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백성 없이 통치하는 왕, 병사 없이 전쟁을 벌이는 장군, 또는 노동자 없이 이윤을 거두는 기업가를 상상해보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많은 이가 마치 사회에 통치자, 전쟁 지휘관, 돈벌이 천재만 사는 것처럼, 아니면 적어도 이들만 중요한 것처럼 역사를 기술한다. 본 저자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책은 보통 사람들이 중요하며 그들의 역사야말로 중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역사 속에서 보통사람들이 수행한 역할은 현대 유럽 역사의 필수적 부분임에도 흔히 간과돼왔다. 역사 덕분에 우리는 사회가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해왔는지 확인할 수 있고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을 식별할 수도 있다. 이는 많은 경우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벌어진 민중투쟁의 이야기다.
이 책은 중세부터 시작되는 유럽사의 대안적 독해를 제시한다. 이 책은 통치자들을 강조하는 전통적 주제와 관심에만 초점을 맞추는 대신 지금과 같은 유럽을 만드는 데 기여한 이의 제기자, 반란자, 급진파를 조명한다. 대부분의 책은 최근 들어서 다양성을 더하려고 상투적 서사에 집중하면서도 여성이나 농민을 한 단락 정도 다룬다. 하지만 일반 독자가 중요한 인물과 사건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즉 부자와 권력자는 진지한 연구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만 한 게 아니다. 이들은 대체로 연구 가치가 있는 유일한 주제다.
《유럽민중사》는 주류 교과서와 연구 대신 읽을 만한 간결한 대안으로서, 유럽사의 발전과 궤적을 다르게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즉 역사를 상층계급 통치자와 사상가 들의 빛나는 통찰의 결과가 아니라 경쟁하는 집단 간의 투쟁을 통한 변동으로 바라본다. 물론 이런 시도를 하는 수많은 전문서가 있지만, 이들의 초점은 너무 한정돼 있다. 주된 문제는 이런 책들에 접근할 통로가 일반 독자나 학생이 아니라 학자나 교수에게만 열려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서유럽 봉건제의 쇠퇴와 붕괴에서 출발하는 이 책은 반란자, 이의 제기자, 비순응주의자, 보통사람의 기여를 폭넓게 추적한다. 이 책은 다른 교과서가 얼버무리고 넘어가거나 무시하는 개인과 사건에 주목할 것이다. 가령 이 책의 독자는 종교개혁 중에 얀 후스Jan Hus가 기여한 바와 19세기 파리코뮌을 좀 더 깊이 살펴볼 것이다. 이처럼 덜 알려진 개인과 사건을 조명하는 것 외에도 널리 알려진 사건을 바라보는 대안적 관점을 부각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병사들은 자국 정부가 퍼뜨린 애국주의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고, 때로는 아군 ‘상급자’가 난폭하게 군다고 생각될 경우 살해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혁명이 일어났고, 이를 분쇄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는 반동도 나타났다.
1920년대 말에는 경제 위기의 광풍이 보통사람들을 강타했다. 파시즘이 성장했고 수백만 명을 살해·고문했지만, 평범한 유럽인들의 격렬한 저항도 무수히 있었다. 이후 사회운동은 분쇄되고 왜곡되고 전복됐다. 첩자, 지하 작전, 엄청난 뇌물, 잔인한 군부독재는 현상을 유지하고 지배계급의 권력을 고수하기 위해 써먹은 전술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보통사람들은 다시 운동, 시위, 저항에 나섰다. 다시, 또 다시 투쟁은 계속됐다. … 압도적 열세에도 많은 경우 보통사람들이 승리를 … 최소한 부분적 승리를 거뒀다. 우리가 중세 선조들이 꿈꾼 것보다 더 많은 권리와 자율성이 보장되는 세상에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승리들 덕분이다.
아래 인용한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유명한 시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에 표현된 시각이 이 책의 주된 정신을 이룬다. 달리 말하면, 이 책은 독자에게 끊임없이 ‘그럼 보통사람들은?’이라고 묻도록 부추길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이 발전을 어떻게 바라봤는가? 그들의 생각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어떻게 느꼈는가? 무엇보다도 독자는 이제껏 배워온 주류 서사에 질문을 던지도록 자극받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를 만드는 것은 고사하고 역사 속에서 결코 언급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피에 목마른 봉건영주의 직계 후손이거나 최상위 0.01퍼센트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닌 한, 이 책은 바로 당신을 둘러싼 이야기다. 어쨌든 대다수 인간은 부자도 아니고 저명인사도 아닌, 일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이야기야말로 우리가 나눠야 할 바다.
첫 번째 걸음은 학생과 독자에게 몇 가지 도구를 제공해서 역사를 공정히 검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역사 연구를 하려면 지적 영향이나 정치적 관점과 별개로 살펴봐야 할 여러 방법론적 문제가 있다. 아래에서 비록 이런 문제들을 빠짐없이 정리하지는 못하지만, 역사가가 완전히 과학적이지는 않아도 공정하다고는 할 만한 결론에 도달하려면 피해야 할 몇 가지 관념의 함정을 제시하겠다. 어쨌든 역사학도 과학이기는 하지만, 물리학이나 화학을 과학이라 칭할 때와 똑같은 의미의 과학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역사 문제를 탐구하면서 우리는 미디어에서 논의되는 가장 명확한 편향에는 그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즉 역사는 당대의 특정인이나 정치적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오용된다. 이런 것 말고도 과거사 연구에 어떤 식으로든 진지하게 뛰어드는 이들을 늘 괴롭히는 실질적 문제가 있으니, 가령 유물이나 자료의 존속 문제가 그것이다. 간단히 말해 역사적 증거가 다 현재까지 남아 있지는 않다. 많은 경우는 문헌이나 다른 물증이 파괴돼 범죄가 은닉되고 대안적 의견이 삭제되거나 아예 특정 집단이나 유력 인사가 실제보다 더 나은 사회적 평가를 받는다. 유명한 사례 하나는 알렉산드리아의 전설적 도서관에 소장된 무수한 희귀 도서들을 파괴한 서기 391년의 기독교 광신도 봉기다. 타다 남은 소장품들마저 641년에 똑같이 광신적인 이슬람 통치자가 대부분 파괴했다. 다른 경우는 화재·전쟁이나 시간의 경과에 따른 부식으로 증거가 사라지기도 한다.
또 다른, 명백히 모순적인 문제는 선별의 편향과 관련된다. 근대 유럽사라면 수만 쪽에 이르는 몇십 권의 책으로도 주제를 충분히 다루기에 부족할 판이라는 점에서 당신이 지금 손에 든 이 책이 그 한 사례다. 말하자면 역사학자는 어느 주제는 탐구하고 어느 것은 무시할지, 어떤 사실은 의미 있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지 선별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이 문제 외에도 어느 역사학자든 마주치는 인간 능력의 선천적 한계가 있다. 나는 핀란드어, 포르투갈어, 아이슬란드어, 중세 라틴어나 그리스어 등은 한마디도 모르며, 몇 가지 언어 예를 들어 네덜란드어, 이탈리아어 또는 폴란드어는 몇몇 단어만 안다. 이 책은 주로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자료에, 그중에서도 명백히 영어 자료에 의존한다. 또한 학자들은 특정 주제를 둘러싼 자신의 선입견에 들어맞는 기사와 증거에 쏠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때로는 역사학자가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주제를 다루길 원치 않아서 공백으로 남겨 둔 탓에 선별의 편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트리스트럼 헌트Tristram Hunt가 논평한 대로, “앤 불린Anne Boleyn과 관련된 정보를 현대 영국에서 과연 얼마나 상세히 다룰 수 있겠는가?”
이것이 널리 퍼진 문제라는 사실은 1999년에 실시한 유명한 실험에서 확인된다. 참가자들은 각각 검은색 옷을 입은 세 명과 흰색 옷을 입은 세 명으로 이뤄진 두 팀이 어슬렁거리며 농구공을 패스하는 영상을 보았다. 참가자들은 흰색 옷을 입은 팀이 몇 번 패스하는지 세어보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런데 영상 중간에 고릴라 옷을 입은 한 사람이 화면을 가로지르며 5초간 가슴을 두드렸다. 실험을 거듭한 결과 약 50퍼센트가 고릴라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실제로 많은 참가자가 고릴라 이야기를 듣고 다시 영상을 보고 난 뒤에도 고릴라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역사 연구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에 비춰보면, 보통사람들이 바로 학자와 학생이 흔히 인식하지 못하곤 하는 ‘고릴라’라 하겠다. 어쨌든 어떤 시대 어떤 사회든 일체의 다른 시각을 주변화하고 이를 기껏해야 오류로 치부하거나 최악의 경우는 이단이라 몰아세우는, 전반적으로 지배적인 서사가 존재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아주 냉소적으로 논평한 것처럼, “역사의 진실이란 무엇인가? 동의를 얻은 허구다.”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또 다른 문제는 계급 편향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대다수 역사는 마치 왕, 여왕, 장군 그리고 나중에는 대재벌 ─ 간략히 말해 부자와 권력자 ─ 만이 역사에 어울리는 주제인 양 기술돼 왔다. 이 책은 자신의 시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을 통해 이 문제를 풍자적으로 지적한 브레히트와 같은 편에 선다.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다.
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 왔을까?
요점은 통치자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중요하다는 것 … 그리고 역사 기술에서 너무도 자주 망각되거나 무시되는 이들이 바로 평범한 여성과 남성이라는 것이다. 망각의 이유는 글로 쓰인 자료 중에는 상층계급을 다룬 게 더 많다는 데 있으며, 무시의 이유는 많은 역사학자가 이들을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반대로 많은 역사학자가 이들을 위험시한다는 데 있다. 미국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민중을 “거대한 야수”라 칭했다. … 그는 좋은 뜻에서 이렇게 부른 것은 아니었다.
보통사람들이 일반적 수준에서 무시당했다면, 여성들은 성차별 편향 때문에 좀 더 특별하게 생략되거나 시시한 존재 취급을 당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여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명제를 지지하는 증거가 조금이라도 있어서가 아니라, 기성 질서를 지배하는 지배계급 남성의 입맛에 맞아서 그런 것이다. 물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를 둘러싼 이야기는 있었지만, 이런 예외는 일반 법칙을 증명하는 데 기여할 따름이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시각으로 보면, 세계 인구의 절반이 역사학자들에게 가치 있는 주제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계급 편향과 마찬가지로 반反여성 편견의 역사는 길고도 추악하다. 실라 로보텀Sheila Rowbotham이 거의 반세기 전에 증명한 대로, 여성 억압 그리고 이에 따른 역사에서의 여성 배제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지배계급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이데올로기의 일부다. 이는 더는 진실이 아니며, 여성주의는 이제 서구의 ‘모든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의 세계’에서 주류의 일부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 연구 프로그램 등이 성장하기는 했어도 여전히 “여성사 영역에서조차 여성주의의 기반은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위협받는”게 현실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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