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요리책 서문을 써야 하지?”
처음 이 책의 서문을 부탁 받았을 때 나는 좀 의아했다. 하지만 이내 흔쾌히 수락했다. 평소에 내 책의 러시아어 번역가인 코스튜코비치가 내 책들에 쏟아부은 애정과 인내심을 높이 사고 있었고, 그녀의 해박한 교양과 지성을 존경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과연 내가 미식가라고 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카나르 아 로랑주[오렌지 소스를 곁들인 오리 로스트]나, 또는 볼가 강에서 나는 캐비아를 푸짐하게 얹은 러시아의 전통 팬케이크 블리니 앞에서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미식가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들은 그저 맥도날드의 맛에 오염되지 않은 미각을 가진 보통 사람들일 뿐이다. 진정한 미식가, 식도락가, 요리 애호가란 세계 제일의 카나르 아 로랑주를 내오는 레스토랑을 찾아 수백 킬로미터의 여행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론 나는 이런 부류에 끼지 못한다. 만일 내게 집 앞의 피자집과 택시를 타고 나가야 하는 맛집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으레 전자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정말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나 역시 대단한 미식가인 프랑스 친구에게 알바의 전설적인 송로버섯을 맛보이려고 랑게(내 고향과 가까운 지역으로, 이 책의 ‘피에몬테’ 편에 언급되어 있다)에서 수십 킬로미터를 달린 적이 있다. 또, 바냐 카우다[마늘, 안초비 등을 섞어 끓여 소스를 만들고 삶은 채소를 곁들인 요리]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 니차 몬페라토까지 가기도 했다. 그리고 생산지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벨기에 맥주 구즈gueuze를 마시러 브뤼셀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외곽까지도 가본 적이 있다(여담이지만, 맥주를 마시러 굳이 그곳까지 갈 필요는 없다. 영국 맥주 에일ale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과연 요리에 관심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사실 그렇게 먼 곳까지 갔던 것은 친구에게 피에몬테[이탈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주州]의 문화를 알려주기 위해, 내 유년의 마법 같았던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는 바냐 카우다를 다시 한 번 느껴보기 위해, 그리고 벨기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맥주가 과연 어떤 맛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나는, 입안의 즐거움을 위해 그 음식들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서, 옛 추억을 떠올리고 싶어서, 낯선 전통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음식기행을 떠난 것이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나는 가까운 피자집을 찾곤 한다. 하지만 다른 도시나 지역에 가면 박물관이나 교회를 방문하는 일보다 먼저 하는 일이 두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그 지역의 음식을 찾는 일이다. 다른 지역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곳만의 향취를 느끼고자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집, 거리의 쇼윈도 등을 눈여겨보며 걷곤 한다. 그리고 그곳의 음식을 찾는다. 무엇보다 그 지역의 음식을 맛봐야만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내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음식을 꽤 많이 먹이는 편이다.《푸코의 진자》에서는 좀 덜하지만, 《바우돌리노》 《전날의 섬》이나 가장 최근 작품인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에서는 확실히 그랬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자들에게는 적어도 한 번 이상 음식을 먹였으며, 오랜 시간 주방에 머물게 하기도 했다. 독자들에게 남부의 섬이나 동방 비잔틴 제국, 수백 년 전에 사라진 세상 등을 보여주려면 주인공에게 음식을 먹이는 수밖에 없다. 주인공들이 음식을 먹을 때, 독자도 함께 그 음식을 먹으면서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코스튜코비치의 책을 소개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하겠다. 신비하고도 오묘한 이탈리아 요리에 탁월한 안목을 갖춘 코스튜코비치는 그녀의 음식여행으로 우리를(물론 입과 코를 포함하여) 인도한다. 그녀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음식뿐만 아니라 그녀가 살아가면서 체득한 이탈리아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요리에 대한 책이자, 한 나라와 그 문화에 대한 책이다. 사실 ‘이탈리아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당혹스럽다. 이는 ‘이탈리아의 풍경’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한 예로, 미국을 방문하여 차를 타고 여행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만 따라 몇 날 며칠 여행할 수도 있다. 중간에 휴게소라도 들르게 되면, 들르는 휴게소마다 똑같은 햄버거를 파는 것을 볼 수 있다. 북유럽 여행도 마찬가지다. 시야에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호밀밭, 이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하염없이 달리게 된다. 또, 중앙아시아의 대초원이나 사하라와 고비 사막, 오스트레일리아의 평원과 그 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산 에어스 록Ayers Rock(울루루Uluru)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거대한 자연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풍경 또는 경치라는 단어에서 폭풍우 치는 바다, 푸르디푸른 하늘, 들쑥날쑥한 산봉우리, 아찔한 낭떠러지, 한없이 펼쳐진 평원,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장엄함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탈리아에는 현기증 나는 고딕 성당이나 거대한 피라미드,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장엄한 풍경을 기대하고 여행 오는 사람들은 없다. 일단 알프스를 넘으면 색다른 경험이 시작된다. 우선 시원하게 뻗은 지평선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이탈리아 어디를 가도 오른쪽에는 언덕이, 왼쪽에는 완만하게 경사진 산들이 있다. 그리고 곳곳에 마을이 흩어져 있어 적어도 5킬로미터에 한 번씩은 길이 끊어진다. 게다가 도로마다(포po 평원의 길은 제외하고) 굽잇길과 우회로가 나타난다.
이탈리아의 풍경은 시시각각 변한다.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도 그렇지만, 같은 지역 내에서도 늘 다른 모습의 마을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형태가 일정치 않은 언덕들이 산에서 바다까지 줄줄이 이어져 있는, 끝없는 변화의 풍경이다. 피에몬테와 마르케, 토스카나의 언덕들은 공통점이 별로 없다. 동에서 서로, 아니면 척추처럼 세로로 뻗은 아펜니노 산맥을 횡단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심지어 바다까지 그렇다. 서쪽 티레니아 해안은 ‘섬들의 바다’라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드리아 해와는 확실히 다르다.
이탈리아의 이런 다양성은 경치뿐만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에게도 나타난다. 이탈리아에는 지역마다 다양한 방언이 있는데, 방언 간 차이가 심해서 서남쪽 시칠리아 사람이 북서쪽 피에몬테 사람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다. 한 지역에서 쓰는 방언이라도 도시마다 조금씩 다르고 심지어 마을마다 다르기도 해서, 처음 방문한 외국인들이 당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장화 모양의 반도에는 다양한 민족의 후예들이 산다. 로마인이 들어오기 전에는 북부에 켈트족과 리구리아인이, 동부에 일리리아인이 살았고, 중부에는 에트루리아인을 비롯한 이탈리아 계열의 여러 민족이, 남부에는 그리스인이 살았다. 이후 수 세기를 거쳐 고트족, 롬바르드족, 아랍족, 노르만족 등 다양한 민족이 들어왔다(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반도 북서쪽 경계 지역은 프랑스어와 비슷하고, 북동쪽 산지는 독일어를, 일부 남부 지역은 알바니아어와 유사한 방언을 쓴다).
풍경과 언어, 민족 집단의 이런 다양성은 무엇보다 음식에 그대로 드러난다. 외국에서 맛보는 이탈리아 음식은 그 맛과 상관없이 진정한 이탈리아 음식이 아니다. 중국 대륙 밖에서 맛보는 중국 음식이 그렇듯, 본고장을 벗어난 음식은 숙명적으로 새로운 지역의 기호에 맞춰 재탄생한다. 외국에서 만든 이탈리아 음식도 이곳의 ‘일반화된’ 이미지를 찾는 ‘일반적인’ 고객의 기대에 따라 고유한 그 무언가를 잃어버린다.
이탈리아 음식을 만나는 것은 그 지역의 언어뿐만 아니라 맛, 정신, 영감,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등 다른 지역과는 차별되는 그 지역만의 특징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즉, 시칠리아 사람과 피에몬테 사람, 베네토 사람과 사르데냐 사람을 구별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이탈리아 음식을 체험한다는 것은 그곳 사람들의 영혼을 발견하는 작업에 뛰어드는 것이다. 만일 이탈리아를 방문하게 된다면 우선 피에몬테의 바냐 카우다를 맛보고, 그 다음 롬바르디아의 카소엘라, 탈리아텔레 알라 볼로녜제, 아바키오 알라 로마나를, 마지막으로 카사타 알라 시칠리아나를 먹어보자. 마치 중국에서 페루로, 페루에서 아프리카의 팀북투로 옮겨가는 듯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여전히 이탈리아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서로의 음식을 접할까?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책이 이탈리아를 깊이 사랑하는 한 외국인이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본 이 지역의 음식 문화 이야기이며, 이를 통해 이탈리아 사람들은 어쩌면 그동안 잊고 지냈을,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에 담긴 커다란 의미를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Friuli Venezia Giulia 주의 이름에는 ‘줄리아Julia[고대 로마의 율리아 씨족을 말한다]’라는 말이 두 번이나 들어가 있다. ‘프리울리’라는 말도 사실은 ‘포룸 줄리Forum Julii[‘로마의 광장’이라는 뜻]’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로마제국이 이곳에서 건축과 법률뿐만 아니라 지역의 명칭을 통해서도 제국의 영원한 패권을 입증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방의 매력은 ‘로마적이지 않은’ 것, 즉 발칸 반도에 인접해 있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마치 표범 무늬처럼 군데군데 유포된 ‘슬라브적 문명’에 있다. 예를 들어 이곳에서 라틴어로 쓰여 있는 게시물들은 종종 슬라브식 발음으로 표기된다. 그런가 하면 슬라브 민족의 주식인 빵은 오랫동안 이 지역의 주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빵이 점차 식탁에서 사라지고 있다. 시골 장터에서는 밀과 함께 옥수수가 팔린다. 어떤 마을에서는 파뇨타[크고 둥근 모양의 빵]를 먹지만 바로 옆 마을에서는 옥수수로 만든 폴렌타[옥수수 가루로 쑨 죽]를 먹는다. 대체 왜 이런 지역 특색이 나타난 것일까? 이를 살펴보는 일은 그저 한 지방의 고유한 특징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의 식습관과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게 해주는 단초가 될 것이다. 우선 이 변방 지역의 옛 풍경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는 고대 로마제국 시대에 모자이크와 금장식으로 둘러싸인 호화로운 대도시 아퀼레이아의 지배 아래 있었다. 181년에 세워진 아퀼레이아는 이탈리아와 동유럽 그리고 북유럽을 잇는 해상무역 중심지였다. 발칸 반도로 향하는 집정관은 이곳을 경유했으며, 이곳 선착장을 거쳐 호박이 로마 세계로 반입되었다. 당시 호박은 지방의 공예품 분야를 더욱 풍성하게 키워나가고 있었던 주요 상품이었다.
이처럼 화려한 도시에 속해 있었던 프리울리(이탈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 우디네와 고리치아를 중심으로 하는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의 옛 이름. ‘베네치아 줄리아’는 항구도시 트리에스테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해안 지방을 포함하는 지방의 옛 이름으로, 2차 대전 이후 이 두 지역을 합쳐서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라 이름 붙였다)의 몇몇 중심지에서는 상감과 모자이크 예술이 탄생하고 번창했다. 그 명성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 ‘모자이크 도시la Citta del mosaico’라 불리는 스필림베르고의 프리울리 모자이크 세공학교는 아직도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이 지역에서 발달한 상감과 모자이크 기술은 보석 공예의 소품에도 이용되었지만, 모자이크 도로의 포장 공사에 더욱 유용하게 쓰였다. 모자이크에 사용되는 기본 재료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메두나 강의 황색 자갈, 탈리아멘토 강의 검은색·녹색·붉은색 자갈, 그리고 코사 급류의 흰색 자갈에 수입 재료인 아일랜드의 푸른색 자갈, 벨기에의 검은색 자갈, 피레네 산맥의 붉은 자갈로 멋진 광장과 테라스가 조성되었다.
프리울리의 모자이크 세공가들은 로마제국 시대부터 유명세를 떨쳤다. 최근 브라이다 무라다에서 발견된, 기원후 4세기의 모자이크 바닥을 보면 1600년이 지난 지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 솜씨가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스필림베르고 출신의 석공과 테라스 바닥 기술자들은 17세기 말에는 이탈리아와 유럽의 많은 도시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으며, 20세기에는 유럽의 파리 오페라 하우스와 미국의 뉴욕 세인트패트릭 대성당에 유명한 모자이크를 창조했다.
사실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의 주도는 트리에스테다. 하지만 트리에스테는 어느 세력에도 점령당하지 않았던 자유로운 도시로서, 자유항의 개방적인 분위기 때문에 주에 속한 다른 도시들과는 별개의 지역이 되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는 유럽 문화의 주요 거점을 담당하여, 이런 역할에서 정착된 고유한 관습과 지방 정서가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지역적 특성이 제대로 반영된 중심지는 트리에스테가 아니라 아퀼레이아다. 그라도 석호의 안정된 연안에 자리한 아퀼레이아는 고대 로마 시기,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베네치아 에 이스트리아Venetiae et Histriae’ 주의 주도였다. 이 지역은 로마제국이 몰락한 뒤에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요새가 되어, 로마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주요한 중간 정착지로 탈바꿈했다. 이 지역의 석호는 도적이나 종교 박해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했다. 뱀장어, 게, 개구리, 새, 아귀들이 서식하는 섬 인근의 늪지대는 훈족의 침략 초기에 아퀼레이아 주민들이 은신할 수 있는 장소였다. 늪지는 수개월, 아니 수년 동안이라도 숨어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피난민들은 생선을 주식으로 삼았다. 생선의 지방으로 빛을 밝히고 난방을 했으며, 그 껍질을 모아 옷을 해 입었다. 물고기가 그리스도교의 이상적 상징이듯 그들에게 물고기는 고난의 세월 동안 삶을 지탱시켜준 버팀목이 되었다.
아퀼레이아는 초기 유럽 기독교의 중심지로, 그 비중으로 따지자면 초기 기독교 유적의 산실인 라벤나나 신앙의 자유를 선포한 밀라노와도 견줄 만했다. 381년에는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가 참석한 가운데 유명한 공의회가 개최되어 아리우스파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때 베네치아 교구가 된 아퀼레이아는 라벤나와 함께 비잔틴 제국의 영토가 되어 5세기 동안 로마의 통치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590년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1세는 이에 조치를 취하기로 하고 국교회로부터 분리를 주장한 분리파들의 도시에 군대를 보냈다. 그리하여 한때 이곳은 지역적 이점을 이용해 석호에 흩어진 작은 섬들 사이에서 군대와 숨바꼭질을 하는 분리파 교도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후 순례자와 대희년大禧年의 시대인 11~15세기까지 동방 유럽의 사람들 모두가 걸어서 로마로 가기 위해 아퀼레이아로 몰려들었다. 순례자들을 제일 먼저 맞아들인 도시는 이들을 위해 실질적인 교리 일체를 주관하는 것은 물론 보호 기지 역할까지 톡톡히 했다. 이 시기 아퀼레이아의 대주교, 즉 베네치아 교구의 수장은 로마 교황만큼이나 영향력이 있었다.
1700년대에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합스부르크 왕가가 남긴 중부 유럽의 위대한 과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 땅은 가까운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던 15~18세기의 흔적이 훨씬 특징적으로 남아 있다.
바다를 지배하며 새로운 섬과 식민지를 점령하는 일에 주력했던 베네치아는 쉽고 빠르게 정복한 식민 도시들의 번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삭막한 지역에 ‘팔마노바Palmanova’와 같은 군사기지를 짓는 것으로 그쳤을 뿐이다. 팔마노바는 요새 도시로, 1593년 이 분야 최고의 베네치아 전략가, 기술자, 건축가, 역사가들이 참여하여 건설했다. 르네상스 시대 도시 계획가들이 그린 이상적인 설계도에 따라 건설된 계획 도시 팔마노바는 오늘날까지도 꼭짓점 아홉 개가 있는 완벽한 별 모양의 도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도시 주변은 외벽 세 개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중 두 개는 베네치아 사람들이 세운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나폴레옹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아무튼 이런 사실은 베네치아 사람들이 프리울리 사람들을 그저 도시 건설에 투입되는 노동력으로밖에, 또는 오스만과의 전쟁에 내보낼 잠정적인 군대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결과적으로 베네치아 주변 지역의 사정은 참담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부나 조직체 하나 없이 고립과 방관, 가난과 기아의 길로 빠르게 접어들었으며, 땅은 황폐해졌고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다. 이 시기에 옥수수라도 없었다면 정말이지 모두 굶어죽었을 것이다(‘아메리카의 옛 선물’ 편 참조). 당시 신세계로 알려진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옥수수는 경작하기도 쉽고 영양가도 있어 16세기 중후반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 지방에도 널리 퍼졌다. 그 후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감자 역시 기아로 허덕이던 1700년대 러시아에서 구세주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옥수수로 만든 폴렌타는 고리치아, 우디네, 코르티나 담페초에서 매일같이 소비되는 음식이다. 그러나 한때는 최악의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러니까 18~20세기 이탈리아 북부 사람들이 오로지 폴렌타 한 가지로만 끼니를 해결하던 시절, 사람들은 펠라그라[비타민 B2, B6 결핍에 의한 피부병 및 신경장애]를 앓곤 했다. 1786~1788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괴테의 예리한 눈은 이곳 농부들의 건강 상태가 열악한 원인을 이렇게 진단했다.
나는 그들의 취약한 건강 상태가 옥수수와 메밀을 계속해서 먹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옥수수는 노란 폴렌타, 메밀은 검은 폴렌타라고도 불린다. 그들은 이 둘을 가루로 빻아 물에 개어서 걸쭉하게 끓인다. 독일인들은 반죽을 만들어 버터에 구워 먹는 반면, 이탈리아인들은 익힌 그대로 먹는다. 가끔은 치즈 가루를 곁들여 먹지만, 고기와 함께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식사를 하는 사람은 식도나 위에 음식물이 잔뜩 쌓여 있을 것이 분명하다. 아이들과 여자들은 특히 더할 것이다. 그들의 창백한 안색이 결핍된 영양 상태를 증명해준다.
-괴테, 《이탈리아 여행Viaggio in Italia》, 1786년 9월 14일, p. 37.
괴테의 조언에 따르기라도 한 듯 이제 이곳 사람들은 폴렌타를 지혜롭게 섭취한다. 일단 폴렌타가 익으면 살짝 구워서 살루메[햄, 소시지 등의 가공식품류], 치즈, 생선, 육류 등을 곁들여 먹는다. 이로써 비타민 결핍, 즉 펠라그라에 걸릴 위험을 피할 수 있다.
프리코(버터로 볶은 양파와 감자에 신선한 몬타지오Montasio 치즈를 넣어 납작하게 구운 것)는 이탈리아 전역에 알려진 이 지역 대표 메뉴다. 이른 아침, 가축을 목초지로 끌고 가기 전 농가의 아낙들은 난로 위 따듯하게 데워진 선반에 전날 먹다 남은 치즈 조각과 감자를 놓아둔다. 이렇게 해서 전날 저녁에 남은 음식들은 다음 날 훌륭한 점심 식사로 둔갑한다. 프리울리 농가의 난로는 굉장히 특별하다. 집 한가운데 자리한 둥근 난로는 냄비 등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구리로 된 선반 두 개가 있다. 높이가 다른 두 선반은 가운데에서 타오르는 불로 데워진다. 온도는 그리 높지 않아 낮은 선반 위의 음식은 식지 않을 정도이고, 높은 선반 위에 놓인 음식은 오랜 시간 천천히 데워지므로 하루 종일 그대로 놔두어도 된다.
(에코 서문 전문,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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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엘레나 코스튜코비치 (Shmuley Boteach)
러시아에서 태어난 엘레나 코스튜코비치에게 이탈리아는 제2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코스튜코비치는 작가이자 화가인 할아버지에게서 예술과 문화에 대한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모스크바 주립대에서 이탈리아 문학과 러시아 시문학, 번역을 공부하였고, 졸업 후 8년간 문학잡지 매거진의 이탈리아 부문장으로 활동하며 출판계에 들어온다. 그 후 ‘이탈리아’와 ‘러시아’라는 너무나도 상반된 환경의 나라 사이에서 문학적 교류에 힘쓰던 중 운명적인 작품, 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번역한다. 전문 번역가들도 혀를 내두르는 에코의 까다로운 문장을 섬세하고 뛰어난 필치로 옮겨, 이 책으로 ‘러시아 올해의 번역상’을 받는다. 코스튜코비치의 뛰어난 번역 솜씨를 눈여겨본 언어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그녀와의 인연을 이어나가 그 뒤로도 러시아에 출간된 에코의 작품은 언제나 코스튜코비치가 도맡아 번역하였다. 번역상을 수상했던 1988년부터 20년간 그녀는 꾸준히 출판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편집자로서 러시아 문학 시리즈를 펴내고, 다양한 출판 축제와 도서전, 그리고 이벤트 현장에서 이탈리아와 러시아 양국의 문화를 알리고 기획하는 인물로 활약했다. 그녀는 다수의 번역 및 저술을 통해 Zoil(1999), Grinzane Cavour Moscow(2004), 러시아 레스토랑 협회에서 주는 Welcome Prize(2005), Bancarella(cucina) Award(2007, 이탈리아), Chiavari Literary Prize(2007, 이탈리아), Premi Nazionali per la Traduzione(2008, 이탈리아) 등 수많은 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10년간 이탈리아 트렌토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과 번역에 대해 가르치고, 트리에스테 대학과밀라노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지금까지 이탈리아에서 20년이 넘게 생활해오고 있다. 이탈리아 생활을 하면서 코스튜코비치는 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도 음식에 관한 대화로 흘러가게 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독특한 언어습관에 당황스러워하다가, 이내 학문적 호기심으로 이를 승화시켰다. 그리고 집요한 관찰과 학구열을 통해, 음식에 맛과 풍미만이 아닌, 그 땅의 기억과 삶에 대한 애정을 담아 만들어내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요리와 식문화에 매료되었다. 그녀는 중년의 나이에도 카메라를 들고 장화모양의 지중해 반도 곳곳을 누비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이 만든 음식을 탐닉했다. 그리고 가히 음식이란 만화경으로 다룰 수 있는 모든 영역을 담아낸 역작 『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음식이야기를 좋아할까』를 집필한다. 이 책으로 이탈리아 전통과 유산을 대표하는 ‘반카렐라 델라 쿠치나’상을 수상했고, 요리계의 오스카상 ‘2010 IACP Cookbook Award’최종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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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김희정
이탈리아어를 전공, 논문 「그람쉬의 지식인에 대한 고찰」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내일신문> 기자와 북부이태리한인회 <포럼 코레아> 기자를 거쳐 현재 이탈리아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한 도서로는 『디오니소스의 철학』, 『디오니소스의 영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