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말과 글의 영역에서 사랑이란?
‘설명하는 힘’이 좋은 세 작가
안녕하세요. 참 많이들 왔군요. 이래서는 강의실에 다 수용할 수 없을 테니 미안하지만 다음 주부터 인원수를 제한하겠습니다.
첫 수업에 여러분에게 자기소개 대신 리포트를 써오라고 할까 생각 중입니다. 그것으로 수강자를 선발해도 되겠지요? ‘쳇, 리포트를 쓰라니 귀찮은걸. 그렇게까지 해서 강의를 듣고 싶지는 않아.’ 이런 사람은 수강을 포기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잊어버리기 전에 리포트의 제목만 발표해두지요. “내가 이제까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덜렁거리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짧은 이야기를 써오세요. 천 자면 충분해요.
채점 기준은 ‘설명하는 힘’입니다.
왜 ‘설명하는 힘’이 중요한가.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갑자기 ‘창조적 글쓰기’라는 강의의 본질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데, 내친걸음이니까 ‘갑작스레 본질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설명하는 힘’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일류 작가는 예외 없이 설명을 잘합니다. 하시모토 오사무橋本治,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모두 설명을 잘합니다. ‘설명을 잘하는 작가’를 떠올리면 순간적으로 이 세 작가의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갑니다. 설명이라는 능력이 작가적 재능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점은 여러분도 잘 아실 테지요.
설명을 잘하는 사람은 친구들 중에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물의 본질을 대략 파악해 핵심적인 요소만 콕 집어내어 적절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기술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자유자재로 초점 거리를 조정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먼 시점에서 항공사진으로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대상을 보는가 하면, 다짜고짜 피부의 땀구멍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듯 가까이 접근합니다.
하시모토 오사무의 작품 중에 「바벨탑バベルの塔」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지방 도시에 30층 건물로 들어선 고층 호텔 이야기입니다.
근처에 사는 노부부가 저녁식사를 하러 나간 김에 그곳을 방문합니다. 길을 걸어가다 보면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있고, 호텔이 있고, 패밀리 레스토랑이 있고, 도넛 가게가 있습니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 800엔짜리 커피를 마시고, ‘1인당 3500엔의 뷔페’에서 중화요리를 먹고 ‘별로인데…’ 하며 맛을 평가합니다. 그런 세세한 기술이 마지막 한 페이지를 남기고 계속 이어집니다. 자, 마지막 대목을 읽어봅시다.
드디어 호텔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는 거대한 파친코 두 곳이 오픈했고, 파친코와 고층 호텔을 따라 도로 변에 라면집과 라면집과 덮밥집과 햄버그 전문 패밀리레스토랑과 나가사키짬뽕집과 사누키우동집과 만둣집이 줄줄이 늘어섰으며, 중고책방 북오프와 게임소프트 가게와 비디오 대여점과 만화방이 두 곳이나 생겼습니다. 겉보기에는 ‘가난한 젊은이의 거리’ 같았지만 젊은이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고, 기껏해야 오타쿠와 고등학생이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정도였습니다.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라면집과 라면집과 덮밥집”이라고 했잖아요. 이런 식으로 꼼꼼하게 하나하나 짚어가는 점이 하시모토 오사무답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라면집과 덮밥집’이라고 했겠지요. 아니면 ‘라면집 두 곳과 덮밥집’이겠고요. 이것을 굳이 “라면집과 라면집과 덮밥집”이라고 자신감 있게 쓸 수 있다는 점이 하시모토 오사무의 천재성입니다.
집요하게, 열거하듯, 거리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우리들의 ‘눈이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라면집 A와 라면집 B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이런 식으로 문득 미시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그런데 다음 줄에서 돌연 초점 거리가 바뀝니다.
이윽고 세월이 흘러 남편은 정년을 맞이했고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아내는 혼자서 살다가 죽었는데 그 후 3백 년이 지났습니다.
(웃음) 이 부분을 읽었을 때 ‘과연 하시모토 오사무로구나!’ 하고 하늘을 우러러 신음을 토했습니다. 소걸음처럼 느릿한 노부부의 행보에 맞춘 자잘한 풍경 묘사가 몇 페이지나 이어지더니 갑자기 ‘3백 년이 지났습니다.’ 하고 끝내다니요. 이런 일이 또 있을까요?
좀 더 읽어보겠습니다. “그런데 초고층 빌딩을 부수려고 하면 돈만 들 뿐이고, 이제 와서 재개발을 할 리도 없는 터라 호텔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야 그렇겠지요. 그 뒤로 3백 년이 지난 빌딩을 묘사하는 부분이 몇 줄 나오다가 마지막에 ‘주변에는 야생 사슴이 뛰어다니고 있습니다.’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여기에서 소개한 글만 봐서는 ‘하시모토 오사무가 설명을 잘한다’는 느낌을 못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야기할 때 초점 거리가 빠르게 이동한다는 점은 알아챘으리라 봅니다.
미시마 유키오도 설명에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풍요의 바다豊饒の海』 제3부 “새벽의 절暁の寺”에는 화자 혼다 시게쿠니本多繁邦가 불교의 유식론에 나오는 ‘아라야식’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개념은 엄청나게 난해합니다. 그렇지만 미시마 유키오의 서술을 읽고 있노라면 ‘오호라,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에 술술 넘어갑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설명을 잘합니다. 『1Q84』에는 1960년대 좌익 과격파에 대한 기술이 나옵니다. 과격파였던 젊은이들 일부는 정치운동에 패배한 뒤 유기농업, 코뮌, 생태주의ecology, 명상 같은 분야로 옮겨갔습니다. 하루키는 반란을 일으킨 청년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갔는가에 대해 압축적으로 설명을 시도합니다. ‘선생’이라 불리는 사람이 당시의 사건을 술회하는 부문은 원문으로 겨우 10페이지에 불과합니다.
“‘자, 들어보게.’ 하고 선생은 말했다. ‘때는 그러니까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네.’”라고 시작해 단 10페이지! 이 정도의 분량으로 좌익 과격파의 심성사心性史를 실로 선명하게 설명해냅니다. 나는 동시대인으로서 이토록 ‘과격파 정치에서 컬트 집단으로’ 나아간 변천의 역사를 훌륭하게 설명한 글을 읽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설명을 잘하는 작가들의 공통점은 먼 곳에서 거시적으로 조감하듯 내려다보는가 싶으면, 갑자기 미시적으로 현미경적인 거리까지 카메라의 눈을 들이대는 등 초점 거리의 줌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짧은 이야기를 써보라는 과제를 낸 것은 사실 여러분의 ‘설명하는 힘’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사물을 바라볼 때 얼마나 자유롭게 시점을 이동할 수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독자에 대한 경의
창조적 글쓰기라는 과목을 시작한 지 6, 7년쯤 됩니다. 강의를 기획한 것은 나바에 가즈히데難波江和英 선생입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의 대학에는 ‘글쓰기’를 가르치는 과목이 별로 없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의 대학과 대학원에는 창작학과, 창작 코스가 꽤 있지만요. 이런 강의에서는 전문 작가가 소설 쓰는 법을 가르칩니다. 수강생 중에서 전문 작가가 나오기도 합니다.
딱히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글쓰기’는 남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재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듯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꾸준히 노력해서 방대한 문학작품을 읽거나 문체를 연구한다고 해서 ‘글을 잘 쓰는’ 노하우를 체득할 리 없다고 말입니다.
확실히 ‘글쓰기’를 학교에서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초등학교에서도 글자나 작문의 기초는 가르칠지언정 글쓰기를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올라가도 문법, 고문, 한문, 문학사는 가르칠지언정 글쓰기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원이나 입시 전문학원에 가면 ‘소논문논술을 쓰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의 방법이 아니라 실리적인 글쓰기입니다. 입시 전문학원에서 소논문을 쓰는 방법을 가르치는 선생님들께는 좀 죄송한 얘기지만, 입시 기술이란 글을 쓸 때 ‘어떻게 하면 출제자와 채점자의 마음에 들까?’를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글을 쓰면 ‘좋은 점수를 받을까?’ 하는 것만 신경 씁니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말’과 어떻게 맞닥뜨릴까, 자신의 고유한 문체를 어떻게 발견할까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랑 같아 쑥스럽지만 나는 중학생 무렵부터 현대국어 과목의 모의시험 성적이 항상 최상위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제만 보고도 출제자가 ‘어떤 답을 원하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의 문제를 낸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답을 쓰면 기뻐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지요. 수험생이었던 우치다 다쓰루에게는 독자에 대한 경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쓰면 채점자가 기뻐할 것이라고 넘겨짚고 ‘채점자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답안을 썼으니까요. 가끔 진심으로 생각하는 바를 답안으로 써내면 점수가 좋지 않았지요. 정직하게 쓰기보다는 자기 생각도 아닌 것을 작문으로 내면 점수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채점자를 더욱 우습게 여겼지요.
그러나 지금은 독자의 지성을 얕잡아보고 글을 쓸 만큼 자신이 메말랐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중학생 시절부터 입시 때문에 작문 방법을 배웠겠지만, ‘독자에 대한 경의를 중요하게 여기자’고 배운 경험은 없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출제자가 이런 대답을 요구할 테니 이렇게 쓰라는 식으로 배웠겠지요. 출제자의 머릿속에 있는 모범답안을 예상하고 그것에 맞추어 답을 쓰면 된다는 냉소적인 태도는 입시 공부를 통해 어릴 적부터 여러분 뇌리에 새겨져 있습니다. 줄곧 그런 훈련을 쌓아왔기 때문에 여러분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거의 치명적일 만큼 글을 쓰는 힘이 심각하게 훼손당한 상태입니다. 참 안타깝지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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