 자긍심을 잃고 내면적으로 갈기갈기 찢겼다. 그 속에서 예수는 갈릴리 농민들과 함께 밥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었다. 그렇게 해서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파괴의 위기에 직면한 갈릴리 농민들 사이에 서로 돕는 관계, 친구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했다. 하느님나라, 동무들의 나라를 다시 불러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 모두를 피폐하게 만든 가난에 대해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대신 예수는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게 했고, 서로에 대한 의심과 원한 대신 연대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게 했다. 그들은 서로 동무가 되어 빚을 탕감해주고, 삶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었다.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수천명이 보리떡 다섯덩이와 물고기 두마리로 배불리 먹었다는 기적 이야기들은, 예수가 그들을 스스로 살아가는 주체적인 삶을 향해 회복시키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탄생시킨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을 통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자기 인생을 스스로 살도록 요청받았다. 서로를 분열시키는 행동을 자제하고 협동하고 우정 있는 인간이 되도록 요청받은 것이다. 동무들의 나라, 하느님나라로 들어오라는 초대를 받은 것이다. 예수의 종교는 원래 민중들과 동무하자는 종교, 서로 친구하자는 종교였고, 초대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누구나 친구를 필요로 하지만, 특히 의지가지없는 사람들에게 친구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예수의 종교가 동무들의 종교였다는 것은 원래 그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늘을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을 보면서 위로와 희망을 얻어야 하는 사람들은 하늘과 땅 외에 달리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성서에서 이러한 민중들의 자의식은 ‘나그네 의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들이 정말로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국가나 돈 많은 유력자들이 그들의 의지가 되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것은 사람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우정과 환대였다. 어떻게 내 집 앞에서 거지가 떨고 있는데 두발 뻗고 편히 잘 수 있겠는가? 어떻게 내 입으로 밥숟가락이 들어가는 것을 빤히 쳐다보는 두눈 앞에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가? 인간은 원래 그럴 수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제도나 이념으로 인해 왜곡되고 비뚤어져서 그런 것이다. 사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제도보다 선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은 세상의 나그네라고 여겼다. 소종파(小宗派)였던 초대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당신들은 우리와 다른 부류라는 차별과 의심의 눈초리를 읽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당나귀를 숭배하는 자들이라고 놀렸고, 밤에 모여서 갓난아이 살을 베어 먹는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그들은 세상 안에서 불편했다. 그들의 세상살이는 마치 나그네가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것과도 같았다. 히브리서나 베드로전서에서는 기독교인들을 그리스어로 παροικοι, ξενοι 같은 단어로 표현했다. 이 말들은 외국인, 거류 외국인, 나그네를 뜻하는 말이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세계 안에서 낯선 자로 자신들을 인식했던 것이다. 그리고 구약성서에서 나그네와 외국인들을 잘 접대하라고 거듭 권면했듯이 초대교회 역시 외국인들이나 나그네들을 교회 안에 받아들이고 접대해야 한다고 했다. 너희가 나그네였으니 나그네를 홀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국가가 경영하는 복지제도나 돈에 의지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단순하고 소박한 우정과 환대를 먹고 성장했다. 세상살이에서 소외되고 불편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삶 한가운데에는 기쁨이 넘쳤고, 그들은 늘 기도하고 기쁨의 찬송을 불렀다. 이제 그들은 더이상 나그네, 낯선 사람이 아니라 친구였고, 함께 길을 가는 동무였으며, 하느님 안에서 형제요 자매였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구약성서와 예수의 하느님나라 정신을 이어받은 초대교회의 코이노니아, 곧 사귐이었고, ‘예수의 교회’의 모습이었다. 예수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했던 초대교회는 무언가를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 그냥 너와 나 사이에 소박한 사귐이, 코이노니아가 있게 하자고 했다. 가난한 친구들 사이의 사귐을 통해 이 세상 한가운데에 동무들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예수의 교회’의 핵심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단순한 교회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생명의 물을 마셨다. 아무래도 기독교의 생명은 겉보기에 휘황찬란한 때보다 도리어 아무것도 없던 때에 있었던 것 같다.
(「예수의 교회, 마몬의 교회」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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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박경미
기독교학을 전공, 성서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부터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재 여성신학연구소 소장이다. 공저서로는 『새하늘 새땅 새여성』, 『신학연구 5 0년』,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이 있으며 역서로는 『생태학적 치유』, 『네가 바로 그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갈릴리:예수와 랍비들의 사회적 맥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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